계엄으로 쌓인 스트레스, 발포 만호성 가니 싹 풀립니다
[윤현정 기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온 국민이 오랜만에 모처럼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 첫 토요일이었다.
식목일과 한식 등이 겹쳐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어느 때보다 붐비는 날이지만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흥 발포 만호성을 향해 달린다. 발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육군에서만 근무하다 수군으로 바뀐 뒤 첫 근무지다. 광주에서 발포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 거리다. 지금이 벚꽃,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이 만발한 꽃피는 봄날이니 어느 때보다 기분이 상쾌하다.
나로도로 들어가기 전에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도화면에 이른다. 도화면은 고흥에서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발포는 그중에서도 제일 남쪽 큰 마을이다. 발포鉢浦라는 지명은 뒷산의 지세가 호승예불胡僧禮佛 형국이라 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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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강이 자리한 발포항 풍경> 발포항 전경 |
ⓒ 윤현정 |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 앞에는 외국 선원들 수십 명이 뭘 기다리는 듯 옹기종기 서 있다. 우리나라에 외국 선원들이 많이 들어와 어업에 종사한다고는 들었으나, 이렇게 실감하기는 처음이다. 한국 선원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건물에서 한국인 한 명이 나오는데 분위기로 보아 이곳 책임자인 듯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곧 물김 공판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다.
굴강은 선박을 수리·보수하고 정박하기 위한 군사 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으로 사용된 선소(조선소)였다. 1990년 마을 앞 포구를 메워 약 25,000평의 부지를 조성했다. 그래서 지금의 굴강은 원래의 지형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래도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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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충무공 기념 유적비와 팽나무 발포항에 있는 이충무공 기념유적비, 유적비를 지키고 있는 수 백년 된 팽나무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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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포만호성 전경 이순신 장군 유적지 발포진성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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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렴박석광장의 청렴 박석 발포만호성 안에 있는 청렴박석광장의 청렴 박석 |
ⓒ 윤현정 |
이 공간은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 연도(1580년)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전국의 국민과 각급기관, 단체에 분양했던 1580개의 청렴 박석(가로 23cm, 세로 23cm, 높이 10cm)과 그 외 기부 등을 포함해 총 6237개의 바닥 돌로 이루어졌다. 바닥 돌에는 '청렴과 정직'을 다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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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포만호 이순신과 오동나무 발포만호성 안에 있는 청렴 광장 |
ⓒ 윤현정 |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 뜰 안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
그러나 이순신은 그 오동나무가 공유물임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오동나무는 전선의 닻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성박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옳지 않은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이순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오동나무를 베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이순신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병조정랑 서익이 순찰사가 되어 이순신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서익은 온갖 이유를 모두 갖다 붙여 끝내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발포만호 근무 1년 6개월 만이었다. 파직 후 고향에 돌아와 있던 이순신은 1년에 만에 다시 훈련원 봉사직(종8품)으로 복직되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대령에서 중위로 강등된 셈이다.
사회 지도층, 청소년 등 모든 국민은 이곳을 반드시, 자주 와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지금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정직하고 봉사하는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서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일신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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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무사 발포만호성 위 쪽에 자리한 충무사 |
ⓒ 윤현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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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발포항 바닷가에 위치한 발포역사전시체험관 |
ⓒ 윤현정 |
'현존 굴강은 부정방형 형태로 동서 긴 변이 40m, 서쪽 계단이 있는 남북 폭이 23m이고 유입구 쪽은 11m 정도로 마치 평면 형태가 주머니와 같다. 원래 굴강 석축은 석축 경사를 완만하게 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후기에 그려진 발포 지도에는 거북선을 비롯하여 3척의 병선이 정박해 있는 것이 보인다. 또한 굴강 언덕에 선창 1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창은 굴강과 병선을 관리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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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암 절벽 정상에 서 있는 송씨부인 동상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뒤 우암 절벽 정상에 서 있는 송씨부인 동상 |
ⓒ 윤현정 |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발호만호 황정록이 왜병과 싸우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인 여산송씨가 두 자식을 품에 안고 투신한 곳이 이곳 쇠바우 우암 절벽이라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가슴 저리고 위정자의 무능과 부패가 선량한 백성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이라는 생각에 새삼 당시 임금과 벼슬아치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마을에서는 송씨부인이 투신했다는 우암절벽 산 정상에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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