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으로 쌓인 스트레스, 발포 만호성 가니 싹 풀립니다

윤현정 2025. 4. 18.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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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호성, 정치인들부터 가봐야 할 이유... 이순신 장군의 최초 수군발령지, 청렴의 표상지

[윤현정 기자]

윤석열 대통령 파면으로 온 국민이 오랜만에 모처럼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 첫 토요일이었다.

식목일과 한식 등이 겹쳐서 집을 나서는 사람들로 어느 때보다 붐비는 날이지만 홀가분한 기분으로 고흥 발포 만호성을 향해 달린다. 발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육군에서만 근무하다 수군으로 바뀐 뒤 첫 근무지다. 광주에서 발포까지는 승용차로 2시간 거리다. 지금이 벚꽃, 개나리, 진달래, 목련 등이 만발한 꽃피는 봄날이니 어느 때보다 기분이 상쾌하다.

나로도로 들어가기 전에 계속 남쪽으로 가다 보면 도화면에 이른다. 도화면은 고흥에서도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발포는 그중에서도 제일 남쪽 큰 마을이다. 발포鉢浦라는 지명은 뒷산의 지세가 호승예불胡僧禮佛 형국이라 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다른 일설은 마을 앞 포구가 스님의 밥그릇처럼 생겼다고 하여 불리었다고 한다. 도화면은 간척으로 인해 임진왜란 당시의 지형과는 매우 다르다. 한때 조선소가 있었다는 덕흥리는 농촌 마을이 되었고 구암리 일대에도 넓은 간척지가 있다.
▲ <굴강이 자리한 발포항 풍경> 발포항 전경
ⓒ 윤현정
발포에 자리 잡은 성촌城村마을에 들어서자, 왼쪽으로 바다가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산기슭에 자리한 마을이 보인다. 도로 왼쪽은 바닷가에 굴강掘江이 있고 도로 오른쪽에는 기념비가 보인다. 도착한 시간이 마침 밀물 때인지 발포항에 바닷물이 들어차고 부둣가에 작은 어선들이 어림잡아 수십 척이 정박해 있다.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건물 앞에는 외국 선원들 수십 명이 뭘 기다리는 듯 옹기종기 서 있다. 우리나라에 외국 선원들이 많이 들어와 어업에 종사한다고는 들었으나, 이렇게 실감하기는 처음이다. 한국 선원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건물에서 한국인 한 명이 나오는데 분위기로 보아 이곳 책임자인 듯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니, 곧 물김 공판을 시작하겠다는 내용이다.

굴강은 선박을 수리·보수하고 정박하기 위한 군사 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으로 사용된 선소(조선소)였다. 1990년 마을 앞 포구를 메워 약 25,000평의 부지를 조성했다. 그래서 지금의 굴강은 원래의 지형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래도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수백년 팽나무 옆 이충무공 기념유적비
▲ 이충무공 기념 유적비와 팽나무 발포항에 있는 이충무공 기념유적비, 유적비를 지키고 있는 수 백년 된 팽나무
ⓒ 윤현정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굴강 오른쪽에는 이충무공 유적 기념비가 서 있다. 비 전면에는 '이충무공이 머무시던 곳'이라 새겨져 있으며 하단에는 이순신 관련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1955년 건립되었고 노산 이은상이 짓고 김홍현이 썼다. 기념비 바로 옆에는 우람하고 수백 년 묵은 팽나무가 마치 기념비를 지키고 있는 듯 늠름하게 서 있다.
▲ 발포만호성 전경 이순신 장군 유적지 발포진성
ⓒ 윤현정
기념비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완만한 오르막길로 들어서니 오른쪽으로 성벽이 쭉 이어진다. 성벽 위에는 군데군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이곳이 바로 발포 만호성이다. 현재 남아 있는 발포 만호성의 성곽은 성벽의 둘레가 560m, 높이는 약 4m다. 사면으로 성벽이 남아 있으나 동벽과 남벽은 민가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성벽 위로 올라가 보니 성벽 두께가 1m 정도 넓어서 걸어 다닐 수 있었고, 발아래에 동네와 바다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성안에는 동헌과 객사 등의 관아 건물터가 남아 있다. 또 동문, 서문, 남문, 망루 터도 확인되었으나 아직 복원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 청렴박석광장의 청렴 박석 발포만호성 안에 있는 청렴박석광장의 청렴 박석
ⓒ 윤현정
발포 만호성 성곽 안에 맨 동쪽으로 가니 '청렴박석광장'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이 공간은 이순신의 발포만호 부임 연도(1580년)를 상징한다는 의미로 전국의 국민과 각급기관, 단체에 분양했던 1580개의 청렴 박석(가로 23cm, 세로 23cm, 높이 10cm)과 그 외 기부 등을 포함해 총 6237개의 바닥 돌로 이루어졌다. 바닥 돌에는 '청렴과 정직'을 다짐하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인사청탁 안 받는 등 청렴해서 강등된 이순신... 정치인들이 봐야 한다
▲ 발포만호 이순신과 오동나무 발포만호성 안에 있는 청렴 광장
ⓒ 윤현정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이렇다. 이순신 장군은 그동안 내륙에서만 근무하다가 수군만호로 근무하게 되고, 근무를 시작한 발포진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는다. 어느 날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비망록을 보냈다.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 뜰 안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라!"

그러나 이순신은 그 오동나무가 공유물임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였다. 당시 오동나무는 전선의 닻을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성박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옳지 않은 일에는 절대로 굽히지 않는 이순신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국 오동나무를 베어가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이순신에게 인사 청탁을 했다가 무안을 당한 병조정랑 서익이 순찰사가 되어 이순신 앞에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서익은 온갖 이유를 모두 갖다 붙여 끝내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발포만호 근무 1년 6개월 만이었다. 파직 후 고향에 돌아와 있던 이순신은 1년에 만에 다시 훈련원 봉사직(종8품)으로 복직되었다. 지금으로 보자면 대령에서 중위로 강등된 셈이다.

사회 지도층, 청소년 등 모든 국민은 이곳을 반드시, 자주 와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지금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국가와 사회를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정직하고 봉사하는 자세를 다시 한번 가다듬어서 한국 사회 분위기가 일신될 수 있다면 좋겠다.

특히 이번 계엄과 내란 사태를 겪은 대내외 국민에게는, 약 4개월 넘게 쌓인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씻어 내기에 이곳 고흥 발포 만호성 '청렴박석광장' 탐방이 꼭 필요할 것 같다. 이 자리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본받아 국민 각자가 맡은 바 임무를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하게 처리하기를 다짐했으면 한다.
▲ 충무사 발포만호성 위 쪽에 자리한 충무사
ⓒ 윤현정
성벽 바로 위쪽에는 충무사가 자리 잡고 있다. 충무사는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으로 매년 충무공 탄신일(4월 28일)에 다례제를 지낸다. 충무사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어 충무사 담 둘레를 돌면서 안쪽을 살펴본다.
▲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발포항 바닷가에 위치한 발포역사전시체험관
ⓒ 윤현정
다시 골목을 내려와 바닷가에 자리 잡은 발포역사전시체험관 안으로 들어선다. 아담한 1층 건물로 규모는 별로 크지 않으나 이순신 장군과 발포에 관한 자료가 신경을 써서 잘 정리되어 있다. 굴강과 발포 만호성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자.

'현존 굴강은 부정방형 형태로 동서 긴 변이 40m, 서쪽 계단이 있는 남북 폭이 23m이고 유입구 쪽은 11m 정도로 마치 평면 형태가 주머니와 같다. 원래 굴강 석축은 석축 경사를 완만하게 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 후기에 그려진 발포 지도에는 거북선을 비롯하여 3척의 병선이 정박해 있는 것이 보인다. 또한 굴강 언덕에 선창 1동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선창은 굴강과 병선을 관리하는 건물이었다고 한다.'

'발포만호성은 1439년(세종 21)부터 만호(종4품)가 배치된 수군진이다. 성곽은 1490년(성종 21)에 둘레 1,360척, 높이 13척 규모로 축조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여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 국난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 전라좌수영의 관할 아래에 군현은 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 등 5관官이 있었고, 해역을 방어하는 수군진은 사도진蛇渡鎭, 방답진防踏鎭, 여도진呂島鎭, 녹도진鹿島鎭, 발포진鉢浦鎭 등 오포五浦가 있었다. 발포 만호성은 전라좌수영 관할 5관 5포 중 유일하게 거북선이 배치되었던 수군진성이었다.'
▲ 우암 절벽 정상에 서 있는 송씨부인 동상 발포역사전시체험관 뒤 우암 절벽 정상에 서 있는 송씨부인 동상
ⓒ 윤현정
한편, 전시관 뒤 우암 절벽 정상에는 송씨부인 동상이 세워져 있다. 품에는 갓난아기를 안고 곁에는 딸로 보이는 어린 소녀가 서 있고 부인은 먼바다를 애타게 바라보는 모습이다.

전설에 따르면 정유재란 때 발호만호 황정록이 왜병과 싸우다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부인 여산송씨가 두 자식을 품에 안고 투신한 곳이 이곳 쇠바우 우암 절벽이라고 한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절로 가슴 저리고 위정자의 무능과 부패가 선량한 백성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한 것이라는 생각에 새삼 당시 임금과 벼슬아치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마을에서는 송씨부인이 투신했다는 우암절벽 산 정상에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만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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