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자리로 내몰린 난민들의 택시운전사 자처하셨죠

한겨레 2025. 4. 13.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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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합니다 I 홍세화 선생 1주기를 추모하며
2022년 화성외국인보호소의 ‘새우꺾기’(손과 발을 뒤로 결박한 자세) 가혹행위 사건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는 고 홍세화 선생. 박상환 제공

2020년 늦가을이었다. 화성외국인보호소에 구금된 비국민들을 면회하는 시민모임 ‘마중’ 활동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경기 고양 일산에 있는 ‘마중’ 사무실을 찾아간 날 무작정 홍세화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박한 자유인’이라는 모임을 통해서 알게 돼 서너번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정도의 사이였다.

“선생님, 제가 지금 ‘마중’ 사무실에 와 있는데요, 외국인보호소에 갇혀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면회하는 활동을 시작하려고 해요. 저 혼자 너무 버겁기도 하고, 선생님은 프랑스에서 난민이었던 경험도 있으니 저와 함께 활동해 보시면 어떨까요? 프랑스어도 잘하시잖아요. 시간 괜찮으시면 잠깐 나오셔서 이야기 나눠보면 좋겠어요.”

“제가 지금 한겨레 칼럼을 쓰는 중인데, 한시간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기다려 주시면 끝나고 바로 나갈게요.”

그는 갑작스러운 제안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화답했다. 일주일 뒤 우리는 화성외국인보호소의 면회실에서, 이중의 아크릴판과 창살로 가로막힌 눈앞의 ‘국경’을 절감하며 함께 앉아 있었다. 첫 면회에서 그는 북아프리카 출신의 성소수자 난민 신청자 에이(A)와 프랑스어로 소통하며 꼼꼼하게 메모를 남겼다. 홍세화는 에이를 ‘친구’라고 불렀다.
(한겨레 2021년 1월15일치 홍세화 칼럼 ‘화성외국인보호소에서’ )

고국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은 에이는 한국에서 난민 신청했지만 불인정되었다. 이의 신청이 기각되고 난민 재신청을 하는 과정에서 1년이 넘도록 구금된 에이는 지병이 악화했다. 에이의 보호 일시해제를 위해 홍세화와 함께 ‘도래할 에이의 친구들에게’라는 제목으로 연대를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법무부에서는 보호 일시해제를 위해 보증인과 보증금을 요구했다. 홍세화는 에이의 보증인이 되었고, 편지를 받은 동료들은 십시일반으로 보증금을 모았다.

가까스로 ‘밖’으로 나온 에이의 거처는 충북 청주의 한 생활·교육 공동체가 마련해줬다. 에이가 보호소에서 나오던 날, 홍세화는 경기 일산에서 화성으로, 다시 충북 청주까지 운전하여 에이를 데려다줬다. 서울로 돌아오던 늦은 밤, 장시간 운전의 피로를 걱정하던 내게 그는 “제가 택시 운전을 몇년 했겠습니까, 걱정 마세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는 구금에서 풀려났지만, 비싼 특허약 없이는 치료가 불가능한 지병을 앓고 있었다.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그에게 약값은 커다란 부담이었다. 홍세화는 약사들을 모아 단톡방에서 약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궁리했고, 에이는 1년 치료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에이의 1심 패소 이후 항소심까지 홍세화는 준비서면을 쓰는 내내 서너시간씩 통역을 자처하며 동행했다. 우리는 ‘난민 재판 응원단’을 함께 꾸렸고, 변호사 없이 소송하는 상황에 놓인 난민 신청자들의 이른바 ‘나 홀로 소송’의 방청 연대로 이어졌다. 스무명 남짓의 난민 재판 응원단은 방청 연대를 하고 매달 조금씩 지원금을 모아 성소수자 난민 신청자 에이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 난민 신청자 티(T)에게 ‘난민 기본소득’을 2년간 지급했다. 비장함 가득한 구호나 대단한 슬로건 하나 없이, 그렇게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그는 종종 “국민의 민낯을 드러내는 존재가 바로 난민이며, 한국 사회의 윤곽을 그리는 것은 다름 아닌 가장자리로 내몰린 난민들의 삶”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국민의 자리에서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안온한 자리를 자각하며 난민과의 ‘연결’을 요청했던 그였다.

홍세화는 잘 놀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좀처럼 기차 타고 여행할 일이 없는 난민 신청자들과 함께 전북 군산 하제마을의 팽나무 축제를 가고, ‘마중’의 동료들과 비무장지대(DMZ) 생태 탐방을 하고, ‘소박한 자유인’ 구성원들과 함께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강연하고 이야기의 장을 만들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그는 주로 다른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말의 자리를 독점하면 “엔(n)분의 1씩 말하면 좋겠어요”라는 말로 반드시 조곤조곤 개입했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나기 사흘 전 병문안을 갔던 날. 돌아가며 병실을 지켰던 ‘소박한 자유인’의 동료들은 그와 함께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애틋한 시간을 소소한 농담과 수다로 채우고 있었다. 그의 병실에는 웃음과 울음이 함께 스며있었다. 정말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에 하고 싶던 말도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쉽사리 병실을 나서지도 못하며 머뭇거리던 내게, 그는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먼저 다정한 인사를 건넸다. “고마웠어요, 또 만나요, 아정씨.”

지난해 4월 장례식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영정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더할 나위 없이 멋진 모습이었다. 병실에서 만난 마지막 날 하지 못했던 말, 늦었지만 비로소 할 수 있게 된 말을 그에게 전하고 싶다.

“새해 첫날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떡국을 끓여주셨던, 손빨래의 감촉을 좋아하셨던 선생님. 당신을 만나고 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을 잊지 않고, 남은 이들에게 건네주신 물음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소박하고 작은 모임들에 조용히,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주셨던 선생님. 거창한 슬로건과 횃불을 내려놓고, 곳곳에서 모닥불을 피우며 작지만 구체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해 주신 선생님. 당신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치열한 물음을 던지며 여전히 우리 곁에 함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애도한다는 것은 정치적 실천을 하나하나 이어나가는 것으로서만 가능할 것 같아요. 너무 보고 싶습니다.”

※고 홍세화 1주기 추모위원을 모집합니다. 추모위원 신청: bit.ly/홍세화선생1주기

심아정/독립연구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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