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50글쓰기] "관식이가 따로 없지?" 남편의 말에 내가 한 대답

전영선 2025. 4. 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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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에 과몰입한 남편을 보며

동시대를 살아가는 4050 시민기자가 취향과 고민을 나눕니다. <편집자말>

[전영선 기자]

남편의 입에서 '관식'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온 것은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아래 폭싹)가 대망의 막을 내리고 두어 주일이 지난 뒤였다. 시골집에 다녀온 어느 일요일 저녁, 뒤란에서 캤다며 달래가 한가득 든 비닐봉지를 내밀며 남편이 말했다.

"힘들어서 고만할까 하다가 좋아할 마나님 생각해서 힘든 거 참고 다 캤지. 관식이가 따로 없지?"

그 말을 들으며, 마침내 남편의 입에서도 '관식'이라는 이름이 튀어나왔구나 생각했다.

나는 애순이 아닌데

한동안 지인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폭싹'이 화제에 올랐다. 만난 이들은 드라마를 보며 눈물을 한 바가지 흘렸다며 저마다 인상 깊은 장면을 말하곤 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속에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남자들은 자신을 '관식'이라 생각하고, 여자들은 자신을 '애순'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60이 안 된 내 주변 여자들이 스스로를 '애순'이라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다양했다. 어떤 이는 자식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길거리에 나서 본 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꼽았고, 어떤 이는 자식의 투정을 고분고분 받아주기는커녕 복에 겹다 타박만 해서라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자식을 돌보는 시간을 힘들어하기만 했지 그 시간을 애순이처럼 '그림같던 순간'이라 생각해보지 못해서라고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걷어 먹이는 데 애순처럼 열렬했나? 자문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쉬이 나왔다. 그러니 나 역시 애순에 나를 대입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남자들은 아닌 모양이었다. 자신의 꿈을 접고 직장 생활을 꾸준히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스스로를 '관식'이라 칭하고, 바람 한 번 피운 적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딸 바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관식'이라는 이름을 쉽게 입에 담았다. 말하자면 남자들은 관식에게서 자신과 닮은 한 면을 발견하면 여지없이 관식이와 자신을 동일시했던 것이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생기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이런 현상은 지금까지 우리네 인식에 뿌리내린 어머니, 아버지 상과 관련 있지 않을까 싶다. 엄격한 아버지와 사랑이 깊은 어머니를 뜻하는 '엄부자모'라는 말이 있듯 대체로 사람들은 어머니에게서는 '헌신'을, 아버지에게서는 '가부장'을 떠올린다. 그러다 보니 여자들은 스스로에게 높은 허들을 적용하고, 남자들은 낮은 허들을 적용하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남편은 관식이란다
 넷플릭스 <폭싹 속았수다> 스틸컷
ⓒ 넷플릭스
'폭싹'을 처음 볼 때만 해도 남편은 "남자들이 곤란해질 드라마"라면서 쓰게 입맛을 다셨다. 그러다 이내 드라마에 푹 빠졌다. 어느 인물 하나 개성 없는 인물이 없고, 어느 한구석 억지스러운 부분이 없다며 방영날마다 꼬박꼬박 일찍 퇴근해 본방 사수 도장을 찍었다.

남편은 '폭싹'을 보며 일찍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많이 떠올렸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애 시절 내내 즐겨 들었던 시아버지 이야기는 '폭싹' 속 관식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튼짓과 딸을 하대하는 일상이 흔한 시집의 마을에서 아내만을 바라보고 딸들에게도 하대 한 번, 욕설 한 번 내뱉은 적이 없다는 시아버지.

가족을 위해 원양어선을 타고 어렵게 땅을 일궈 지금의 시골 터전을 마련했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는 감기가 걸려 기침이라도 할라치면 나가서 기침하라고 소리를 치던 아버지를 곁에 두었던 내게는 꿈같은 이야기여서 늘 눈이 부셨다.

그런 아버지를 둔 탓인지 '폭싹'을 보면서도, 보고 난 이후에도 남편은 '관식'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심으로는 기대했던 모양이었다. 아내의 입에서 "꼭 당신 같어"라는 말이 나오기를.

남편의 말을 들으며, 매사에 '이만하면'이라는 기준을 껴안고 살면서도 유독 남편에게는 인색하게 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관식 같은 시아버지를 잣대로 삼다 보니 남편에게는 아버지로서도 남편으로서도 평가가 박했던 것이다.

"관식이가 따로 없지?"라는 남편의 물음에 나는 호탕하게 대꾸했다.

"맞네 맞어. 당신 관식 맞어."

앞으로는 남편에게 적용했던 허들의 위치를 낮춰 자주 '관식'을 발견해야겠다.
▲ 남편의 수고로 얻은 달래. 요즘 우리 부부의 최애 반찬은 구운 김과 달래장이다.
ⓒ 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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