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향 광주의 문화유산에 어른거리는 '친일의 그림자'
[임영열 기자]
▲ 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 있는 만귀정. 시지정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곳으로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 습향각에 친일파들의 시문이 걸려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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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사적 제375호로 지정된 '광주 신창동 유적'은 2000년 전 선사시대 때부터 광주 사람들이 비단옷에 고급 수레를 타고, 현악기를 연주하며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겼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문서로 기록된 역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선사 시대를 지나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선조들은 곳곳에 많은 삶의 흔적들을 남겨 놓았다.
광주 사람들에게 단순히 자연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는 무등산 기슭에는 시대를 아우르는 문화유산들이 즐비하고, 광주의 근대 100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양림동은 문화재의 '보고(寶庫)'와도 같은 곳이다.
▲ 광주공원에 있는 구 한말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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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향 광주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문화유산 중에는 일제 강점기 시대를 거치면서 항일의 역사와 함께 '친일의 그림자'가 숨겨져 있는 것도 있다.
광주광역시에서는 2017년 3월부터 운영한 '친일 잔재 조사 T/F팀'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시내에 비석, 누정 현판, 교가, 군사시설 등 총 65건(유형 47, 무형 18)의 친일 잔재물이 있음을 밝혀냈다.
이를 근거로 2019년부터 친일 잔재물로 확인된 문화유산 중 10여 곳에 '단죄문'을 설치했다. 단죄문(斷罪文)은 친일 인사의 친일 행적과 범죄 사실을 검증된 기록으로 적시하고, 일제 잔재 시설물에 대해서 역사적 사실과 함께 친일 잔재물로 분류한 이유 등을 적어놓은 글이다. 불행한 역사를 후손들에게 알리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 광주공원 선정비군. 광주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선정비 27기를 한 곳에 모아 비군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도원수를 지낸 권율 장군의 창의비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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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들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있는 '광주공원 선정비군'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 자리하고 있는 광주공원은 광주에서 최초로 조성된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이다. 1913년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 신사를 짓기 위해 조성됐다. 광주천을 사이에 두고 도심과 가까이 있어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즐겨 찾고 있다.
1980년 5·18 때 시민군들이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했던 5·18 사적지와 4·19 희생자를 기리는 '희생영령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시문학파의 창시자, 용아 박용철과 영랑 김윤식의 '쌍시비'도 사이좋게 나란히 서있다. 구 한말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가 유독 우뚝하다.
한국 근현대사의 명암이 고스란히 담긴 공원 동쪽 끝에는 각양각색의 비석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곳이 있다. '광주공원 선정비군(善政碑群)'이다. 광주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선정비 27기를 한 곳에 모아 비군을 조성했다.
▲ 광주공원 선정비군에는 대표적 친일파 3인방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의 선정비가 뽑힌 채 누워있다. 그 앞에 단죄문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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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한 윤웅렬(1840~1911)은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운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일본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이근호(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이다. 윤웅렬의 뒤를 이어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대표적인 친일 집안 출신으로, 이근호를 포함해 세 형제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홍난유(1856~1913)는 1905년부터 1913년까지 광주 군수로 재임하면서 의병 진압과 강제병합에 기여한 공로로 일제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친일 인사다.
광주공원에 이어 광주광역시 2호 공원으로 지정된 광주 남구 사동 사직공원에는 광주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양파정이 있다. 광주천의 물결이 '버드나무(楊)처럼 파도(波)를 친다'는 양파정은 1914년 광주의 갑부 정낙교가 지은 정자다.
▲ 광주 남구 사동 사직공원에는 광주천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양파정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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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파정에 걸려 있는 친일파 남기윤의 현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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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주인 정낙교는 풍류를 좋아하여 매년 전국 한시 백일장을 개최하였고 소리꾼들을 초정하여 잔치를 열었다. 이때 정낙교의 손자였던 정추와 정준채는 어린 시절 한동네에 살았던 정율성과 양파정에 자주 놀러 가 소리꾼들의 창을 감상하며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다.
▲ 어린 시절 양파정에서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던 정율성(1914~1976).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과 팔로군가를 작곡한 광주 출신 항일 혁명 음악가다 |
ⓒ 광주광역시 남구청 |
정봉현(1851-1918)은 전남 곡성 출생으로 일본 다이쇼 천황 즉위를 축하하는 글을 바치고, 일본 황태자 즉위 축송문을 지어 바치는 등 일제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여규형(1848-1921)은 경기 양평 출생이다. 다이쇼 천황 즉위를 찬양하는 글을 바치고, 황태자 즉위를 축하하는 시를 지어 '경학원잡지'에 게재했다.
남기윤(1879-?)은 경남 출생으로 경무총감부 경관연습소 경부, 조선총독부 경찰관 강습소 조교수 등을 지내고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 즉위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정윤수(1871-01921)는 조선총독부 직속기구인 경학원 사성에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고 '경학원잡지'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꽃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습향각'에도 친일의 냄새가
서구 세하동 동하마을 입구에는 만귀정(晩歸亭)이 있다. 만귀정은 효우당 장창우가 후학을 가르치고 만년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된 곳으로 서구 8경 중 제1경으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 만귀정 내에 있는 습향각. 습향각은 연못 주위에서 ‘꽃 향기가 엄습해 온다’는 의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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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향각에 걸려 있는 신철균과 남계룡의 현판. 신철균의 시 마지막 연에 “나라의 민생을 걱정하여 풍년 가을이 오기를 원하네”라는 대목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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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향각에는 신철균과 남계룡의 현판이 걸려있다. 두 사람은 일제 침략 전쟁 협력자로 알려져 단죄문이 설치됐다.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이들은 중일전쟁 당시 국방헌금 모금 등 전시업무를 수행한 공로로 '지나사변공로자공적조서'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원효사 부도전에 떡하니 서 있는 '송화식 공적비'
무등산 북쪽 기슭에는 천년 고찰 원효사가 자리하고 있다. 사시사철 무등산의 절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어 광주 사람들뿐만 아니라 외지 사람들도 많이 찾는 광주의 대표 사찰 중의 한 곳이다.
일주문을 지나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어우러진 길모퉁이를 돌아서면 그리 넓지 않은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전에는 원효사를 창건한 원효대사를 기리는 원효국사탑과 원효사를 중건한 원담화상탑 등 고승들의 부도와 탑들이 즐비하다.
▲ 원효사를 창건한 원효국사탑과 원효사를 중건한 원담화상탑 등 고승들의 부도가 즐비한 원효사 부도전에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송화식의 부도비가 떡하니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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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식(1898~1961)은 광주지방법원 부장판사와 광주고검장을 지냈다. 일제 식민지 시절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하며 사상범 전향 기관인 '광주보호관찰소'와 '광주대화숙' 간부로 활동했다.
태평양전쟁 중에는 전시동원 기구인 '국민동원총진회' 이사를 지내는 등 다양한 친일 기관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올해 3·1절은 월요일과 겹치면서 3일 연휴가 됐다.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 가까이 있는 '항일'이나 '친일' 관련 문화유산에서 그날의 의미를 새겨 보는 건 어떨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고, 잊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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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채널코리아뉴스>에도 송고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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