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출발점, 1992년의 우리는... 무리수 둔 감독의 진심
[김상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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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스틸 |
ⓒ 커넥트픽쳐스 |
1992년 봄, 대학가는 신입생맞이에 한창이다. 동아리 신입 모집도 열기를 더한다. 교정 곳곳에서 노상 홍보가 진행되고, 대학 생활에 기대가 가득한 1학년의 시선을 잡아끌려 애쓴다. 이제 2학년이 된 '민영'은 아직 동아리에 가입한 적이 없다. 늘 학교와 집, 교회만 오가며 모범생 그 자체인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우연히 본 노래패 '들꽃소리' 홍보에 묘하게 눈길이 간다. 동아리방 주변을 기웃거리던 민영은 한 명이라도 더 신입을 확보하려는 노래패 선배들에 떠밀려 엉겁결에 1학년 후배들과 함께 가입하게 된다. 딱히 싫지는 않다.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은 대학 캠퍼스의 낭만으로 가득하던 화면이 바뀐다. 폐업 절차를 밟으며 6개월째 임금이 밀린 삼형공업 공장이다. 급여 지급은 기약이 없는데 작업은 계속된다. 연장근무로 과로에 시달린 젊은 여성 노동자가 코피를 흘리다 픽픽 쓰러지지만, 기계는 무정하게 계속 돌아간다. 작은 공장이긴 해도 '성천'을 위원장으로 노동조합은 서 있다. 이들은 거듭 회사에 항의하며 체불임금과 퇴직금 지급 같은 생계대책을 요구한다. 출퇴근 거리 선전전과 피켓 시위를 진행하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민영은 노래패 활동으로 쳇바퀴 도는 것 같던 일상에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건 물론, 거리 홍보 때부터 눈길이 가던 동아리 선배 '진욱'에게 자꾸 시선이 끌린다. 그런 가운데 1학기가 쏜살같이 흘러간다. 민영의 사촌 언니는 사상연구동아리 '깃발'과 총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는 '열혈' 운동권이다. 원래도 친했는데 이젠 학교 안에서도 여러 겹으로 엮이기 시작한다. 사촌 언니의 활동을 잘은 몰라도 딱히 나쁘거나 불순해 보이진 않는다. 그저 앞으로 나서기가 겁이 날 뿐이다. 여름 농활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민영은 노래패에 더욱 애착이 간다.
한편, 삼형공업 상황은 날로 악화 일로다. 경영진은 위장 폐업으로 손을 털 작정이다. 노동조합은 점거를 기획하고 총학생회에 연대를 요청한다. 하지만 학생회의 동원도 예전 같진 않다. 노래패 선배들은 고심하다 신입은 남겨놓고 자신들만 참여하기로 한다. 구사대 일부의 협조로 공장에 진입하지만, 회사의 실질 주인인 유력 정치인의 사주를 받은 경찰 기동대가 강경 진압을 개시해 부상자가 속출하며 아수라장이 된다. 선배들이 위기에 처했음을 안 민영과 1학년들은 앞뒤 안 가리고 무작정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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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스틸 |
ⓒ 커넥트픽쳐스 |
'86' 세대라 불리는 과거 민주화운동을 경험한 이들은 어느덧 그전 세대와 다를 것 없이 기득권에 편입한 '꼰대' 소리를 들은 참이다. 억울한 구석도, 타당한 지적도 뒤섞인 상황에서 그들 세대가 희생을 치러가며 이룩한 민주주의가 무너질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 절박함이 솟아나지만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진 않다. 과거 '동지' 중 일부는 변절·훼절했거나 올챙이 시절 기억하지 못한다. 청년 세대는 무시무시한 군사독재는 경험해 본 적 없으니 옛날이야기 해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직접 대면하는 민주화 세대의 위선과 횡포가 더 피부에 와닿다 보니 갈등만 늘어난다. 자신들의 현주소가 초라하고 허탈할 만하다.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는 자신들, 그리고 후속 세대에 감독이 젊은 초심으로 무엇을 꿈꿨는지 전하고픈 일념의 작업이다. 그들 세대가 중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시점에서 이런 회고적 작업이 제법 나오고 있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 거의 다루지 않던 노동자-학생 연대('노학연대') 기억을 되살리는 도전이다. 상업 개봉영화에서 다큐멘터리를 제외하면 이런 사례는 여전히 희귀하다.
<귀향>으로 알려진 조정래 감독은 자신의 대학 1학년 시절인 1992년을 영화 속 시간대로 설정한다. 왜 이 시기일까? 1992년은 여러모로 전환의 시간이다. 군사독재에 다년간 항거를 거듭하며 절차적 민주화는 진전되지만, 근본적 변혁을 꿈꾸던 운동가들은 암초에 부딪힌다. 대안 체제로 상상하던 현실 사회주의는 소련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고, 중국은 개혁개방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 질서에 '공장'으로 편입했다. 올림픽 전후로 북한은 대한민국에 체제 경쟁에서 확연히 밀려났다. 대안으로 상상하던 사례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사상적 경향이 강하던 학생운동은 혼란에 휩싸인다.
영화 초반 3월 교정 풍경은 그 상황을 압축한 장면이다. 경제성장과 진전된 민주화로 인해 문화적 욕구와 경제적 실리 추구가 가능해진 사회 현실을 대학가 역시 닮아간다. 다양한 취미 동아리는 활황이지만, 사상연구동아리는 파리만 날린다. 노래패 역시 과거 민중가요 중심이 아니라 밴드처럼 변해가는 중이다. 예전 같으면 제안 즉시 출동했겠지만, 이젠 위험을 감수한 연대 공연 참가 결정하기도 힘겹다. 격동의 출발점이라 할 1992년에 감독은 초점을 고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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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스틸 |
ⓒ 커넥트픽쳐스 |
삼형공업의 내부 사정은 투박하게나마 거시적인 사회 구조를 압축하려 설정된다. 경영주는 바지 사장에 가깝고 실제 주인은 국회의원이다. 뒷배가 그렇다 보니 노동조합의 밀린 월급 달라는 당연한 주장이 졸지에 불순분자의 강경 투쟁으로 둔갑하고 만다. 애초 위장 폐업하고 회사 이익을 뒤로 빼돌려둔 참이라 아무리 교섭해도 소귀에 경 읽기 상황. 하지만 정치권과 기업, 검찰과 경찰 등 공권력이 일치단결해 있으니 아무리 절규해도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게 평범한 시민들은 체감하기 힘든 당대 현실의 어두운 구석을 드러내려 제작진은 이것저것 고심한다.
민영을 통해 감독은 '빨간 물' 들게 하는 의식화 교육이 아니라 현실에 눈감지 않고 정의와 양심에 따라 행동하다 보니 어느새 운동권이 되고 연대 투쟁에 나섰다는 그들 세대의 경험을 전달하고자 한다. 공부 열심히 해서 고생하는 가족을 돕겠다는 착한 마음이 다른 고통당하는 이들의 사정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고, 그러다 마침내 '전선'에 서는 과정의 형상화가 영화 전체의 방향타가 된다. 캠퍼스의 봄에서 평범한 대학 생활, 한 번쯤 가볼 만한 '낭만' 차원으로 체험하던 여름 농촌활동으로 연결되는 정규 과정의 다소 늘어지는 전개는 그런 고려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전대협과 한총련으로 표상되는 학생운동의 쇠락과 민주노총 건설로 이어지는 노동운동의 개화가 엇갈린 교차를 형성하던 시대상을 구현하려 애쓴다. 물론 한 시대를 온전히 화면에 펼치기란 지극히 어려운 숙제다. 본 작품 역시 여러모로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래서 마치 해당 시대를 일대일 축척이 아닌 '미니어처' 모델로 선보이는 모양새다. 1980년 5월 광주부터 1990년대 초중반을 2시간 영화에서 체감하게 만들려다 보니 세밀한 '재현'이 아니라 '재연' 드라마에 가까운 지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래서 등장하는 캐릭터 대부분이 역할이 고정되고 도구적인 설정에 머물 수밖에 없다. 도식적 설정과 전개도 피할 수 없다. 영화적 형식미학보다는 영상으로 보는 실록 드라마의 교육적 기능에 더 충실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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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스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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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 도식적 진행은 후반부 대부분을 점유하는 공장 안팎의 대치,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무대에 도착한 민영의 결단과 행동 build-up 하는 데 온전히 집중한다. 그래서 클라이맥스는 영화라기보다는 연극 무대에 가깝다. '레미제라블' 바리케이드 장면은 영화에서 경찰과 노동자 학생들의 대치로 변환되는 셈이다. 민영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마을의 '나의 친구야'는 실제 격렬한 싸움 속에서 부를 리 만무하지만, 영화가 개별 사건의 정밀 재현이 아니라 감독의 머릿속에서 그들이 체험한 시대의 압축 재연이라 보면 제작진 진심이 이해될 법하다.
실제 동시대 체험을 가진 연기자들은 능숙하게 소화하지만, 젊은 배우들은 물과 기름처럼 애매하다. 이는 그들 탓이 아니다. 어찌 보면 만든 이들의 의도를 배우가 먼저 체험한 셈이기 때문이다. 2016년 촛불 시위나 현재 탄핵 관련 시국을 떠올리며 경험하지 못한 야만의 시대를 화면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의 분투와 한계까지도 작품의 큰 그림 일부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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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스틸 |
ⓒ 커넥트픽쳐스 |
The First Soul: Song Written Again
2025|한국|드라마
2025.03.19. 개봉|119분|15세 관람가
감독/각본 조정래
출연 김정연, 윤동원, 박철민, 김동완, 김최용준, 남태우
제작 제이오엔터테인먼트
배급 커넥트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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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다시 부르는 노래> 포스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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