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안보지형 변화, 한국 방위산업에 새 기회 되려면?
<19>유럽의 전략 변화가 방위산업에 미치는 영향
대다수 유럽 지도자들은 여전히 미국과의 군사 동맹이 굳건하다고 대중에게 확신시키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유럽 대륙은 "그렇지 않다면?"이라는 가능성을 고민하기 시작했으며, 러시아의 위협에 스스로 대응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다.
오랜 기간 동안 유럽의 국방부들은 이러한 시나리오를 상상하는 것조차 꺼려왔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조약 제5조의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미국 역시 유럽의 방위력 강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유럽이 미국 지원 없이 독자적으로 군사력을 구축하는 것을 경계해 왔다. 1998년 나토 정상회의에서 당시 미국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3D' 원칙을 언급하며 유럽 국가들이 나토 전력과의 분리(decoupling) ,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전력의 중복, 미국과 캐나다 같은 비유럽 NATO 회원국에 대한 차별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 메시지는 1998년 이후 NATO에 가입한 중부 및 동부 유럽 국가들과 발트 3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에 강하게 각인됐고, 이들은 미국의 안보 보장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최근 미국 정부가 유럽에 대한 개입을 줄이려는 조짐을 보이며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이에 대한 유럽의 정치적 반응도 신속했다. 3월 초, 유럽연합(EU)은 방위비 지출을 확대하기 위해 최대 8000억 유로를 동원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폴란드 총리이자 유럽위원회(EC) 전 의장이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유럽은 이 도전에 맞서야 한다. 이 군비 경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이 글에서는 유럽 방위 산업의 공급망 현황, 특히 첨단 기술 분야에서 유럽이 독자적으로 군비 경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한국과의 협력 가능성을 모색해본다.
유럽 방위 산업은 각국의 산업이 얽힌 복합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중소기업부터 다국적 대기업까지 존재하며, 중소기업은 주로 특화된 부품이나 시스템을 제공하고 대기업들은 시스템 통합을 담당한다. 방위 산업 강국으로는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이 대표적이다. MBDA 같이 공대공 미사일, 크루즈 미사일, 방공 시스템 등의 첨단 무기를 개발하는 기업들은 진정한 범유럽 기업이라 할 수 있다.
유럽 주요 방산 기업으로는 다음과 같은 업체들이 있다. 우선 에어버스(Airbus)가 있다. 주로 민간 항공기로 유명하지만 전투기, 군용 수송기, 드론, 위성 분야에서도 활동한다. 영국의BAE 시스템즈(BAE Systems)도 있다. 전투기, 첨단 레이더 시스템, 해군 시스템, 전자전 기술을 개발한다. 프랑스의 탈레스(Thales)는 방위 전자 기술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한다. 프랑스 다쏘 항공(Dassault Aviation)은 스텔스 기능을 갖춘 다목적 전투기 라팔(Rafale)을 제조하고, 독일의 라인메탈(Rheinmetall)은 첨단 전차, 포병 시스템, 탄약 개발을 한다. 이밖에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Leonardo)는 헬리콥터 및 첨단 레이더 기술을 선도하고, 스웨덴 사브(Saab)는 그리펜(Gripen) 전투기와 미사일 시스템을 개발한다. SIPRI(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의 세계 100대 방산 기업 리스트에는 유럽 기업 28곳이 포함돼 있으며, 러시아 기업은 2곳뿐이다. 또 유럽 최대 방산 기업의 매출은 러시아 최대 방산 기업의 매출을 초과한다.
전반적으로 유럽 방위 산업의 역량은 막강하다. SIPRI 목록에서 더 많은 기업과 총 방위 매출을 기록한 국가는 미국 밖에 없다. 유럽 전체를 합치면 이 부문에서 중국을 능가하기도 한다. 유럽의 방위 산업은 규모만이 아니라 기술 발전과 방위 제품의 다양성에서도 인상적이며, FCAS(공중전투체계), 레이저 무기, 우주 기반 기술과 같은 차세대 시스템을 포함한다. FCAS는 6세대 전투기(현재까지 어느 국가도 보유하지 않음), 스텔스, 첨단 AI, 클라우드 기반 기능, 자율 드론, 그리고 다양한 군사 자산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안전한 전장 네트워크를 갖춘 차세대 프로그램이다. 라인메탈이 개발한 레이저 무기는 단순히 미래적인 기술이 아니라 비용 효율성에서도 뛰어나다. 미사일 한 발을 발사하는 데 수십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가 소요될 수 있지만, 고에너지 레이저 빔을 생성하는 비용은 그에 비해 극히 적은 수준이다.
그렇다면 유럽 방위 산업이 이처럼 규모가 크고 첨단 기술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여전히 안보를 우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유럽의 군산복합체는 여러 도전에 직면해 있는데, 그중 첫째가 파편화다. 유럽에는 나토 회원국 31개국(터키 포함 시 32개국)이 존재한다. 한 미국 분석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럽 방위 문제를 다루는 것은 마치 32개의 미니 펜타곤을 상대하는 것과 같다. 나토의 조정 메커니즘은 효과적이지만, 이는 항상 미국이 잠재적인 전쟁 수행에서 주요 역할을 맡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EU도 자체적인 방위 조정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EU가 본질적으로 경제 연합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명확하다. 게다가 영국, 노르웨이, 터키와 같은 주요 국가들은 EU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방위 통합이 더욱 복잡 해진다. 또한 나토 내부에서도 회원국들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방위 관련 정보를 서로 공유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며, 이는 방위 산업 관련 데이터까지 포함될 수 있다. 이러한 투명성 부족은 독립적인 유럽 방위 전략을 수립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며, 공동 안보 우선순위에 집중하는 데에도 장애물이 된다.
이러한 파편화는 일부 분야에서 중복 투자를 초래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전투기 개발 프로그램은 너무 많은 반면, 수송 헬리콥터 개발은 부족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물론 단순한 예시일 뿐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또 유럽의 방산 기업들은 주로 유럽 외부의 수출 시장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프랑스 및 영국 기업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으로 무기를 수출한다. 한 유럽 방산 경영진이 한 컨퍼런스에서 언급했듯이, 유럽 방산 기업들은 일반적으로 미국 기업보다 자국 정부로부터 더 독립적인 성향을 보인다.이는 중국이나 러시아의 방위 기업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진다.
최근 이러한 파편화를 해소하기 위한 새로운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작은 이니셔티브도 유럽 대륙의 안보 강화에 기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는 포병 탄약을 표준화하기로 합의했다. 이 조치는 장기적으로 생산 및 조달 비용을 크게 줄일 것이며, 북유럽 국가들이 공동 구매를 통해 더 효율적인 방위 체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유럽 방위 산업은 주로 주문 생산 방식(Build-to-Order)으로 운영되며, 복잡한 고급 장비를 소량으로 제작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나 전시 경제 체제로 전환해 대량 생산과 단기간 납품이 필수적인 상황에 대응하는 것은 큰 도전이 될 것이다.
유럽은 단순히 완제품 군사 장비만 해외 수입에 크게 의존하는 게 아니라, 핵심 부품과 원자재의 공급 의존도도 높다. 이는 대규모 분쟁 발생 시 공급망이 차단될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후, EU 정부의 방위 장비 구매 중 EU 내부에서 조달된 비율은 20%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현재 생산 중인 유럽 전투기 그리펜, 라팔(Rafale), 유러파이터 타이푼(Typhoon Eurofighter)은 외부 부품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다. 이 중에서도 사브의 그리펜이 가장 높은 의존도를 보이는데, 일부 방위 전문가들은 전체 부품의 최대 3분의 1이 유럽 외부에서 공급된다고 추정한다. 특히 제너럴 일렉트릭(GE)에서 제작한 제트 엔진을 비롯해 미국산 부품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유럽 방위 기업들은 자금 조달에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스타트업뿐만 아니라 기존의 대형 방위 기업에도 해당하는 문제다. 많은 은행과 투자 펀드들은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기준을 준수하며 방위 산업을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방위 조달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불투명한 점도 투자자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EU의 개발은행 역할을 하는 유럽투자은행(EIB)은 방위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 지원을 2025년까지 두 배 또는 세 배로 확대할 계획을 이번달 발표하며 이러한 문제 해결에 나서고 있다.
유럽의 안보 우려는 한국 방위 산업에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은 실용적이며 신속하게 배치 가능하고 비용 효율적인 방위 시스템을 생산하는 능력에서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폴란드는 유럽에서 한국 방위 시스템의 최대 구매국이 됐으며, 2022년 초부터 한국 기업들과 총 160억 달러 이상 규모의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은 주로 전차와 미사일 공급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럽 방위 기업들은 종종 기술적으로 더 발전된 솔루션을 제공하지만, 한국의 군산복합체는 대규모 생산을 효율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능력과 철강, 기계, 전자 산업을 기반으로 한 강력한 제조 역량에서 경쟁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럽 국가들이 한국산 방위 시스템을 도입하는 데 있어 우려하는 점 중 하나는 지리적 거리다. 한국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대규모 분쟁 발생 시 한국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군수 물자가 해상 봉쇄에 직면할 가능성이 있다. 또 다른 우려는 한국 자체의 안보 상황이다. 글로벌 분쟁이 발생할 경우, 한국은 유럽 파트너보다 자국 방위를 우선시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한국 방위 기업들은 최소한 일부 생산 시설을 유럽에 현지화하고, 유럽 현지 공급업체들을 공급망에 최대한 통합하는 전략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이 칼럼에서 표현된 견해와 의견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의 것이며 소속회사의 것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필자와는 Twitter에서 @LithiumResearch를 팔로우하거나 hitechcolumn@gmail.com으로 연락할 수 있습니다.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S&P글로벌 수석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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