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전체가 천연정수기 제주…가축분뇨·난개발에 위기
64% 관정서 지하수위 하강, 불법 가축분뇨 배출 이어져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땅속으로 흘러 들어간 빗물이 오랜 기간 화산섬 제주의 천연 암반에 의해 깨끗하게 걸러져 만들어진 물이 바로 제주 지하수다.
물이 귀한 섬이었던 제주에서 지하수는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생명수이자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자산이다.
그러나 과도한 개발과 기후 위기, 무분별한 물 사용, 불법 가축분뇨 배출로 인해 제주 지하수는 위기에 처해 있다.
22일 물의 날을 맞아 제주 지하수를 돌아본다.
섬 전체가 천연 정수기…18년간 정수된 물 먹는다
"하늘이 울어야 땅이 산다."
제주와 같은 화산섬인 미국 하와이의 속담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에게 꼭 필요한 '물'이 하늘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제주 지하수는 대기 중의 수분이 눈이나 비와 같은 형태로 내려 땅속으로 스며들어 생성된 것이다.
제주특별자치도 통합물관리 기본계획(2023∼2032년)을 보면 지역·고도에 따라 편차가 있지만 제주도 내 4개 기상대를 기준으로 산정한 30년간(1990∼2020) 제주의 연 평균 강수량은 1천182.3∼2천27.5㎜로, 국내 최대 다우지다.
제주도는 화산섬의 특성상 대부분 화산암류와 화산회토로 이뤄져 있어 빗물이 지하로 스며들기 좋은 지질구조를 갖췄다.
제주는 평균 2∼3m 두께의 용암층과 퇴적층이 시루떡처럼 겹겹이 쌓인 지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마치 섬 자체가 거대한 천연 정수기와 같은 역할을 한다.
빗물은 용암층의 틈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면서 불순물이 깨끗하게 걸러진다.
그렇다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는 제주 지하수 양(지하수 함양량)은 얼마나 될까?
20년간(2001∼2020년) 연평균 제주 지하수 함양량은 17억5천780만t이다.
이는 제주 전역에 내린 강수량의 총량인 연평균 수문총량(40억4천640만t)의 43.5%이다. 지하수가 되지 못한 나머지는 증발해 대기중으로 사라지거나(증발산량 13억830만t), 지표면을 통해 유출(직접유출량 9억8천40만t)돼 바다로 흘러간다.
제주 지하수의 나이도 관심의 대상이다.
빗물이 땅속에 스며들어 걸러져 지하수가 되고, 지층의 경사를 따라 다시 해안지역으로 배출되거나 먹는 물이 되기까지 시간이 곧 지하수의 나이가 된다.
제주도에서 지난 2001년 미국 유타대학에 의뢰해 프레온 가스 분석방법을 이용해 분석한 결과 제주 지하수의 평균 연령은 16년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 제주도 수문지질 및 지하수자원 종합조사 최종보고서(2000년)에 따르면 제주개발공사에서 생산하는 제주삼다수 지하수의 나이는 18∼22년으로 조사됐다.
제주도 서부 지역에는 50년 이상 된 지하수도 발견됐으며, 영실계곡의 용천수는 1년으로 나오는 등 지역에 따라 지하수 연령이 큰 차이를 보인다.
용천수(湧泉水)는 지하수가 지층이 깨지거나 열린 틈을 통해 지표면으로 자연스럽게 솟아난 샘물을 일컫는다.
제주에는 현재 646곳의 용천수가 보존돼 있으며 하루 48만499t의 용출량을 자랑한다.
섬이라는 자연적 특성상 물이 매우 귀했던 제주는 해안 저지대에 주로 형성된 용천수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자리 잡았고, 물허벅·물구덕·물맞이 등 독특한 물 이용 문화가 싹텄다.
가축분뇨, 무분별한 개발 청정 지하수 위협
지난 2017년 7월 14일 제주시 한림읍 상명리의 한 채석장에서 고약한 냄새가 진동한다는 신고가 제주시에 접수됐다.
채석장 절개지 틈으로 양돈분뇨가 쏟아지며 악취가 난다는 것이었다.
조사를 위해 제주시와 제주자치경찰단 관계자들이 현장을 찾았고, 이들은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중장비를 동원해 채석장 바닥을 파기 시작하자 지하 20m 지점에서 발견된 용암동굴 바닥엔 돼지털과 찌꺼기 상태의 양돈분뇨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빗물이 지하로 흘러 들어가는 통로 역할을 하는 '숨골'인 용암동굴이 분뇨에 오염되자 지역 주민은 물론 제주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청정한 이미지로 주목받는 제주 지하수가 오염돼 자칫 명성에 흠집이 생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치경찰은 반경 1㎞ 이내 양돈장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사에 들어가 양돈업자 2명을 구속하고 1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이들 양돈업자가 3∼5년간 숨골을 비롯해 인근 초지에 버린 분뇨는 1만3천여t에 달했다.
게다가 도내 296개 양돈장에 대한 전수조사를 거친 결과 연간 9만t가량의 분뇨가 무분별하게 방류된 것으로 조사됐다.
도는 각 양돈장에서 신고한 사육두수보다 실제 사육두수가 더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돼지 1마리당 배출하는 분뇨량과 전자인계시스템 통계에 잡히지 않은 분뇨량을 계산해 연간 9만t가량의 분뇨가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채 방류된 것으로 추정했다.
결국 제주도는 양돈 분뇨 무단 배출 사태를 막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 같은 일은 해마다 반복됐다.
지난해 제주시에서만 가축 분뇨 배출시설과 재활용업체를 대상으로 고발, 사용중지, 개선명령 등 행정처분 건수는 112건에 달했다.
최근에는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의 한 가축분뇨 재활용업체 인근에서 가축 분뇨가 유출됐다.
지난 8일 제주시와 자치경찰이 현장을 조사한 결과 업체의 가축분뇨 저장시설에서 그대로 상당량의 오염물질이 토지로 흘러 내려간 것을 확인했다.
시는 인근 토양의 시료를 채취해 보건환경연구원 등에 검사를 의뢰해 결과에 따라 가축분뇨의 관리 및 이용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할 방침이다.
해당 업체는 지난 2023년 1∼3월 1천500t의 가축 분뇨를 무단으로 배출해 인근 하천을 오염시켜 처벌받은 전력이 있었다.
비단 가축 분뇨 불법 배출 외에도 지하수를 남용하는 문제도 심각하다.
제주특별자치도 통합물관리 기본계획(2023∼2032년)에 따르면 도내 125개 지하수위 관측정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전체의 64%에 달하는 80개 관정에서 지하수위가 하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나머지 34개 관정(27.2%)에서는 상승 경향, 11개 관정(9.6%)은 변화 추세가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제주는 화장실 물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물 대부분을 지하수에 의존한다.
호텔과 골프장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도 지하수를 상당량 사용하고 있고 농업용수는 전체의 94.4%를 지하수에 의존한다.
특히 작물 파종기, 생육기 때 취수허가량을 초과해 지하수를 사용하는 관행이 이어져 지하수 낭비의 원인으로 지적받기도 했다.
이로 인해 지난 2022년 농어업용 지하수 요금체계를 기존 정액제에서 사용량에 따라 요금을 부과하는 방식으로 지하수 관리 조례를 개정했다.
하지만 이과정에서도 농민단체의 강한 반발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지하수 지속이용가능량 대비 취수 허가량이 차지하는 비율이 한계에 달하는 상황에서 제주인의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생명수 지하수 사용 요구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다.
1972년 생활·농업용으로 지하수 관정 개발 사업이 추진된 이후 호텔과 여관, 목욕탕, 농업용 등 개인용도로 무분별하게 관정 개발이 이뤄지면서 1979년 124개, 1993년 3천169개, 2021년 말 4천566개로 늘었다.
현재 하루 지하수 취수 허가량은 162만9천t으로, 농업용이 88만3천t으로 전체의 54%, 생활용이 71만9천t으로 전체의 44%를 차지한다.
이외에 공업용이 하루 2만2천t, 먹는샘물 제조용은 하루 4천700t(제주도개발공사 삼다수 4천600t, 한국공항 제주퓨어워터 100t)이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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