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끄는 게 답답하겠지만, 곧 알게 될 겁니다

권성권 2025. 3. 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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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정호승의〈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를 읽고서

[권성권 기자]

▲ 정호승의〈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책겉그림
ⓒ 비채
엄마가 홀로 사는 시골집에 다녀가라 해서 어제 다녀왔어요. 3월 중순에 때아닌 눈보라가 불어치던 날이었죠. 몇 개월 동안 누나 집에서 얹혀살던 엄마는, 자기 집에 오니 이제 눈치 볼 일이 없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좋았어요.

그런 엄마가 나를 부른 건 명확했죠. 항아리에 담아 놓은 감식초 물을 걸러 주고 집 뒷담에 자란 풀들을 없애는 제초제를 쳐 달라는 거였어요. 그 일을 끝마쳤을 땐 기름값 하라며 오만 원까지 주셨고요.

살다 보면 답은 나와 있는데 시간을 질질 끄는 경우가 있죠.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도 머뭇거리면 누구라도 답답해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기약 없는 그 일을 마무리 지었을 땐 모두가 해방감을 맛보게 되죠.

그 일이 잘 됐는지 안 됐는지는 나중에 판단할 일이구요. 엄마와 나도 꼭 그런 기분이었겠죠? 물론 그 일만 해결토록 날 부른 게 아니었죠. 막내아들에게 용돈을 주고 싶어서 부른 거였어요. 91세의 엄마에겐 쉰다섯 아들인 제가 아직도 못 미더운 병아리처럼 보일 테니깐요.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 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정호승의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에 나오는 '아버지의 나이'란 시에요. 은행원으로 일하던 아버지가 나이 마흔에 그 일을 그만두고 자영업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했을 때, 아버지를 바라보는 아들의 눈빛은 어떨까요?

군 복무 시절 신춘문예 모집공고를 편지로 부쳐주던 아버지가 전역하는 아들을 위해 청량리역까지 마중 나와 신춘문예에 당선된 전보를 내밀었을 때는요? 자신이 마흔하나가 되어 시만 쓰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꿈을 이루고자 8년간 근무한 조선일보사 출판국을 떠나려 할 때, 부장이 "시가 밥 먹여주냐"며 붙잡으려 했지만 끝내 허허벌판에 나섰을 땐. 그때 아들은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렇듯 이 책은 천성이 말없이 살아온 아버지의 인생과 타이탄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도시 한복판을 달려야 했던 아들의 고된 인생은 물론이고, 가톨릭의 십자고상을 비롯해 금붕어와 비둘기, 부모님과 수의 등 일상적인 소재에서부터 세월호의 아픔까지 담고 있죠.

세련된 문체보다는 담백함이 묻어나는 시와 산문으로 구성돼 있어요. 정호승 시인이 직접 쓴 60여 편의 시와 그 시들이 태어난 자리를 직접 들려주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2021년 10월 목포 문학박람회 때였어요. 그날 안치환과 정호승이 유달산 아래의 북교동교회 뒤편 어느 집 뜰에서 '시를 노래하다'는 콘서트에 나왔었죠. 바로 앞에서 두 분을 본 건 처음이었죠. 정호승은 깔끔한 정장으로 시를 읊었고 안치환은 기타를 뒤로 제치며 자유롭게 노래했습니다.

그때 당시엔 시와 노래에 취해 마냥 좋아했는데 한참 지나서 생각한 게 있었죠. 둘이 열여섯 살이나 차이가 나고 안치환은 진보적인 성향인데 왜 시인 정호승과 함께 하는 걸까 하고요.

지금은 혼자 그렇게 정리하고 있죠. 고통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라 서로가 통할 수 있고, 예술은 정치적 이념을 초월해 고통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연결하는 힘이 크니까 함께 협업하는 거라고요.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막15:34)

성경 속 다윗도 10대 중반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10년간 사울의 칼날을 피해 도망자로 살아야 했죠. 때론 유대 광야에서 이슬을 머금고 자야만 했고 아둘람 동굴로 몸을 숨겨야만 했고 이방 땅 블레셋에 들어가 목숨을 구걸해야만 했었죠.

그때마다 '어찌하여'라는 탄식의 질문을 던졌겠죠?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죽어갈 때 '어찌하여'라는 탄식의 질문을 던진 것이었죠. 하지만 그 질문 너머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대답은 너무나도 분명했죠.

우리말 '어찌하여'는 아람어 관용구로서 헬라어로는 '레마'(λεμά)에요. 예수님께서 부르짖은 십자가 탄식은 구약의 시편 22편에도 나와 있죠. '어찌하여'라는 구약의 히브리어 '레모드'(לָמָה)는 '∼을 위하여(for)'라는 전치사 '라'(ל)와 '무엇(what)'을 뜻하는 '마'(מָה)의 합성어죠.

물론 히브리어 '마두아'(מַדּוּעַ,출1:18)도 '어찌하여'라는 단어인데 그것은 대부분 과거 일의 원인을 묻고자 할 때 사용했죠. 그에 비해 '레모드'는 미래의 목적을 알고자 할 때 질문하는 성격이 강한 단어고요(출5:22,출32:11).

문제에 명확한 답이 있는데도 시간을 끌면, 누구라도 답답하죠. 왜 그런지 다들 묻지만 나중엔 그 답이 선명하게 드러날 때도 있습니다. 홀로 사는 시골집, 엄마가 아들에게 다녀가라는 이유도 분명한 것처럼요. 10년간 다윗이 고통당한 이유도 명확한 것처럼요.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도 인류의 대속이라는 분명한 답이 있는 것처럼 말예요.

대통령의 탄핵심판 선고가 이렇게 시간 끌 일인가 묻지만, 시간이 지나 명확한 판결이 떨어지면 다들 납득하겠죠. 그때는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s://brunch.co.kr/@littlechrist12/31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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