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처럼 사격해서 죽일 줄 몰랐다”…최후항쟁 시민군 김인환 [영상채록5·18]
1980년 5·18 당시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산화한 당시 전남대 3학년 서호빈. 서호빈의 대학 동창이자 고향 친구인 김인환도 5월 27일 새벽 도청에 함께 있었습니다.
전남도청에 남을 때만 해도 그렇게 진압해버릴 줄은 몰랐죠. 항복하라고 할 줄 알았죠. 그래도 '최후까지 항거했다'라는 것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남았죠. 이렇게 전쟁터처럼 사격해서 우리를 죽여버리고, 이럴 줄은 상상은 못 했었죠.
김인환은 계엄군의 진입이 예고된 그날 새벽, 도청 뒤편 경비를 서면서 친구와 일상적인 얘기만 나눴다고 합니다. 그게 마지막이 될 수 있다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게 도청 최후항쟁에서 살아남은 시민군도 저마다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채 40년 넘는 세월을 견뎌내고 있습니다.
5·18 당시 친구 서호빈과 함께 시민군으로 참여했고, 무기 회수 활동을 한 뒤 도청에 남아 마지막을 지켰던 김인환 씨를 KBS광주「영상채록 5·18 」취재진이 만났습니다.
■시위에 큰 관심 없던 대학생
1980년 대학 3학년이던 김인환은 평소 민주화 시위에는 별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카이스트에 가고 싶었던 꿈 많은 여수 청년은 고향에서 제2 여천공단 설계에 참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속에 서호빈 등 고향 친구들과 함께 전남대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3학년이던 1980년에는 고향 고등학교 동문회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5월 18일 상황을 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어요. 동문 1·2학년 후배들이 광주 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여수 집에 내려가라'고 말하려고, 공영터미널로 19일 오전에 나갔죠. 그런데 터미널이 화재가 나고 매표도 안 됐어요. 거기서도 시위가 엄청 있었어요. 그래서 동문들 못 내려보내고 '그냥 집에 가만히 있으라'고 했었죠.
■계엄군 만행에 시위 동참
당시 김인환 씨가 살던 곳은 광주시 양림동으로, 전남도청에서 광주천 건너 지척입니다. 위험하다며 후배들을 만류했지만, 집이 도청과 가까웠던 그는 매일 시위를 가까이서 목격했습니다. 계엄군의 잔인한 만행을 지켜본 김 씨는 자연스레 시위에 참여하게 됩니다.
시민들을 두들겨 패서 이렇게 죽사발을 만드는 걸 보고는 '이건 아니다' 싶었죠. 집에 숨거나 도망가면 놔두고 그래야 하잖아요. 그런데 끝까지 그냥 가서 두드려 패서 질질 끌고 나오고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뭐라고 말만 해도 그냥 곤봉으로 쳐 때리고 막 이러니까. 이것은 시위 진압이 아니었죠, 솔직히. 솔직히 그런 걸 상상할 수도 없었고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 벌어졌으니 모든 사람이 그걸 보고 분개했던 것이 5·18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교 동창 서호빈과 무기 회수 활동
김인환은 시민수습위원회가 주도한 무기 회수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당시 시민수습위원회가 주도해 총기를 회수하면서 당국과 협상에 나섰는데, 이 무기 회수 활동에 참여한 겁니다. 5월 25일과 26일 이틀 동안 친구 서호빈과 함께였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내려와서 협상도 한다고 하고, 시민수습위원회 쪽에서 '너무 무기가 많이 나와 있어서 아무한테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회수해야 한다'고 했어요. 그것은 찬성해서 무기 회수하고 다녔죠, 친구하고. 1톤 트럭 뒤에 4명 점도 짐칸에 타서 시민들이 주는 무기 회수하고, 차에서는 계속 무기 반납하시라고 방송했어요. 원래 여수 사람이어서 광주 지리를 잘 모르니 운전수가 가는 대로 여러 군데로 화순 방면도 갔었어요. 친구 호빈이가 우리 집으로 와서 같이 26일에도 무기회수를 했어요. |
■"미안해서"…마지막 도청에 남다
시민군은 상당수 무기를 회수하며 당국과 협상했지만 결렬됐습니다. 이제는 계엄군의 강경 진압만이 남았고 최후 항쟁 지도부가 꾸려졌습니다. 김인환은 친구 서호빈과 함께 전남도청에 남기로 했습니다. "미안하잖아요" 무기 회수 활동에 참여했던 그가 계엄군의 마지막 진압이 예고된 그날 밤 전남도청에 남은 이유는 '미안해서'였습니다.
26일 오후 6시쯤 차로 무기 회수해서 들어왔는데 이제 계엄군이 들어올거라고 해요. 저는 그게 미안하잖아요. 시민수습위원회에서 결정했던 것이지만 그래도 무기를 회수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있고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서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친구랑 둘이 남게 됐어요.
계엄군 진압이 예고된 5월 26일 밤, 김인환·서호빈 둘은 도청 뒤편 경비를 맡았습니다. 도청 뒷담에 마을로 나가는 조그만 쪽문 왼쪽과 오른쪽에 나란히 서서 지킨 겁니다. 구식 소총에 탄창까지 받았지만 몇시간 뒤면 전쟁터처럼 변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공수부대에 점령당한 도청
계엄군이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 밀고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경비를 서던 김인환은 공포탄을 쐈지만 당연히 소용없었습니다. 무차별 사격이 이어졌고, 헬기에서 공수부대가 내려와 잔인하게 진압을 이어갔습니다.
조선대 쪽에서 헬기가 날아와서 공중에 멈추면서, 줄 타고 군인이 내려오면서 옆구리에 총을 끼고 사격을 한 것 같아요. 우리들 쪽에서 바로 보였어요. 건물 옆에 내가 여기 서 있었고 쪽문 옆에 호빈이가 서 있었는데, 그때 호빈이가 총에 맞은 것 같아요. 나한테 기어서 왔었어요.
그 시간이 1분도 안 됐어요. 긴 것 같으면서도 멍해지잖아요. 저는 군인이 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쳐서 그냥 기절해버렸어요. 나중에 체포된 뒤 속옷만 남기고 옷 벗기고 데려가니 그때 좀 정신이 들었죠.
■친구의 죽음을 믿고 싶지 않았지만...
도청에서 체포된 김인환은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가 100일 넘게 구타와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나마 전남대생이란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고 '재수생'이라고 분류됐기 때문에 그 정도였습니다. 당시 전남대 3학년으로 도청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 체포됐다면 계엄군이 어떻게 대했을지는 짐작이 갑니다.
상무대 영창에 있으면서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였어요. 그걸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친구(서호빈)가 죽지 않았을 것이다'는 그런 기대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호빈이가 그렇게 죽었는지를 거의 3년 가까이 몰랐어요.
어머니가 두려워서 말을 못 하셨어요. 제가 상무대 영창 나와서도 정신 줄을 놓고 살았기 때문에. 집에 내려가 있으면서도 항상 뒤뜰에 가서 그냥 멍하니 혼자 앉아 있었어요.
■30여 년 만에...
원래 친구하고 카이스트를 가자고 했었어요. 그런데 전남대 공대가 특성화되면 여천공단 제2 설계를 우리들한테 맡기겠다고 했었어요. 고향에서 여천공단 설계에 참여하면 괜찮겠다 싶어서 호빈이하고 다른 친구하고 셋이서 전남대를 가게 됐죠. 제가 친구한테 전남대 가자고 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결과론적으로는. 뭐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어요. |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친구 서호빈. 어머니끼리도 동네에서 잘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그는 이후 수십 년 동안 광주에 올 생각을 못 했습니다. 광주를 다시 찾은 건 30년이 지나섭니다. 그제서야 서호빈의 묘를 찾았고, 호빈이의 어머니를 만난 건 38년이 지난 2018년입니다.
80년 5월 그날의 기억은 김인환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진상규명' '오월정신 계승'
희생자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본인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군인은 지금 안 나타나고 있으니까 그런 것을 좀 증언해줬으면 하는 마음일 뿐이죠. 그런데 그런 말을 안 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려고 하니까 안타깝습니다.
군인들이 만 명이 왔고 직접 그렇게 시위를 진압하고 곤봉을 휘두르고 총을 쐈던 사람들, 본인들이 좀 진상 규명을 해야죠. 이건 역사에 남는 겁니다. 죄를 묻고 따질 일이 아니고.
김인환은 현재 사단법인 5·18민주화운동서울기념사업회 상임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80년 5월의 아픔을 딛고 5·18 진상규명과 오월정신 계승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위했던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었고, 말 그대로 시위였잖아요. '민주주의를 찬탈하는 것은 안된다'라고 하는.
5·18 이후에 전국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5·18을 알리고자, 민주화를 이루고자 투쟁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열사도 많아요. 5·18은 유공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80년에도 5·18은 광주시민 전체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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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용 기자 (hara1848@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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