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궁녀 몸 던졌다는 부여 부소산..백제의 핵심 물류기지였다

노형석 2021. 2. 16.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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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형석의 시사문화재][노형석의 시사문화재]
부소산성서 발굴된 명문 토기 미판독 마지막 글자
공납용 특산물 담는 토기 뜻하는 '장'으로 드러나
을사년 명문 토기의 마지막 글자를 확대한 모습.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등 일부 연구자들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를 내놓았다.

6~7세기 백제의 마지막 도읍(사비성)이었던 충남 부여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적지는 부소산 낙화암이다. 660년 백제가 나당(신라+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할 때, 의자왕을 모시던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삼천궁녀 전설은 조선시대 문인들의 시에 처음 등장한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이 낙화암 옆 백마강에서 뱃놀이를 하거나 산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며 망국의 비극을 떠올린다.

지난해 부여 부소산성에서 출토된 ‘을사년’ 명문 토기.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 ’(을사년삼월십오일모시산국작)이란 13개 글자와 마지막 미판독글자로 이뤄졌다. ‘을사년 3월 15일 모시산 사람 국(菊)이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마지막 글자를 일부 연구자들이 분석한 결과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가 나와 주목된다. 명문으로 미뤄 제작연대는 645년, 제작지는 모시산으로 추정되는 예산 또는 덕산. 제작자는 국이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백제 중앙 조정에 세금 용도로 바치는 특산물 용기로 보고 있다.

새해 들어 부소산과 낙화암이 문화재계의 뜨거운 이슈로 등장했다. 최근 부소산성에서 백제의 세금 납부 체제를 알려주는 획기적인 명문 토기가 출토되면서다. 이 명문 토기를 근거로 부소산 일대가 당대의 최고 물류 거점 공간이자 관청 자리였으며 궁궐터였다는 해석이 나오며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해 7~8월 성터 안에 재난방재관로 공사를 하다가 7세기께 성벽, 건물지, 집수시설 등의 유적이 드러나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긴급 발굴 조사를 벌인 것이 재조명의 실마리가 됐다.

을사년 명문 토기의 실측 그림에서 마지막 글자 부분이다. 일부 연구자들이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자라는 판독결과를 내놓아 주목된다.

조사 중 14자의 긴 한자 명문이 적힌 토기 쪽이 나왔다. ‘乙巳年三月十五日牟尸山菊作’(을사년삼월십오일모시산국작)이란 13자와 마지막 미판독 글자로 이뤄진 문장으로 ‘을사년 3월15일 모시산 사람 국(菊)이 만들었다’로 해석된다. 최근 미판독이던 마지막 글자를 일부 연구자들이 분석한 결과, 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이라는 판독결과가 나왔다. 제작연대는 645년, 제작지는 모시산으로 추정되는 예산 또는 덕산. 제작자는 국이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는데, 특정 물품을 만들어 바치는 모시산이란 지역명과 장인의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이상한 것은 판독되지 않은 마지막 글자였다. 왼쪽 옆에 기와 ‘와’(瓦)가 부수로 붙은 듯한 이 글자는 모양은 명확하지만, 자전에도 나오지 않고 과거 문헌이나 목간 등에서 확인되지 않는 수수께끼의 글자였다.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명문 토기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미판독 글자(붉은 선 안). 최근 부소산성에서 나온 명문 토기의 마지막 추정 글자 ‘장(瓦+長)’이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학계의 관심이 집중된 이 글자의 정체를 새해 초 이병호 공주교대 교수, 방국화 경북대 인문학술원 연구교수 등 일부 소장 연구자들이 찾아냈다. 7세기 일본의 중심부였던 간사이 나라와 한반도 교역의 길목 규슈의 목간과 토기 등에 새겨진 각종 글자 기록에서 똑같은 글자를 확인한 것이다. 글자의 정체는 큰 백제 토기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 자였다. 한자 한 자의 모양과 의미를 푼 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적지 않다. 두 학자 모두 10년 전부터 일본 유적과 능산리 유적 등에서 이번에 나온 토기와 비슷한 명문이 새겨진 완형 토기, 토기 조각, 목간 등을 확인하고 오랜 추적을 해오던 터였다. 그런 와중에 부소산에서 공통 글자를 발견했으니 흥분할 만 했다.

7세기 고대 일본의 유적의 목간과 토기 표면에서 종종 발견되는 ‘장(瓦+長)’자의 용례들. 현지에서 바치는 특산물을 담은 용기란 뜻으로 부소산성에서 발견된 백제 특산물 수납용 추정 명문 토기의 글자와 일치한다.

이번 발굴조사와 문자판독의 성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백제인들이 특산물 넣은 토기 항아리의 기종을 ‘장(瓦+長)’으로 호칭했다는 것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삼국시대 신라인이 토기 항아리를 ‘옹(甕)’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은 경주 월성 출토 목간 등에서 확인되지만, 백제인은 ‘옹’ 외에 ‘장’이란 호칭을 썼던 것이다. 더욱이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기, 이름도 모양도 같은 세납용 특산물 명문 토기가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 발굴된 사실이 교차 확인됐다. 이로써 이 항아리가 지방 특산물을 현물로 납부하는 공납제도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특산물을 담던 용기임이 분명해졌다. 특산물을 바치는 백제의 세금 수납제도가 고대 일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 또한 밝혀진 셈이다.

부소산성 안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북사(北舍)’명이 찍힌 토기들. 장인들이 생산한 토기에 대한 당시 관청 관리들의 수납 증빙 표시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소산은 백제 멸망기 백마강 낙화암 투신 장소로만 알려졌지만 이번 발굴을 통해 명문 토기 외에도 대형 건물 터와 창고 터 등이 확인돼 강을 타고 들어온 여러 물산이 집결하는 물류 창고 거점이었음이 드러났다. 인근 군창터와 궁녀사 등 여러 곳에서 대형 건물 유적이 추가로 확인돼 백제 사비시대 궁궐터가 아니겠느냐는 추정도 힘을 얻는 양상이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부여 부소산. 이 산의 왼쪽 산성터 안에서 을사년 명문 토기가 출토됐다. 위쪽으로 백마강, 아래로 부여읍 시가지가 보인다.

16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연구소와 한국목간학회 공동 주최로 열리는 ‘2020년 신출토 문자자료와 목간’ 학술회의는 학계의 논의와 연구성과를 집약해 알리는 자리다. 토기에 새겨진 글자가 백제 특유의 항아리를 뜻하는 ‘장(瓦+長)’이란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모시산(牟尸山)이 어느 지역인지를 놓고는 충남 예산(이병호)과 전남 영광(방국희)이란 학설이 엇갈린다. 당시 토기 항아리를 지칭한 ‘옹(甕)’과 ‘장(瓦+長)’이 실제 어떤 개념적 차이가 있었을지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논란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을사년’ 명문 토기가 출토된 부소산성 내 궁녀사 구간 집수시설 터. ‘북사’ 새겨진 토기와 중국산 자기, 칠기 등이 함께 나왔다.

백제 망국을 상징하는 곳으로만 여겨졌던 부소산은 고고학적 발굴조사를 통해 백제의 경제적 번영과 풍요로운 물류를 알려주는 공간으로 거듭나게 됐다. 작은 토기 파편의 미판독 글자 하나가 역사 공간 인식의 반전으로 이어진 셈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국목간학회 제공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명문 토기. 이 토기에 새겨진 수수께끼의 미판독 글자와 최근 부소산성에서 나온 명문 토기의 마지막 추정 글자 ‘장(瓦+長)’이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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