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창업주가 매일 안부 물었던 가야금관
[국보의 자취-30] 1963년 대구 현풍읍 유가면의 속칭 '8장군묘'를 불법으로 파헤친 도굴꾼 일당이 경찰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현풍도굴사건'으로 알려진 희대의 도굴사건이다. 대구의 유명 골동상 3명이 주도한 전문적·조직적 도굴이었다. 범인들은 고분 유물 400여 점을 2년 동안이나 들키지 않고 곶감 빼먹듯 도둑질해 갔다.
해방 이후 우리 땅에서 나온 최초로 금관이어서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도굴사건 주범들은 검거된 후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했다. 유물을 사들인 이 전 회장은 선의에 의한 취득으로 판결받아 소유를 인정받았다. 2006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재차 이 문제가 불거졌지만 문화재청이 법률전문가 의견을 첨부해 국가귀속이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전 회장은 세인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듯 금관을 일절 공개하지 않다가 1971년 4월 국립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이 특별 전시될 때 처음 세상에 선보였고 금관은 그해 말 국보로 정식 지정된다.
이 전 회장은 생전에 소장품 중 대가야금관을 가장 애지중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금관이 밤새 안녕했는지 안부부터 물었다. 종종 금관을 꺼내 부속 유물들을 붙여보며 망중한도 즐겼다. 금관이 도난당할까 걱정해 오랜 기간 진품이 아닌 복제품을 전시하도록 하기도 했다.
금관을 만들었다는 것은 신분제 사회가 고착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구려는 불꽃금관(전 평남 강서군 보림면 간성리 출토)의 존재가 알려졌고 백제는 비단모자에 금제 꽃장식을 꽂아서 신분을 표시했는데 무령왕릉에서 그 실물을 찾아냈다. 신라도 왕권국가로서 자리를 잡아가던 5세기 초 금관이 무더기로 등장한다.
대가야도 국력이 신장하고 왕권이 강화하면서 신라의 선례에 따라 금관을 제작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관의 크기나 문양이 신라와는 많이 다르다. 신라가 나뭇가지와 사슴뿔을 모티브로 한다면 가야금관은 풀잎이나 꽃잎 모양을 하고 있다. 연맹 형태로 유지됐던 가야의 체제로 인해 대가야 왕의 세력이 신라만큼 강하지 않아 신라금관 보다는 소형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신라금관보다 화려하지 않지만 소박하면서도 세련된 맛은 신라와는 또 다른 가야 문화만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는 평가다.
가야 금관은 이를 포함해 2점이다. 나머지 1점은 일본에 있다. 일제감정기 도굴 문화재 수집가로 악명 높았던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가 불법 반출해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한 창녕금관을 말한다. 풀잎이 양쪽으로 갈라져 솟은 형상의 세움장식이 특징이다.
44호분은 높이 7m, 지름 32m 규모다. 무덤이 산등성이 최상부에 있어 대형 고분과 비교해도 위축되지 않는 위용을 과시한다. 발굴 과정에서 주실을 둘러싸고 있는 순장곽 32기가 드러났다. 우리나라 최대의 다곽순장묘다. 순장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왕권이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44호분은 왕릉이 분명하며 금관의 출처도 44호분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대가야의 최전성기는 5세기 후반이며 따라서 무덤의 조성과 금관의 제작 시기는 5세기 후반으로 보는 게 마땅하다. 오래전 이미 도굴꾼의 손을 탄 흔적이 심해 부장품은 많지 않았다. 사람뼈·말뼈와 함께 토기 30여 점, 환두대도, 화살촉 정도가 수습됐다.
45호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다. 장식은 금관과 비슷하지만 재료가 금동이어서 피장자는 신분이 한 등급 아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각에서는 금관의 출처를 45호분으로 단정하기도 한다. 45호분 1호 석실 한가운데서 도굴꾼이 빠뜨리고 간 아주 작은 두 종류(반구형 장식, 대추씨 모양 장식)의 금제 장식이 발견됐다. 가야금관의 부속 금구와 크기나 모양 모두 똑같다. 금귀걸이 역시 대가야금관과 함께 나온 것으로 알려진 금귀걸이와 흡사하다. 그러나 도굴꾼이 44호분에서 금관을 지닌 채 45호분에 들어갔다가 흘렸을 수도 있다.
가야는 과연 어떤 나라인가. 사실 그동안 우리는 가야사를 홀대해왔다. 일제강점기 가야고고학은 일본서기의 가야 관련 기록(4~6세기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의 임나를 지배했다는 설)을 확인하려는 연구 일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광복 이후 가야사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일본서기 내용을 인정하는 것 같은 인식이 팽배해 가야사를 애써 외면해왔다.
가야는 서기 42년(삼국유사 가락국기 기록) 한반도 남쪽의 해안지역에서 시작돼 562년(진흥왕 23·삼국사기 기록) 북쪽의 내륙 지역에서 마감되기까지 무려 520년간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유지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흔히 금관가야(김해), 대가야(고령), 아라가야(함안), 소가야(고성), 성산가야(성주), 고령가야(진주) 등 6가야를 단정하지만 삼국지, 삼국사기, 일본서기 등 가야 관련 문헌기록과 지금까지 출토된 고고자료를 종합할 때 최소 12개 이상의 나라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야의 명칭도 가야는 물론 가라, 가량, 가락, 구야, 임나 등으로 다양하다. 가야국은 각각의 이름을 가졌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주변국들이 부르던 국명도 별도로 있었다.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후대에 붙여진 이름들까지 뒤섞여 혼란을 가중시킨다. 삼국지와 일본서기에 보이는 12개의 가야국 이름에는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와 같은 용어는 없다. '○○가야'도 가야 이후 신라와 고려의 행정구역명에 '가야'를 붙인 것에 불과하다. 가야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국명인 것이다.
가야 각국은 가락국(금관가야), 가라국(대가야), 아라국처럼 쓰는 것이 맞는다. 임나(任那)는 일본서기가 고대 일본의 가야 지배를 꾸미기 위해 사용했던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 임나는 존재했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이 김해, 고령, 함안가야국을 높여 '님(主)의 나라'로 부르던 데서 비롯됐다는 게 통설이다.
가야사는 서기 400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가야·왜 연합군에 공격당하던 신라의 구원을 위해 5만 보기를 파병해 가야를 정벌한 사건을 계기로 전·후기로 나눠진다. 전기 가야는 김해의 가락국이, 후기는 고령의 가라국, 즉 대가야가 중심 대국이었다. 함안의 아라국은 전·후기 모두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다.
이 중 대가야국은 시조 이진아시왕부터 도설지왕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삼국사기 지리지는 전한다. 대가야는 변한의 소국인 반로국(半路國)으로 시작해 가라국를 거쳐 5세기 중반 이후인 479년 가야로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남제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대가야라는 고대국가로 발전했다. 481년에는 백제, 신라와 동맹해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다.
대가야의 세력권은 고령을 중심으로 합천, 거창, 함양, 산청, 의령, 하동과 전남 동부의 광양, 순천지역, 전북 동부의 남원, 진안, 장수 지역까지 포괄했다. 제철 기술이 번성했으며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하는 등 높은 문화 수준도 보유했다. 대가야는 554년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고 562년(진흥왕 23) 결국 신라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금관을 만들 만큼 번성했던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과 함께 우리 고대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배한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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