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 상실증후군' 한국..끓는 물 속 개구리 신세

조시영,고재만,전정홍,김규식,정의현,이승윤,나현준,부장원 2016. 10. 19.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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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과거의 성공방식 안주..구조개혁은 외면기업, 10대 주력산업 수십년 고수..新산업 고전가계, 가진 건 집뿐..대출이자 갚느라 살림 팍팍

◆ B급 국가 바이러스 ⑫ ◆

"미국은 삶은 개구리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가." 노벨상을 받은 폴 크루그먼 미국 뉴욕시립대 교수가 2009년 7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 '개구리를 삶고 있다(Boiling the Frog)'의 첫 문장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미국 정부와 연방준비제도(Fed)의 천문학적인 돈 풀기로 넘겼지만 앞으로 더 큰 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경고였다. 펄펄 끓는 물속에 들어간 개구리는 곧바로 뛰쳐나와 목숨을 건지지만,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는 위기인지 모르다 결국 죽는 것처럼 말이다. 이 경고는 7년 뒤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정부, 기업, 가계가 마치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서 대책 없이 머무는 개구리처럼 닥쳐오는 위기를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을 B급 국가로 끌어내리는 또 다른 바이러스, '비전상실증후군(Boiled Frog Syndrome)'의 실상이다.

정부, 성장률 집착해 나랏돈만 풀었다

외환위기가 닥친 직후인 1998년에 들어선 김대중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경제 위기 극복에 동원했다. 특히 경기 방어를 위해 당시 국내총생산(GDP) 4.7%에 육박하는 약 25조원의 적자재정을 편성했다. 다음해도 대규모 돈 풀기는 이어졌고, 이후 한국 경제는 완연한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졌을 때도 정부 대응은 비슷했다. '대규모 나랏돈 풀기 =성장률 끌어올리기' 공식을 그대로 답습했다. 2009년 이명박정부는 GDP의 3.8%에 달하는 43조2000억원 적자재정을 편성했다. 하지만 정부 지출 효과는 외환위기 때와는 달랐다. 비록 2010년 6.5% 성장으로 반짝 반등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듬해인 2011년에는 3.7%로 주저앉았다. 2014년(3.3% 성장)을 제외하면 2012년 이후 한 번도 '마의 3%' 벽을 넘지 못했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후 4년 동안 세 번이나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편성할 만큼 정부는 돈 풀기에 집중했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에도 추경을 포함해 두 번의 돈 풀기(재정보강) 대책을 내놨다. '한번 경기가 고꾸라지면 회복하기 힘들다'는 논리가 작용했다. 과거의 성공방식을 그대로 따른 셈이다. 반면 고통이 따르는 구조개혁은 지지부진했다. 크루그먼 교수가 칼럼에서 "정부와 의회 모두 급격한 경기 하락은 끝났다며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은 채 어떤 개혁도 내놓지 않고 있다"고 비판한 게 한국에서 고스란히 재현된 셈이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 지출을 늘리면 민간투자 재원이 줄어드는 '구축효과'가 발생하기 마련"이라며 "노동시장 개혁과 관치 경제 청산을 통해 상시적으로 구조개혁이 일어나도록 해야 활로가 보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기업, 혁신 없는 기술개발에만 매달려

기업들도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였기는 마찬가지다. 1970~1980년대 중화학공업 정책으로 쾌속성장을 해왔던 한국 기업들은 창의와 혁신 대신 '규모의 경제'와 기존 기술의 고도화 개발에만 몰두했다. 정부도 이 같은 산업정책을 수십 년째 밀어붙였다.

그 결과는 10대 주력산업에 대한 과도한 집중도였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전체 수출 가운데 10대 주력산업 비중은 1980년 55.9%에서 2014년 86.3%로 높아져만 갔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급부상했을 때만 해도 한국 기업들은 '중국 특수'로 덩달아 신났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국이 중간재 자체 생산을 늘리고 기술개발에 매진하면서 이 같은 전략은 실패로 판명났다. 작년부터 수출은 급감세를 이어가고 있다.

한국 1위 삼성마저 과거 성공 신화에 기대 '갤럭시노트7 단종'이란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성은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월화수목금금금으로 이룬 신화'라 할 만큼 발 빠른 기술개발로 현재의 위치를 차지했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통했던 조직문화는 스마트폰으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혁신'을 강조한 애플과 달리 기술개발이 더 주력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정부가 창의와 혁신이 주입된 신산업을 적극 육성한다지만 과거 제조업에 인력과 자본이 집중된 기업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쉽지 않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가계, 아파트만 바라보다 빚만 늘었다

가계 역시 미래가 암담한 상황이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가계의 성공비결은 '내 집 마련'이었다. 고도성장기 '내 집 마련'은 중산층 진입 티켓으로 여겨졌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 60대 이상 가구의 전체 자산 중 부동산 비율은 약 74%로, 절반 이하인 일본 등에 비하면 월등히 높다.

[특별취재팀=조시영·고재만·전정홍·김규식·정의현·이승윤·나현준·부장원 기자]

부동산이 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보니 정부도 경기 살리기 대책으로 부동산 규제 완화를 빈번하게 이용했다. 이는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졌다. 최근 2년간 가계부채가 약 220조원 늘었는데 이 중 130조원이 주택담보대출인 배경이다.

노후 대비용으로 가진 건 집뿐이고, 번 돈은 담보대출 이자로 나가다 보니 가계 삶의 질은 점점 팍팍해지고 있다. 2012년 77.1%에 달했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 대비 소비금액)은 올해 2분기 70.9%까지 '뚝' 떨어졌다. 김지섭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2011년 이후 가계부채 증가율이 소득 증가율을 상회하면서 부채 총액이 급격히 늘었다"며 "총부채상환비율(DTI)을 낮추고 다중채무자 총량규제 등 미시정책을 써야 한다"고 진단했다.

가계부채를 잡는다 해도 문제는 또 남는다. 자산 상당 부분이 집에 묶인 가계가 소득이 확 늘지 않는 한 노후용 자금 때문에 소비를 늘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 <용어 설명>

▷ 비전상실증후군(Boiled Frog Syndrome) : 오랫동안 계속된 편안함에 안주해 현실 문제 해결을 외면하고 목표 없이 살아가는 현상. 개구리가 살기 좋은 온도부터 서서히 물을 끓이면 결국 삶아져 죽을 때까지 냄비 속에 있는 실험에서 유래돼 '삶은 개구리 증후군'으로 불림.

[특별취재팀 = 조시영 기자 / 고재만 기자 / 전정홍 기자 / 김규식 기자 / 정의현 기자 / 이승윤 기자 / 나현준 기자 / 부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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