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싹 속았수다' 미술감독이 가장 공들인 의외의 장면
[이선필, 이정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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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최지혜, 류성희 미술감독이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 이정민 |
금명(아이유)과 충섭(김선호)이 운명적으로 재회하던 111번 버스. 바람에 흔들거리는 빽빽한 유채꽃밭을 사이로 사랑을 키워갔던 애순(아이유)과 관식(박보검). 광례의 터전이었고 애순이 꿈을 키웠던 허름하지만 아늑했던 집 등.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유독 시각적으로 기억되는 장면들이 있다. 이를 구현한 류성희, 최지혜 미술 감독의 시각에선 어떤 장면이 마음에 남아 있었을까.
앞서 류성희 감독은 드라마 16부가 모두 공개된 후 SNS에 현장 사진 일부를 올리며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기 위해 서로 말을 걸고, 깊이 연결된 상태로 함께 일했다"며 "제주의 초가, 오래된 장판과 벽지, 낯선 필체의 노트와 포스터, 심지어 바람에 깎인 화산석 하나하나 만드는 과정에서 20, 30대 팀원들은 이 시대극이 SF처럼 느껴졌을지 모른다"는 소회를 적 바 있다.
지난 10일 서울 서대문구의 작업실에서 직접 만난 두 미술 감독에게 드라마를 보며 각인된 장면들을 물었다. 가장 공들였던 안동의 세트장 장면이었을까, 김녕해변이나 오라동 메밀꽃밭처럼 잠깐 등장했던 실제 제주의 풍경이 담긴 장면이었을까. 류성희, 최지혜 감독 모두 의외의 답을 했다.
금명의 하숙집, 그리고 깐느극장
"3막 가을편 중에 어린 애순이가 유괴될 뻔한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아마 제 개인적 경험 때문일 수도 있는데 엄마의 친구분이 다른 동네에서 헤매고 있는 절 발견해서 집에 데려온 적이 있거든. 핸드폰이 있던 것도 아니고, 저도 왜 그 동네까지 가서 놀았는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예전엔 애들이 많이 없어지고 했었다고 한다. 인신매매도 많았고. 드라마에서도 광례가 갑자기 나타나서 애순을 잡아채서 데려오잖나. 이게 무서운 동화같기도 하고. 제 개인에겐 그 순간이 히어로물이 따로 없었다. 임상춘 작가님 글도 좋았지만, 연출에 힘입어 더 잘 살아난 장면이었다." (류성희 감독)
"저도 비슷하다. 시청자분들이 한참 재밌게 보다가 좀 지루하네 느낀 지점들을 우린 되게 재밌다고 느낀 것 같더라. 그 광례가 애순을 구하는 장면도 굳이 필요했냐는 시청자 반응이 있었고. 근데 금명이와 영범이의 이야기가 주로 나오는 3막 가을 편이 전 되게 좋았다. 김원석 감독님 연출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랄까." (최지혜 감독)
금명이가 하숙했던 봉천동 달동네도 같은 맥락이었다. 시대상을 직접적으로 현실감 있게 구현하기보단 정서적 현실감을 위해 마냥 비루하게 묘사하지 않고,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일련의 장치들을 했다고 한다. 류성희 감독은 "뭐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도 허투루지나가는 법이 없었다"며 "비록 현실에선 그 셋방으로 가는 길이 고단했을지언정 기억 안에 존재하는 공간이라면 어떠한 추억, 아련함이 느껴졌으면 싶었다"고 말했다.
"소품 중에 가장 좋아했던 게 깐느 극장 간판이었다. <애마부인>이 딱 제가 그 나이 대였을 때 나온 영화였거든. 그래서 충섭이 제 입장에선 너무 재밌는 캐릭터였다. 우리끼린 과연 그 역할에 누가 캐스팅될까 가장 많이 얘기했는데 김선호 배우가 아주 잘 살렸다. 극장 간판을 그리지만 예술적인 사람이라 살색이 안 나오는 간판을 그리잖나. 그래서 말에 목숨을 거는 거지. 깃털 날리는 걸 표현하고, 아주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말을 표현하고(웃음). 20대 미술팀 스태프들이랑 그 간판 그릴 때가 전 되게 재밌었다." (류성희 감독)
"그게 처음엔 AI와 포토샵으로 틀을 잡고 실제로 간판 그리시는 분을 섭외해서 만든 거다. 콘셉트 잡을 땐 20대 친구들이랑 멋있는 말들 자료를 수집했고 그렇게 출력한 걸 실제 간판으로 의뢰해서 전문가가 그리신 거지. 우리가 시대극을 했을 때 알게 된 분들이 좀 있다. 아직까지 간판을 그리시는 분이 계시거든." (최지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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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 현장 사진. 세트장으로 구현된 제주 도동리 마을 풍광. 바다는 CG를 위해 블루 스크린이 깔려 있다. |
ⓒ 최지혜 감독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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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촬영 현장 사진. 세트장으로 구현된 제주 도동리 마을 풍광. 바다는 CG를 위해 블루 스크린이 깔려 있다. |
ⓒ 최지혜 감독 제공 |
이처럼 두 미술 감독은 작품이 품고 있는 세계관 안에서 기꺼이 보이지 않는 조력자 역할을 해왔다. 이는 류성희 감독의 철학이기도 하다.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 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 영화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이후 그는 당시 장르 영화의 불모지와도 같았던 한국에 돌아와 "10년만 해보자"는 마음으로 버텼다. "운이 좋았다"고 겸손의 표현을 했지만, 류성희 감독은 명실공히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미술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그가 평소 종종 인용했던 말이 있다. 그의 스승이기도 한 로버트 보일(히치콕 감독 다수의 영화를 담당한 미술감독)의 "미술 감독은 감독의 세계관에서 이렇게 숨 쉬고자 하고 사고하는 자"라는 말이다. 영화산업 및 한국 콘텐츠 산업의 급변 환경에서 여전히 유효한 선언일까. 잠시 고민하던 류 감독이 말했다.
"본질이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제가 시작했을 땐 일종의 책임감이 있었는데 너무 운이 좋게도 류승완, 박찬욱, 봉준호 감독님 등과 함께 한국영화 르네상스라고 하는 시기를 맞이했다. 한국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겠다는 게 그때 목표였다면 지금은 그게 많이 이뤄진 것도 있잖나. 지금은 사실 산업적으로 영화가 굉장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OTT로도 많은 작품이 나오고 있고. 그래서 이젠 꼭 영화여만 한다기보단 우리가 쌓아왔던 걸 기반으로 그 결실이 사라지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있다. 제 다음 세대가 날개를 펼칠 수 있을 때까지 기반을 닦는 게 제 의무라고 생각한다." (류성희 감독)
그렇다면 차세대로 지목받은 최지혜 감독은 어떤 생각일까. 최 감독은 홍익대학교에서 영상영화를 전공했다. 어렸을 땐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막연하게 미술을 전공해야 하나 싶었지만, 류성희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본 게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대학 졸업 후 류 감독을 찾아갔고 그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캐릭터보단 유독 소품이나 뒷배경을 관심 있게 보곤 했는데 영화 미술 감독이란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한 치 의심 없이 진로를 정했던 것 같다"고 최지혜 감독이 귀띔했다.
"저도 입문한 이후 미술 감독으로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었다. 단순히 작품을 위한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자본과 여러 사람이 모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맞는 미술을 잘하면 산업에 도움이 된다랄까. 그러니까 미술이 작품에 잘 녹아들어 사람들을 더 몰입하도록 하는 게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다. 류성희 감독님이 참여한 <올드보이> <살인의 추억> 등을 보며 꿈을 키웠기에 물론 막상 일하는 과정이 쉽진 않지만 류 감독님이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나 자세가 큰 지침이 된다." (최지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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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싹 속았수다' 최지혜-류성희 미술감독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의 최지혜, 류성희 미술감독이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의 한 사무실에서 오마이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
ⓒ 이정민 |
AI가 산업 안에 들어오며 우리도 위기감을 느끼지만 그만큼 기대감도 가지고 있다. 그걸 이용해서 할리우드 시스템을 능가해볼 수도 있지 않나 싶거든.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웃음).스릴러나 액션 같은 장르는 어느 정도 우리도 세계 수준에 왔다고 보이는데 SF, 판타지는 여전히 갈 길이 멀거든. AI 툴을 통해 우리에게 결여된 부분을 채우고 할리우드를 뛰어넘을 기회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류성희 감독)
"시대의 명작이 등장하는 순간들이 있잖나. 삼박자가 다 맞아야 하더라. 대본, 연출뿐 아니라 미술이나 촬영 같은 기술적 부분까지 말이다. 그런 면에서 미술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 같다. 어떤 감독님들은 미술 안 중요하니 이 정도만 해달라고 하신다던데,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어하는 분들은 잘하는 미술 감독을 찾는다.
요즘은 작품이 화제가 되더라도 너무 빨리 사라지는 시대기도 하다. 미술 하는 입장에선 작품이 좀 더 많이, 오래 얘기되고 사람들이 오래 즐겨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거든. 그걸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결국 소품 하날 하더라도 사람들이 얘기할 수 있게끔 만느는 등 산업이 지속될 수 있도록 제가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잘 하자는 생각이다. 그러다 보면 위기가 지나고 좋은 시기가 또 열리지 않을까 싶다." (최지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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