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포커스] 트럼프 관세 물러서게 한 ‘채권 자경단’

나지홍 기자 2025. 4. 17.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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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장적 정책 좌초시키는
채권시장은 ‘무정한 심판자’
재정 건전성 계속 나빠지면
한국도 언제든 타깃 될 수 있어

“예전엔 환생(還生)이 있다면 대통령이나 교황, 아니면 (메이저리그) 4할 타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채권시장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 모두를 겁줄 수 있으니까.”

1992년 미 대선에서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슬로건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이 된 전략가 제임스 카빌이 남긴 말이다. 1994년 미국발 채권시장 붕괴, 이른바 ‘채권 대학살(Bond Market Massacre)’을 목격한 뒤였다.

클린턴 집권 2년 차였던 1994년,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초 6.2%에서 연말 8.2%까지 치솟았다. 국채 금리가 뛴다는 건 채권 가격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복지 확대와 인프라 투자 등 재정 지출을 늘리겠다는 클린턴 정부의 계획에 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다. 재원 조달을 위해 국채 발행이 쏟아지면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불안이 채권 투매로 이어졌다. 여기에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까지 겹치며 ‘공포의 연쇄 반응’이 일어났다.

이 충격은 전 세계로 확산됐다. 한 해 동안 글로벌 채권시장에서만 1조5000억달러(약 2100조원) 규모의 가치가 줄어들었다. 멕시코, 태국, 한국 등으로 이어진 1990년대 신흥국 외환 위기의 도화선이기도 했다.

정부가 과도한 빚을 내면 시장은 그에 상응하는 ‘징벌적 금리’를 요구한다. 국채 금리는 가계와 기업 대출 금리에도 연동되기 때문에 가계 소비나 기업 투자를 위축시켜 경기 침체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다. 시장 패닉(공황)에 놀란 클린턴 행정부는 재정 확장을 접고 균형 재정으로 선회했다. 연준도 이후 금리 정책을 ‘깜짝 발표’ 대신 사전 예고 방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채권시장이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건 대표적 사례다.

이처럼 채권시장이 반(反)시장적 정책에 맞서 싸우는 것을 상징하는 개념이 ‘채권 자경단(Bond Vigilantes)’이다. 월가 이코노미스트(경제분석가) 에드 야데니가 만든 용어로, 정부와 중앙은행이 경제 원리나 상식에서 벗어날 경우 투자자들이 채권 투매로 금리를 끌어올려 징벌에 나선다는 뜻이다. 특정 세력이 아니라 채권시장 자체의 자정 작용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자경단 공격을 받고 물러난 정치 지도자도 여럿이다. 2022년 취임한 영국 리즈 트러스 총리가 재원 대책 없는 감세안을 밀어붙이자 시장은 즉각 반응했다. 영국 국채 금리는 폭등했고 파운드화는 폭락했다. 결국 그는 취임 45일 만에 사임했다. 2011년 재정 위기 당시 이탈리아도 국채 투매에 시달렸고,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물러났다. 최근 전 세계를 상대로 관세 전쟁을 선포하고 25%의 상호 관세를 부과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일주일 만에 전격 유예 방침으로 돌아선 배경에도 자경단이 있다.

그간 한국은 예외였다. 채권 투자자들이 주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 기관이었고, 재정 건전성이 선진국 가운데 최고 수준이기 때문이다. 자경단이 될 만한 세력도, 사냥감도 없던 셈이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내년 4월 한국 국채가 세계국채지수(WGBI)에 편입되면, 최대 90조원에 달하는 글로벌 자금이 국내로 유입된다. 당국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외국인 투자 자금은 언제든 자경단으로 변할 수 있는 예비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부터 시작된 국가 채무 급증세가 꺾이지 않을 경우 한국도 자경단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채권시장이라는 ‘무정한 심판자’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오직 계산기로 움직이며 손해가 되는 정책엔 가차 없이 채찍을 든다. 국내 금융시장이 자경단의 놀이터가 되지 않도록 시장 신뢰를 받는 재정·통화정책에 전력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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