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를 망치는 주자학적 명분론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4. 5. 1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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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0회>

17세기 조선에서 노론(老論)의 영수로서 붕당 정치로 최고 권력을 휘둘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초상화. /공공부문

한반도를 배회하는 주자학의 망령

하나의 유령이 한반도를 배회하고 있다.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유령이. 조선 왕조 500년 명실상부 국교(國敎)로 숭상되며 조선 지식층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주자학적 사유체계는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 곳곳에서 강력한 문화적 관성을 발휘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 대다수는 주자학과 무관하다며 반발하겠지만, 문화란 핏속에 잠복하는 바이러스 같아서 의식 깊숙이 잠재돼 있다가 조건만 갖춰지면 사회심리학적 병증을 드러낸다.

중세 유럽인들이 초월적 절대자의 감시 속에서 기독교적 선악 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듯, 중세 조선인들은 소중화(小中華)의 자의식 속에서 주자학적 이분법에 빠져 있었다. 주자학적 이분법이란 이 세상을 리(理)와 기(氣), 청(淸)과 탁(濁), 정(正)과 사(邪), 도심(道心)과 인심(人心), 군자(君子)와 소인(小人),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 등의 둔탁한 거대 관념으로 양분하는 사유 방식을 이른다.

주자학적 이기론(理氣論)은 표면상 우주적 섭리와 세상의 이치를 논구하고, 나아가 심성(心性)의 작용까지 설명하는 순수 철학(pure philosophy)처럼 보인다. 주자학 신봉자들은 우주적 진리를 밝히고 세상의 도리를 찾고, 인격적 완성을 도모한다는 구도(求道)·수행(修行)의 도학자(道學者)를 자처했지만, 역사의 현실을 탐구해보면 그러한 주자학적 대의(大義)는 공허한 수사에 머물렀음을 확인하게 된다. 주자학적 정치 담론은 아(我)와 적(敵)을 나누고, 군자와 소인을 가르는 파당적 근본주의로 흐르기 일쑤였다. 왜 그러한가?

주자학적 이분법, 성리(性理)의 파벌주의

주자학자들은 입버릇처럼 리와 기의 존재론적 통일(ontological unity)을 강조한다. 그들의 표현을 빌자면, “형이상(形而上)”의 리가 언제나 “형이하(形而下)”의 기에 내재해 있다. 기(氣)를 떠난 리(理)는 없고, 리 없는 기란 있을 수 없다. “리와 기는 서로 분리될 수도 없고(不相離), 서로 섞일 수도 없다(不相雜).”

화려한 언설과는 달리 실제 그들의 행적을 들춰보면, 주자학자들은 대개 리와 기를 수직적 상하 관계, 도덕적 우열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정(正)과 사(邪), 선(善)과 악(惡), 군자와 소인의 거친 이분법으로 인간세(人間世)를 단순하게 재단(裁斷)했다. 그들은 삼라만상의 섭리를 논할 때는 리와 기를 아울러서 존재론적 일원론을 펼치다가 피아(彼我)를 갈라서 반대편을 적대시할 때면 리와 기를 양분하는 가치론적 이분법의 함정에 빠져든다.

바로 그런 단순한 이분법적 사유 구조에서 “나는 군자(君子)이고 우리는 군자당(君子黨)”이며, “남은 소인(小人)이고 그들은 소인당(小人黨)”이라는 주자학적 붕당(朋黨) 의식이 생겨난다. 주자학적 붕당 의식은 도덕적 우열 관계로 나와 남을 갈라치는 정치적 파벌주의다. 정치적 차이를 인간의 심성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성리(性理)의 파벌주의’라 부를 만하다. 성리의 파벌주의는 타협과 절충을 용납하지 않는 극한의 정쟁을 불러온다.

주자학이 발흥한 중국 송(宋)나라의 정치판이 이미 그러했다. 그 시절 당파싸움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언어도 극단적 이분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분은 선인(善人)과 악인(惡人)의 구별, 나아가 성인(聖人)과 도척(盜跖)의 분별만큼이나 본질적인 인격적 이분법이었다. 인간 중에는 본질적으로 선한 존재가 따로 있고, 본성상 악한 존재가 따로 있다는 발상이었다.

가령 13세기 남송(南宋, 1127-1279)의 사대부 여중(呂中, 1247년 진사)은 북송(北宋) 말엽의 정치사를 단순명료하게 소인(小人)의 전성시대로 단정한다. 한 명의 역사가로서 그가 사용하는 극단적 포폄의 언어 속에 주자학적 선악 관념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가 선정한 각 사건의 표제를 살펴보자.

1. 소인이 군자를 공격하다(小人攻君子)

2. 소인이 나아가고 군자가 물러나다(小人進而君子退)

3. 소인이 국시를 어지럽히다(小人亂國是)

4. 소인이 되살린 법례를 폐기하다(小人廢復法例)

5. 소인이 잘못을 감추다(小人掩過)

6. 소인이 군자를 모함하다(小人陷君子)

7. 소인이 소인을 공격하다(小人攻小人)

8. 소인이 군자를 음해하고, 공의를 내세우는 척하다(小人害君子而自有公議在)

9. 소인이 태후를 무고(誣告)하다(小人誣太后)

(상세한 내용은 Jaeyoon Song, “History as Statecraft: Lü Zhong’s [fl. 1250s] Critique of State Activism,” The Journal of Song Yuan Studies 50 [2021]: 237-294 참조)

주자학의 신봉자로서 여중은 소위 도학적(道學的)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는 북송의 역사를 군자와 소인의 투쟁으로 단순화한 후 나라가 망한 책임을 온통 일부 세력에게 100% 들씌우는 극단적 이분법, 단순한 포폄의 역사 기술을 이어갔다.

조선 주자학의 이분법적 세계관

남송 시기 한 주자학자의 역사관을 살펴보는 까닭은 그러한 극단적 이분법, 단순한 포폄의 세계관이 그대로 조선조 사대부의 의식 세계로 전이(轉移)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점에서 주자학을 금과옥조로 삼았던 조선조의 사색(四色) 당쟁은 이념적 필연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군자-소인의 이분법에 근거한 주자학적 명분론은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위정자들에겐 언제나 달콤한 유혹이다. 잘못된 정책으로 민생을 파괴해도, 엉터리 법안으로 국가 재정을 파탄 내도, 극렬한 당쟁으로 헌정사를 중단시켜도 본래 자신들의 의도는 순수했고 도덕적으로 옳다고 우겨댈 수 있는 자기 정당화와 이념적 변명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주자학적 명분론이란 현실의 결과를 고려하지 않는 도덕적 정당화의 논리를 의미한다. 비근한 예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린 결과 자영업이 무너지면서 실직률이 오르고 소득 양극화가 심화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해도 “소득주도성장” 이론이 원래는 옳다고 주장하는 경제학자들, 원전 폐쇄가 화력발전을 늘려 오히려 온실가스를 증가시키는 역설을 보면서도 탈원전 정책이 무조건 정당하다고 우겨대는 환경론자들은 모두 주자학적 명분론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도덕적 판단의 근거가 현실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심성에 있다고 믿는 극단적 도덕주의(extreme moralism)의 사고방식이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637)의 수모를 겪은 후에도 수백 년간을 이미 망해 없어진 명(明, 1368-1644)나라 황제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겉으로는 고두(叩頭)의 예(禮)를 행하면서도 속으로는 만주족을 오랑캐라 낮춰보는 조선조 선비들의 처참한 ‘정신 승리’는 그들이 체화한 주자학적 명분론의 발현이었다. 구한말 유생들이 세계사의 흐름에 역행하여 문호를 걸어 잠근 채 “위정척사(衛正斥邪)”와 “파사현정(破邪顯正)”만 부르짖고 있었음도 우연이 아니다. 주자학적 이분법에 빠지면, 언제나 나는 옳고 남은 그르다는 도덕-근본주의적 자의식에 빠져든다. 설혹 나의 정책이 현실정치에서 참혹한 실패로 귀결된다고 해도 나의 이념은 도덕적으로 무조건 옳다는 기묘한 자기 정당화의 논리가 생겨난다.

제22대 총선에서 막대한 사법 리스크를 안고도 압도적 승리를 거둔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재명과 조국혁신당 대표 조국. /조선일보 DB

오늘날 한반도 남북한의 권력자들은 혹시 주자학적 이분법을 답습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류사 최악의 전체주의 노예 국가를 만든 북한의 김씨 왕조가 지금도 짐짓 당당하게 주체사상을 외치며 그 험악한 체제를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고 우기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런 김씨 왕조의 악마적 이념에 현혹당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떠받들며 “남조선 해방 투쟁”에 청춘을 바쳤던 주사파 운동권의 헛된 자긍심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현실의 결과에는 눈을 감고서 도덕적 정당성을 인간의 마음에서 찾는 중세적 몽매주의에 빠져 있었다.

최근 대한민국에선 고교생 딸을 국제학계에 등재된 최상급의 의학 논문 제1 저자로 만들어서 명문 사립대에 입학시킨 전직 국립대 로스쿨 교수가 2심에서 유죄를 확정받고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정당을 급조하여 23%의 지지를 받는 “막가파식 정치드라마”가 펼쳐졌다. 200억 원의 배임, 800만 달러의 제3자 뇌물, 외국환거래법 위반, 위증교사, 허위사실 공표에 의한 공직선거법 위반 등 9개 혐의를 받고 기소되어 일부 죄가 이미 소명된 자가 정의를 외치며 거대 야당의 총수로 우뚝 선 현실이다. 그럼에도 무조건 자기편은 군자당, 반대편은 소인당이라고 우기며 스스로 그렇다고 굳게 믿고 있다면 진정 주자학적 파당 정치의 재현이 아닌가?

192석을 확보하여 오만해질 대로 오만해진 범야권은 다시 대통령 탄핵의 드라마를 쓰기 위해 명분 쌓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주자학적 명분론은 권력욕을 가리는 외피에 불과하다. 이른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웃지 못할 블랙 코미디가 되어가고 있다. 1995년 이건희 회장이 4류라 혹평했던 한국 정치는 이미 5류 그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락한 정치꾼들이 주자학의 수사법을 너무나 능수능란하게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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