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사법부의 시간: 3권분립이냐? 중국식 권력 집중이냐?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9회>
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선거 결과는 기묘하게 민심을 왜곡했다. 더불어민주당은 총투표수의 50.5%를, 국민의힘은 45.1%를 득표했다. 두 당의 득표 차이는 5.4%에 불과하지만, 지역구의 의석수 차이는 161 대 90으로 1.8배 차이로 벌어졌다. 게임의 규칙대로 나온 결과이므로 합법성을 의심할 순 없다. 다만 이번 선거로 결정된 압도적 여소야대의 국회 구성이 민심을 공정하게 반영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의석 배분을 보면, 총투표자 중에서 지역구 민심 범야권의 53.23%(진보당, 새로운 미래, 개혁신당, 녹색정의당 등 포함)의 의지는 192석으로 부풀려지고, 범여권 민심 45.1(+a)%의 의지는 여당의 108석으로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반반으로 갈라진 민심, 압도적으로 기울어진 국회
승자 독식의 소선거구(Single-Member District)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지만, 중대선거구제(Multi-Member District) 역시 민의 왜곡과 인구 저밀도 지역 소외 등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제도의 수정과 보완만으로 민주주의가 절로 바로 설 리는 없다. 어떻게 제도를 고쳐 본들 정치꾼들의 협잡에 다수 유권자가 동조하면, 선거는 권력 집단의 당파싸움으로 전락하고, 민주주의는 농락당하고 만다.
범야권은 일단 게임의 법칙에 따라 국회의 2/3에 육박하는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차지했지만, 공익을 저버린 채 사당화의 길로 폭주한다면 의회 독재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 헌법 정신과 국민의 공익을 저버리는 의회 독재는 민주의 이름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민주적 망발(妄發)이다.
범야권은 승리에 들떠서 샴페인을 터뜨리기보단 반대편에서 그들의 구태와 막말과 범법과 내로남불을 규탄하고 질타했던 45.1%의 국민 앞에서 옷깃을 여미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범야권 정치인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한 듯 경박하게 섣불리 “대통령 탄핵” 운운하고 있다. 다시금 음모와 술수로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을 탄핵하려 한다면 민주주의를 이용해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반민주적 행태이다.
그럼에도 다수당은 벌써 비대해진 권력에 도취하여 의회 독재의 단꿈을 꾸는 듯하다. 헌법 절차와 국회의 관례에 따라 민주주의를 구현하려 노력해야 마땅하거늘, 권력은 진정 이성을 교란하고 상식을 마비시키는 향정신성 약품과도 같은가 보다. 지역구 득표율로는 5% 이하의 차이로 양분된 민심이 희한하게도 여야 의석수에선 192석 대 108석의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었다. 그 결과 한국 정치판에는 곧 의회 독재의 광풍이 몰아칠 듯하다. 의회 독재를 막는 방법은 무엇인가?
근대 정치이론가들은 의회 권력에 의한 다수 독재(tyranny of the majority)를 막기 위해서 엄격한 3권분립을 통한 견제와 균형을 입헌 민주주의의 생명으로 삼았다. “다수”를 선점하고, “국민”을 참칭(僭稱)하고, “민심”을 내세워 법치를 파괴하는 의회 독재와 대통령의 전횡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정치도 다르지 않다. 의회 독재를 막기 위해선 행정부의 견책, 사법부의 견제, 그리고 시민사회의 비판 이상의 해결책이 있을 수 없다. 안타깝게도 한국 정치판엔 입헌주의적 견제와 균형은 아랑곳없이 민심만 내세우면 무엇이든 가능하다고 여기는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이 떠도는 듯하다.
동아시아를 배회하는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는 이미 여러 차례 서양식 입헌주의를 배격하면서 중국 인민을 향하여 “권력분립”과 “사법 독립”을 막야야 한다고 역설했다. 중국공산당은 권력분립 대신에 행정부와 입법부가 통일되는 “의행(議行) 합일”의 단일체 정부를 지향해 왔다. 헌법학에서는 이를 ‘회의체 정부(assembly government)’로 분류한다. 중국의 사법부 역시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통제 아래서 이른바 “의법치국(依法治國)”의 임무를 완수하도록 요구받는다.
인류의 보편 상식에 비춰볼 때 그러한 중국공산당의 통치 이념은 레닌주의 국가 통제이자 스탈린식 일당독재에 지나지 않는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무너진 정부는 권력자의 전횡을 막을 방도가 없다. 헌법의 임기 조항을 바꿔서 중공 내부 규범을 어기면서까지 3기 연임에 성공한 시진핑 정권을 세계 각국에서 일인 지배(autocracy)라 비판했던 이유가 바로 그 점에 있었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그러했듯 시진핑 역시 민심(民心)을 내세워 일인 지배를 정당화한다는 점에 있다. 마오쩌둥은 표면상 공산주의 이념을 내걸고서 일인 지배를 완성했지만, 마오쩌둥의 권력은 단순히 스탈린 권력의 재판이 아니라 2천 년 중화 제국의 역사에 면면히 흐르는 유교적 포퓰리즘과 무관하지 않다.
유교적 포퓰리즘은 “민심이 곧 천심(民心即天心)”이란 명제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온 유가 정치학의 제1 명제다. 같은 맥락에서 <<상서(尙書)>><태서(泰誓)>에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보고, 하늘은 우리 백성을 통해서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는 명제가 등장한다. 이 구절은 문왕(文王)의 유지를 받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최후의 폭군 주(紂)를 칠 때 수백 명 제후들을 규합하기 위해 들고나온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논리였다. 이성계(李成桂)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창건할 때도 바로 이 논리를 들고나왔다. 유가 전통의 혁명 이론은 그렇게 “민심=천심”이라는 테제 속에 압축돼 있다.
요즘에도 한국의 정치인들은 “민심은 곧 천심”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지극히 당연한 소리 같지만, 현실은 그보다 복잡하다. 인간 사회에서 민심은 계층, 소득, 지역, 세대, 성별 등의 다양한 이유로 사분오열되기 쉽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민심은 언제나 정권의 입맛대로 획일화된 외양을 띨 뿐그 속의 들끓는 민심은 표출되지 못한다. 이와 달리 다원화된 현대의 민주 사회에서 민심 분열은 자연스럽다. 민심이 거의 반반으로 갈라진 상황이라면 천심은 과연 어느 쪽 민심과 일치하는가? 재22대 총선처럼 양당에 대한 민심이 50.5% 대 45.1%로 갈려서 팽팽히 맞서는 경우가 정치 현실에선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다수결주의에 따라 무조건 조금이라도 다수를 차지한 세력이 국가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바로 그 순간이 소수를 억누르는 다수 독재의 시작이다. 천심은 한쪽 민심만을 일방적으로 지지할 수 없다. 바로 그 점에 민심과 천심 사이의 풀리지 않는 긴장이 놓여 있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말은 여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정치적 수사일 뿐, 다수 독재의 정당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한국의 정치가들과 논객들이 섣불리 민심 운운할 때마다 유교 포퓰리즘의 망령을 느낀다면, 기우일까.
민심을 앞세운 유교 포퓰리즘은 전형적인 독재의 논리다. 역사상 모든 독재는 민심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1802년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아 종신 통령의 지위에 오른 나폴레옹은 1804년 국민투표를 발의하여 황제로 등극했다. 국민투표에서 그는 99.9%의 찬성을 끌어내어 직접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황제 독재를 강화하는 마술적인 정치력을 발휘했다. 나폴레옹에게 국민투표는 민심의 이름으로 황제의 권력을 절대화하는 행정 절차일 뿐이었다.
1932년 11월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은 의회(Reichstag) 의석의 33.1%만을 차지하면서 이전보다 세력이 다소 약해졌지만, 공산당은 16.9%의 의석을 점하면서 약진했다. 공산당의 권력 장악을 막기 위해서 독일의 보수세력은 나치당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1847-1934) 대통령은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 후 2년 안에 히틀러는 의회를 해산하고 독일 제3제국을 창건하여 나치당의 수장으로서 3권을 독점했다. 그 결과 독일은 전체주의 국가로 전락하여 세계대전의 광기로 치달았다.
사법부는 할 일을 해야
이번 선거에서 192석을 차지한 그들이 어떤 세력인가? 바로 지난 총선에서도 압승하여 행정부와 입법부를 독점하고 사법부까지 시녀로 둔 것도 모자라 지방 권력까지 독점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바로 그 세력이 아니던가? 그들은 3권을 독점하고도 실정을 거듭하고 악법을 남발하고 내로남불을 일삼다가 정권을 잃었다. 국가권력을 거의 다 독점하고도 정권을 빼앗긴 바로 그 세력이 2년 만에 의회 권력을 계속 장악할 수 있게 되었지만, 두 명의 야당 지도자와 다수의 야당 당선인 앞에는 법의 심판이 놓여 있다.
1972년 11월 미 대선에서 선거인단의 96.7%를 싹쓸이한 압도적 승리로 재선에 성공한 리차드 닉슨 대통령은 결국 1년 반 만에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한 사법부의 냉철한 판결 앞에 굴복하고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의 사법부가 행여나 의회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법치를 포기한다면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날로 사망을 고하고 만다. 그럼에도 총선 직후 한 유명한 법학자가 방송에 출연하여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은 야당 대표를 사법부가 처벌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의견을 태연스럽게 입에 올렸다. 이는 자유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핵심인 3권분립을 깡그리 무시하는 반법치적 발상이며, 헌법 파괴적 망언이다.
총선은 인민 재판이 아니며,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 집단은 재판에서 유무죄를 결정하는 배심원단이 아니다. 선거의 승리가 어떻게 범죄자의 죄과를 씻어줄 수 있는가?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선 총선 승리가 사법부에 커다란 여론의 압박으로 작용하여 재판 중인 야권 지도자들이 무죄로 풀려나리란 전망이 우세한 듯하다. 입헌 민주주의의 사법부는 여론재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지금껏 판사들은 여론 추이에 따라 춤을 추며 정치편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문제의 판결로 수많은 논란을 일으켜 왔기 때문이다.
지난 총선에서 대한민국의 민심은 사실상 50.5% 대 45.1%로 갈라졌다. 여론이 팽팽히 맞선 나머지 민심이 맞부딪혀 소용돌이를 일으킬 때, 사법부는 칼과 저울을 들고서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만 한다(헌법 제103조). 사법부가 분열된 한쪽 여론에 휩싸여 스스로 법치를 포기한다면, 자유민주주의의 기획은 물거품이 되고, 주권자인 국민은 다수 독재의 폭정에 내던져진 노예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국민은 더 이상 사법부의 비극을 원치 않으며, 무엇보다 천신만고 끝에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의 쇠락을 좌시할 수 없다.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유교 포퓰리즘을 극복해야만 근대정치의 이상이 실현된다. 다수 독재의 야만을 법의 지배로 순치하는 문명의 이념이 자유민주주의이자 입헌 민주주의이다. 재판관 스스로 법과 양심에 따라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만 하는 사법부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자유주의 민주공화국의 성패(成敗)를 결정하는 진실의 순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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