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스타에서 물리학자로… 달 탐사·드론·로켓 알린 ‘과학 에이스’
1926년 3월 16일 조선일보는 연희전문학교를 첫 우승으로 이끈 투수 최규남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훗날 한국의 과학과 교육을 이끌게 되는 최규남은 이처럼 야구 스타였다. 1898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규남은 윤치호의 아들과 가깝게 지내며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가 야구 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윤치호가 ‘산업학교(industrial school)’로 설립한 이 학교는 이공계 교육을 강조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본 방문으로 조선에 상대성이론 열풍이 일던 1922년, 촉망받던 야구 선수 최규남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물리학을 가르치던 연희전문 수물과에 입학한다.
1927년 4월 29일 조선일보에 최규남의 미국 유학 기사가 실린다. “왕년 야구 선수로 지난봄 연희전문을 마티고 그동안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든 최규남씨는 수학과 물리를 더욱 연구하기 위하야 (...) 체미 동안에도 학과 외에 운동을 계속하리라는데 앞으로 미주의 운동 경기를 본지에 통신하기로 되엇다.” 여전히 세간의 관심은 스포츠 스타가 미국에서 펼치는 활약과 미국 스포츠 소식을 전해줄 것이라는 기대였다. 하지만 조선일보의 바람과 달리 그는 물리학 연구에 몰두했고, 1932년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 남을지 말지 고민하던 그는 조선의 과학 발전을 위해 연희전문 교수로 귀국한다.
최규남이 귀국하던 무렵 현대 물리학은 상대성이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분야로 급속히 진행하고 있었다. 그 중심은 고전역학의 패러다임을 바꿔버린 양자역학이었다. 연희전문에서 양자역학 강의를 시작한 최규남은 대중에게도 이를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1936년 2월 8일부터 15일까지 최규남은 조선일보에 ‘신흥 물리학의 추향’이라는 6편에 걸친 긴 연재 기사로 양자역학을 설명한다. 서양에서조차 낯설던 양자역학을 조선에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시리즈의 첫 단락은 이렇게 물리학의 새 시대를 선언한다. “최근 이십 년간의 물리학 발전은 실노 녯것을 보내고 새것을 맛기에 무가지감이 잇다. (...) 일즉이 전 세계 과학에 일대 혁명적 센세이슌을 일으킨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어언 간에 고전물리학으로 귀결되엿고 현대 물리학계에 가장 새로운 이론은 (...) 양자역학 및 양자론 등이라고 하겟다.”
양자역학에 이어 물리학 최신 동향도 알렸다. 1936년 3월에는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헤스(Victor Franz Hess)가 연구하던 ‘우주선(cosmic ray)’을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최규남이 당대에 가장 주목할 과학자로 소개한 헤스는 놀랍게도 그해 말 노벨상을 받는다. 5월에는 로켓 과학과 달 탐사 전망을 소개하고, 태양의 흑점과 코로나에 관한 연구를 알린다. 또한 1935년 처음 발견한 델린저 현상을 소개하며 전자기파와 태양 활동을 연결했다. 그는 거침이 없었다. 서구에서 막 시작된 TV 방송과 성층권 비행을 위한 터보 차저, 심지어 나중에 레이더와 전자레인지의 원리가 되는 마그네트론까지 이야기한다. 또한 드론을 이야기하며 무선 조종을 위한 전자기파 기술과 여기서 파생된 레이저도 소개한다.
1930년대 후반이 되자, 양자역학과 현대 물리학은 더욱 발전했다. 중성자를 발견한 채드윅이 1935년 노벨상을, 양전자를 발견한 앤더슨이 1936년 노벨상을 받으며 입자물리학의 전성시대를 맞고 있었다. 최규남은 이 최신 연구들을 쉴 새 없이 신문에 기고하며 조선에 알렸다. 그는 1938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최근 세계 과학의 성과’에서는 전자, 양전자, 중성자, 알파입자, 중성미자, 광입자 등 그때까지 알려진 소립자에 대해 정리하고, 당시 막 발견한 중수소(重水素)까지 소개했다. 이 모두가 1930년대 대중 일간지에 실린 과학 칼럼이다. 열악한 환경이라 제대로 된 연구는 할 수 없어도, 적어도 시대 흐름에는 뒤처지지 않도록 했다.
해방되자 최규남은 서울대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이후 문교부 차관으로 새로운 교육 체계를 만들던 그의 포부는 1950년 6월 26일 동아일보에 기고한 칼럼에 드러난다.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문과 이과 구분이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이한 방식이라며 다음과 같이 통렬히 비판한다. “문과계의 학문만을 학습하여 가지고 교문을 나온 그네들은 자연과학에 아무 교양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과학에 대한 이해조차 없는 반신불수의 대학 졸업생들이다. (...) 이와 같은 인문 계통 졸업생이 사회에 나와서는 정치, 경제, 법률 기타 모든 중요 방면에 지도자 격으로 군림하여 이공학부 출신의 기술자를 부리는 지도적 지위를 점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그의 개혁은 진전되지 못한다.
총장이 납북당한 서울대학교는 1951년 부산에서 최규남을 새 총장으로 임명한다. 전시였지만 그는 한국 과학의 미래를 위해 조금도 쉬지 않았다. 부산에 전시 연합 대학을 발족시키고 피란지 대학들의 소식지로서 1952년 ‘대학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은 전쟁이 끝난 뒤 서울대학교 신문이 되었다. 부산으로 피란한 서울대학교에서 최규남은 한국물리학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었다. 또한 미네소타대학과 교류 협정을 맺어 전후 대학이 복구되는 기반을 마련한다. 서울대학교 총장을 마친 최규남은 1956년 문교부 장관, 1964년 한국과학기술원(KIST) 설립 준비 위원장을 맡아 교육과 과학에 헌신했다. 1992년 사망한 최규남은 어렵던 시절 양자역학과 최신 과학을 소개하며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하고 최선을 다한 선구자였다.
‘여성 성악가’ 조선일보 기사 보고… “사귑시다” 미국서 러브레터
1931년 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강의하던 성악가 채선엽에게 전혀 모르는 사람이 보낸 항공우편이 도착한다. “저는 미시간대학 물리과에서 피에이치디 과정을 밟고 있는 최규남이라는 사람이올시다. 조선에서 온 신문에서 선엽씨에 대한 기사를 읽고 예가 아닌 줄 알면서도 글월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조선일보를 보며 외로움을 달래던 어느 날 신문에서 채선엽의 이화여전 졸업 기사를 보자마자 주저 없이 ‘사귀자’는 편지를 보낸 것이다. 야구 스타 최규남의 연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32년, 한국인 최초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최규남은 연희전문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고 바로 옆 이화여전의 채선엽을 찾아가 만나기 시작했다. 야구 선수 출신 물리학 교수 최규남은 연애도 남달랐다. 송도고보와 연희전문 시절 야구 이야기를 하며, 치기만 하면 홈런이었다고 음대 교수에게 자랑했다. 엉뚱했지만, 채선엽은 구김살 없는 물리학자 최규남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지만 채선엽은 대부호 집안의 22세 아가씨였고, 최규남은 홀어머니에 35세 노총각이라 결혼은 쉽지 않았다.
이때 채선엽의 오빠 채동선이 나섰다. 벌교의 갑부였던 채동선의 아버지는 그를 서울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유학 보냈다. 이때 채동선은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3·1운동에 가담했다가 자퇴하고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와세다대학 경제과에 입학했지만 그의 관심은 온통 바이올린이었고 결국 독일로 음악 유학을 떠났다. 1929년 귀국한 채동선은 채선엽의 이화여전 친구 이소란과 결혼했다. 이후 채동선은 두 사람을 지지하고, 1934년 최규남은 채선엽과 결혼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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