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을 '시체처럼 가만히' 보라고?...너무 예민한 관객들이 바꾼 공연장 풍경

김소연 2023. 12. 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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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리진' 관람 매너 항의 소동
온라인 매체 필기 못하게 한 여성 관객 비난 칼럼 게재 
엄격한 관극 강요 분위기 비판 목소리 커져
뮤지컬 '리진'

'뮤지컬 '리진'을 볼 필요가 없는 이유.' 지난 9일 한 온라인 매체에 게재된 이 같은 제목의 칼럼이 격렬한 논쟁을 불렀다. 공연 내용 메모를 위해 필기를 하려다가 "거슬린다"는 옆자리 관객에게 제지당한 기자가 쓴 칼럼이었다.

개인적으로 겪은 일을 칼럼으로 쓴 것이 온당했는지에 대한 논란과는 별개로, '관객이 공연을 얼마나 조용히 관람해야 하는가'에 대한 격론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벌어졌다. '시체관극(공연을 볼 때는 시체처럼 미동 없이 극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의 자조 섞인 표현)'과 '필기진동(필기하는 소리를 지진 진동처럼 느낄 만큼 예민한 관객을 가리키는 표현)'이 엑스(X·옛 트위터) 인기 검색어에 오를 정도였다.


"나도 당했다"… 업계까지 침투한 '시체관극' 강요

그래픽=박구원 기자

이번 논란과 관련해 뮤지컬 프로듀서 A씨는 자신이 겪은 일화를 털어놨다. 그는 심장판막 수술 후 뮤지컬을 관람하러 서울의 한 소극장을 찾았다가 "시계 소리가 시끄럽다"는 옆자리 관객의 지적을 받았다. 인공판막 소리를 초침 소리로 오해한 것이었다. A씨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난처했다"며 "누구나 온전히 공연을 즐길 권리가 있지만 한국처럼 숨소리 하나 내지 못하며 관람하는 분위기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마니아 관객이 주도하는 국내 공연계엔 엄숙주의 관람 예절 강요가 유난하다. 기자들의 필기도 자주 뜨거운 눈총을 받는다. 박병성 칼럼니스트는 "필기하는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데 공감해 지금은 자제한다"면서도 "관객과 배우가 함께 호흡하는 공연 특성상 다양한 관객에게 일방적 관람 방식을 강요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 공연을 여러 번 관람하는 '엔(n)차 관람' 비중이 높은 500석 미만 중소극장의 '회전문' 공연에선 '시체관극' 압박이 유독 강하다. 모든 관객이 처음부터 끝까지 박수를 치지 않고 숨죽이고 보는 경우도 많다. 김아형 서울예술단 홍보과장은 "최근 소극장 뮤지컬을 보면서 첫 곡이 끝나고 감격에 겨워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 엄숙한 분위기 때문에 내면의 박수로 끝내야 했다"고 말했다. 박병성 칼럼니스트는 "코미디조차 소리 내어 웃지 못하고 봐야 했던 1, 2년 전에 비해 그나마 요즘은 유연해진 편"이라고 말했다.


"꼼짝도 하지 마라"… 삼엄해진 공연장

게티이미지뱅크

"휴대전화를 꺼라. 허용되지 않는 한 촬영은 안 된다"는 것은 만국 공통의 공연 관람 에티켓. 한국에선 '관람 중 자세'도 공연장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등받이에 등을 붙이고 공연을 관람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국내 공연장에서만 들을 수 있는 사전 안내 방송 멘트다. 허리를 수그리고 앉아 뒷좌석 관객의 시야를 가리지 말라는 뜻이다. 패딩 옷감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관객 때문에 "부피가 큰 옷은 미리 정리하라"는 멘트를 하기도 한다.

뮤지컬 프로듀서 A씨는 "어떤 외국 극장에서도 의자에 똑바로 앉으라고 방송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며 "공연은 마음을 열고 봐야 하는데 공연장이 앞장서서 딱딱한 분위기를 이끄는 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연장이 아무리 애써도 예민한 관객들의 불만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있다. 서울 한 공연장의 하우스 매니저에 따르면 "뜬금없는 타이밍에 일부 관객이 웃는 소리가 관람에 방해가 된다"거나 "주변 관객이 머리를 계속 만져서 거슬리니 방송을 해달라"고 항의하는 경우가 최근 부쩍 늘었다.


마니아조차 걱정하는 시장 위축

뮤지컬 '리진' 비판 칼럼

반복되는 '시체관극 논쟁'이 결국 공연계 위축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연간 최대 70회 이상 공연을 관람한다는 13년 차 공연 마니아 김모씨는 "공연을 자주 접하지 않은 친구와 공연장을 찾았다가 부스럭거렸다는 이유로 주변 관객에게 욕을 들은 경험이 있다"며 "매너를 잘 지키자는 좋은 취지로 시작된 엄숙주의가 새 관객 유입을 막는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전문가들 역시 공연 시장 저변 확대를 위해 포용적 자세가 필요한 시점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원종원 순천향대 공연영상학과 교수는 "뮤지컬계가 건강한 생태계 조성보다 단기 이익에 급급해 규모를 키워 오다 보니 소비 권력이 된 일부 관객의 왜곡된 행태를 키워온 면이 있다"고 말했다. 한 제작사 대표는 "관람 방해 기준을 객관적으로 정하기는 어렵지만 소극장연합회, 공연프로듀서협회 등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상세한 고객 응대 매뉴얼 마련을 놓고 논의를 시작할 시점이 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김소연 기자 jollylif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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