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석동이 풀어내는 '한민족의 기원'] 고구려 함성·안중근의 총성..민족의 기상 살아 숨쉬는 듯

오현환 기자 2018. 12. 1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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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민족 역사무대 '만주' 이야기
필자인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서울경제] 편집자주 30여년간 우리나라의 경제성장과 안정에 헌신했던 정통 경제 관료,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이 고속성장과 민주화의 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궈낸 뿌리를 찾아 만주와 유라시아 대륙 등 한민족의 DNA가 배어 있는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가 현지에서 건져 올린 한민족의 기원·역사·DNA를 담은 탐방기를 앞으로 4주마다 한 번씩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그는 우리 기적의 원동력이 고대 유라시아 대초원을 무대로 맹활약하던 북방 기마민족의 DNA에 있으며 이런 우리의 기상이 닥쳐올 위기 극복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을 기대합니다.
대제국 고구려가 오랜 도읍지인 지안 국내성의 북쪽에 전시를 대비해 세운 산성자산성(환도산성)이다. 험준한 산봉우리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 1,500여년이 지났지만 성벽이 그대로 남아 있어 고도의 축성기술과 함께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던가를 웅변하고 있다.
‘만주(滿洲)’는 좁게는 중국동북부의 랴오닝성·지린성·헤이룽장성 3개성을 지칭하나 넓게는 네이멍구 자치구 동부지역과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을 이른다. 넓게 본 만주는 약 150만㎢로 한반도의 7배 정도다.

만주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민족은 광활한 만주대륙에서 첫 나라 고조선을 세웠다. ‘부여’가 그 역사를 이어갔으며 이후 ‘고구려’가 700년 이상 만주대륙에서 세력을 떨쳤다. 고구려 멸망 후 30년 만에 다시 ‘발해’가 건국돼 228년간 만주에서 터를 닦았다. 926년 발해가 거란에 멸망당하면서 만주지역은 직접적인 우리 역사와 멀어지게 됐다.

그러나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고의 원나라 등 북방민족이 계속 만주를 차지했다. 원나라 멸망 후 만주지역은 몽고·거란·여진 등이 나눠 지배했으나 1616년 출범한 여진의 청나라가 만주의 주인이 됐다. 한민족 이후 만주대륙을 장악했던 북방민족은 한민족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조선상고사’에서 여진·선비·몽고·흉노 등은 본래 아(我)의 동족이었다고 했다.

한편 근세에 들어 조선 후기에는 드넓은 간도 땅에 한민족이 대거 이주해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진원지이자 거점이 되면서 만주 땅은 한민족 역사와의 관계를 이어왔다.

필자는 만주 일대를 지난 2013년 이후 최근까지 차량을 빌려 현지 전문가 안내인과 함께 여러 차례 돌아봤다. ‘선양에서 훈춘까지 동서횡단’과 ‘하얼빈에서 다롄까지 남북종단’의 역사여행 경로를 소개한다.

■고구려·발해 역사품은 선양~훈춘 425년간 고구려 도성 있던 ‘국내성’ 북동쪽엔 광개토대왕 ‘태왕릉’ 위용 발해 14년수도 ‘서고성’ 흔적 뚜렷

◇선양에서 훈춘까지 동서횡단 1,800㎞=선양은 랴오닝성 성도로 청나라 초기 수도였으며 선양 고궁, 청 태조 누르하치의 묘소인 동릉이 있다. 봉림대군과 소현세자가 볼모로 잡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선양에서 동쪽으로 170㎞ 달리면 푸순시의 신빈에 닿는다.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세운 첫 수도인 ‘허투알라(혁도아랍·赫圖阿拉)성’이 이곳에 있다.

신빈에서 동쪽으로 200㎞ 정도 가면 퉁화가 나오며 다시 남쪽으로 100㎞를 더 가면 지안에 다다른다. 지안은 대제국 고구려의 오랜 도읍지로 수많은 고구려 유적이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국내성은 압록강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평양 천도 전 425년간 도성이 있던 곳이다. 성벽과 성문터, 치 등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지만 성터 위에는 안타깝게도 아파트와 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국내성 북쪽에는 전시에 대비해 쌓은 산성자산성(일명 환도산성)이 있다. 이 성은 험준한 산봉우리들로 둘러싸여 있는 천연의 요새다. 1,5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잘 쌓인 성벽이 그대로 남아 고도의 축성 기술과 전쟁에 얼마나 철저히 대비했던가를 웅변하고 있다.

국내성에서 북동 방향으로 2.5㎞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태왕릉.
국내성에서 북동 방향으로 2.5㎞ 지점에 가면 광개토대왕의 태왕릉이 나타난다. 그 규모의 방대함은 고구려 최전성기 때의 무덤으로 손색이 없다. 돌로 축조한 돌무지무덤으로 계단을 올라가면 돌로 된 묘실이 나타나고 내부를 볼 수 있다.

이 능에서 북동부 방향으로 약 300m 거리에 광개토대왕비가 있다. 높이 6.39m의 거대한 돌에 고구려 건국신화부터 광개토대왕의 업적 등이 1,775자로 새겨져 있다. 청나라 시대인 1880년에 한 농부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 있는 거대한 돌비석을 발견했는데 이 비석으로 말미암아 찬란했던 고구려 역사가 분명히 밝혀지게 됐다. 태왕릉에서 북동쪽으로 약 1㎞ 지점에는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는 장군총이 있다.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축조된 7층 구조의 돌무지무덤이다. 장군총·광개토대왕릉비·태왕릉·국내성은 네 지점이 모두 일직선상에 있다.

태왕릉 인근에는 귀족 묘지가 모여 있는 오회분이 있는데 5호묘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을 이기고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사신도 벽화와 마주쳤다. 감동의 순간이지만 촬영 제한으로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발해 중경현덕부가 위치했던 허룽의 도성 서고성 표석.
이어 지안에서 약 400㎞ 떨어진 백두산 북쪽 기슭에 있는 얼다오바이허(二道白河)에 도착해 여정을 풀었다. 이튿날 백두산과 천지를 본 후 180㎞ 정도를 달려 허룽에 도착했다. 허룽은 한민족 역사의 중심지 중 한 곳이다. 동부여의 발현지이자 발해 중경현덕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발해2대 무왕 때 이곳의 서고성(西古城)으로 천도(742년)해 14년간 수도로 삼았다. 서고성은 토성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돼 있는데 외성은 둘레가 약 2.7㎞, 내성은 약 1㎞로 그 흔적이 아직도 뚜렷하다.

허룽을 떠나 약 70㎞ 떨어진 옌볜조선족자치주 주도인 옌지로 향했다. 이튿날 약 30㎞ 정도 떨어진 룽징을 방문했다. 룽징은 해란강과 일송정, 윤동주 시인 생가와 명동교회, 명동학교가 있는 명동촌이 자리 잡은 곳이다.

룽징에서 약 70㎞ 동쪽으로 가면 두만강 국경도시 투먼이 나온다. 두만강연안에서 북한과 철도로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다. 투먼 동쪽으로는 두만강을 따라 북중 접경지대를 달리게 되며 10㎞ 정도 가다 보면 한반도 최북단인 북한의 ‘풍서’를 마주 보며 지나게 된다. 감개무량하다. 마침 강에서 사공이 노 젓는 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이라는 노래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투먼시에서 70㎞를 더 달리면 국경 도시 훈춘에 닿는다. 이곳은 발해5경 중 동경용원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발해 3대 문왕이 신라 및 일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천도해 9년간 수도로 삼았다. 팔련성은 동경용원부의 중심 성터로 외성과 내성 터를 비롯해 다수의 유물들이 발굴됐다. 살아 숨 쉬는 발해사의 현장이다.

훈춘에서 다시 북중 국경선에 인접한 좁은 길로 약 60㎞를 달려 북중러 3국이 국경을 맞대는 두만강 하구 팡촨에 도착했다. 중국은 여기서부터 16㎞가 육지로 가로막혀 동해와 태평양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망해각(望海閣)이라는 탑을 세웠다. 팡촨을 끝으로 1,800㎞의 여정을 마쳤다.

■독립운동의 격전지, 하얼빈~다롄 김좌진 장군, 하이린서 독립운동 안중근 의사·신채호 선생 순국 ‘뤼순감옥’엔 독립열망 고스란히

◇하얼빈에서 다롄까지 2,600㎞ 남북종단=하얼빈은 인구 987만명의 헤이룽장성 성도로 우리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신 선생은 하얼빈을 고조선의 첫 수도로 보고 있다. 고구려의 후손인 아골타가 세운 금나라의 첫 수도 또한 이곳이다. 근세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는 거사를 일으켜 조선독립에 대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지금은 하얼빈 역사를 대대적으로 개축하고 있어 역사적 현장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인근으로 옮긴 안중근의사기념관에는 방문객의 감동을 자아내는 자료들이 곳곳에 전시돼 있다.

하얼빈에서 남동쪽으로 약 330㎞ 떨어진 무단장시 하이린은 청산리전투의 백야 김좌진 장군이 활동했던 만주독립운동의 중심지다. 무단장시 중심부를 지나 남서쪽으로 가면 닝안이 나오는데 남쪽으로 보하이전(渤海鎭)이 있다. 이곳은 755~926년까지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가 자리 잡았던 곳이다. 광활한 성터가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한쪽 성벽이 3~4㎞에 달하는 대형 토성벽은 광활한 대륙의 지배자 발해의 국력을 실감하게 한다.

닝안에서 서남쪽으로 170㎞ 가면 옌볜조선족자치주의 둔화가 나온다.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이 56년간 자리 잡았던 곳이다. 둔화에서 남쪽으로 150㎞ 떨어진 얼다오바이허에 도착해 이튿날 백두산에 다시 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5월 말인데도 천지는 눈 속에 완전히 싸여 백두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하산해 서쪽으로 퉁화를 경유해 지안으로 가서 고구려의 흔적을 다시 돌아봤다. 지안을 떠나 퉁화를 경유해 200㎞ 떨어진 환런만족자치현으로 향했다. 고구려의 첫수도 오녀산성이 있는 곳이다. 차로 달려가면 멀리서부터 감탄을 금할 수 없는 우람하고 견고한 자태가 한눈에 보인다. 9부 능선에 깎아지른 절벽을 이용하고 완만한 구간에는 성벽을 쌓은 철옹성의 모습이다. 오녀산성은 해발 820m에 남북 200m, 동서 130~300m 규모의 난공불락의 요새다. 오녀산성에서 내려와 남서쪽 200㎞에 있는 압록강변의 단둥에 도착했다. 끊어진 압록강철교와 북한 땅을 눈앞에 두고 한민족의 근세사를 생각해본다. 이튿날 단둥을 뒤로하고 약 300㎞ 떨어진 다롄으로 향했다. 다롄에는 우리가 잊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 있다. 바로 뤼순감옥이다. 안 의사와 신 선생이 순국한 곳이다. 마침 공사 중이어서 방문하지 못하고 다롄에서 남북종단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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