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의지' 강했던 대통령 권한대행, 완전히 실패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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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 8월 18일, 최규하 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를 떠나기 앞서 전두환 국보위 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작별인사를 나누고 있다. 가운데는 민관식 국회의장 직무대행. |
ⓒ 연합뉴스 |
10·26으로 인해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12월 6일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권한대행을 거쳐 대통령이 된 사례는 박정희에 이어 최규하가 두 번째다. 1961년 5월 16일부터 윤보선 정부와 동거한 박정희는 윤보선이 하야 성명을 발표한 지 이틀 뒤인 1962년 3월 24일부터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취임 때까지 권한대행직을 수행했다.
최규하는 박정희처럼 군부 세력을 배경에 두지 않고도 권한대행에서 대통령으로 직행했다. 군부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당시의 시각으로 보면, 꽤 손쉽게 대통령이 된 셈이었다. 최규하가 '행운의 사나이'로 비쳤다는 점은 그가 동아일보사가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 됐음을 알리는 그해 12월 29일 자 <동아일보> 1면에서도 확인된다.
상체를 약간 구부린 거구의 최규하가 승용차에서 나와 건물 현관에 들어서는 사진과 함께 살린 위 기사는 "10대 대통령 최규하 씨는 지난 6일 이승만·윤보선·박정희 씨에 이어 네 번째로 이 나라 대통령에 '무난히'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라고 전했다. 기사는 '무난히'를 강조했다.
이원집정부제 추구? 실패한 최규하 체제
그런 뒤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된 데는 시운을 타고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오늘의 최 대통령을 있게 한 운명의 국무총리 피임(被任)을 두고 운이 좋은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도 많지만" 등등의 표현을 통해 최규하에 대한 세상의 시선을 언급했다.
최규하 체제가 그런 시운을 누린 데는 일차적으로 최규하 자신의 의욕이 크게 작용했다. 위 기사는 "최 대통령은 10·26사태로 하루아침에 권한대행을 맡게 된 데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자 측근들에게 '모두가 숙명인 것 같다'는 감회를 여러 차례 털어놓았다"라고 전한다. 의욕이 없었다면 대선에 출마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대통령 취임을 숙명으로 받아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최규하 대행체제는 원톱이 아니라 투톱이었다. 점잖은 양반 이미지를 풍기는 최규하 권한대행과 유능한 재사(才士) 이미지를 풍기는 신현확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가 함께 떠받치는 시스템이었다. 관료 집단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리더는 최규하가 아니라 신현확이었다.
최 대행이 대통령이 된 데는 그 자신의 의욕과 더불어 부총리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작용했다. 박정희 영결식이 치러진 11월 3일 이후로 국무회의 등의 석상에서 최규하의 대선 출마를 집요하게 촉구한 이는 신현확이다.
그의 아들인 신철식 전 국무조정실 차장이 쓴 <신현확의 증언>은 손사래를 치며 대통령 출마를 거부하는 최규하를 상대로 신현확이 "어쩌자고 이렇게 무책임하게 나오십니까?"라며 "대통령권한대행으로서 이 위기관리 책임을 완수해야 될 거 아닙니까?"라고 몰아세우는 광경을 보여준다. 최규하뿐 아니라 신현확도 의욕이 상당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80년 3월 14일 자 언론보도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규하-신현확 투톱은 12·12 쿠데타 이후에는 이원집정부제를 추구했다. 최규하 체제는 행정부를 그럭저럭 장악하고 전두환 세력은 군부를 확실히 장악한 이 시기에 최-신 투톱은 대통령은 외교를, 총리는 내정을 분담하는 절충형 개헌을 추진했다.
이 방안은 최규하와 신현확의 이원체제를 염두에 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최규하 체제와 전두환 세력의 이원체제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전두환의 등쌀 속에서도 이런 방안을 공개한 것은 투톱의 권력 추구 의지가 대단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최규하 체제는 실패했다. 12·12에 이어 5·17까지, 쿠데타를 무려 두 번이나 허용했다. 두 번째 쿠데타 직후에는 5·18 광주학살까지 있었다. 이런 일들을 저지른 전두환뿐 아니라, 공식 권한을 갖고도 번번이 막지 못한 최규하의 책임도 컸다. 시대를 거스르는 전두환의 발호를 막지 못해 1987년 6월항쟁 때까지 역사 발전을 지연시킨 최규하·신현확의 책임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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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사후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던 최규하 |
ⓒ 위키미디어 공용 |
특전사 보안반장 출신이자 12·12쿠데타 가담자인 김충립 목사는 2023년 12월 14일 <오마이TV> '구영식의 취재수첩'에서 1979년 4월에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계엄이 나면 보안사가 3권을 장악하는 찬스가 온다"고 말한 사실을 증언했다.
1997년 12월 7일 자 <조선일보>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따르면, 전두환은 국방부 계엄시행계획인 '충무계획 1200'에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가능케 하는 근거 규정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향후의 비상계엄에 대한 준비를 진행했다.
<전두환 회고록> 제1권은 1979년 여름 이후의 전두환이 향후의 비상계엄 상황에 대비해 보안사령관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했음을 보여준다. "계엄 업무와 관련된 보안사의 임무와 역할에 관해 세부 사항이 미비한 사실을 알게 되어 관련 규정을 마련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라고 전두환은 회고했다. '미비'란 표현에 담긴 속뜻은 권한 강화의 합리화다. 기존의 보안사령관이 갖지 못한 권한을 비상계엄하에서 갖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
그런 준비를 토대로 전두환은 10월 26일 밤에 보안사령관이 책임지는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에게 건의했고, 전두환의 의도를 모르는 정승화는 그 혼란한 와중에 쉽게 승낙을 했다. 전두환은 다음날의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합동수사본부 설치를 못 박고 모든 정보기관을 보안사령관 예하에 뒀다. 전두환은 이렇게 차지한 합동수사본부장 지위를 이용해 군부는 물론 행정부에도 압력을 가하고 국민들 앞에도 얼굴을 드러냈다.
전두환의 군부 장악을 가능케 하고 최규하 대행체제를 뒤흔들 만한 합동수사본부 설치는 10월 26일 밤의 그 혼란한 상황 속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날 그 일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전두환과 핵심 측근들뿐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최규하 대행체제는 대통령직을 꿈꾸고 대권 행보로 나아갔다.
최규하 체제를 밑바닥에서 약화시킨 또 다른 요인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행보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따르면, 정승화 사령관은 1979년 11월 26일 언론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김대중은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박정희가 마산과 부산에서 타오른 부마민주항쟁으로 대표되는 국민적 저항을 받다가 사라졌으므로, 야당이나 재야의 지도자가 대통령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게 당연했다. 이것이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에 부합했다. 이런 열망을 감안해 최규하 대행은 유신헌법의 개정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정승화의 행보는 그런 노력의 의미를 반감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계엄사령부에 의해 지탱되는 최규하 대행체제가 국민적 호응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떨어트렸다. 군부 장악력이 전혀 없는 최규하 체제가 힘을 가지려면 국민적 지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정승화의 정치 개입은 이를 저해했다.
전두환의 음모와 정승화의 정치 개입은 최규하 체제를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이 같은 내부의 시한폭탄도 제거하지 않은 채 최규하-신현확은 대권을 꿈꾸고 이원집정부제까지 생각했다. 발밑의 지뢰는 쳐다보지 않고 구름만 올려다본 셈이다.
최규하 권한대행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박정희 몰락 뒤에 스스로 퇴장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모두가 숙명인 것 같다"며 정치 행보를 가속화했다. 몰락한 정권의 분신이면서 그 정권과 결별하지도 않은 채 대권 행보를 벌인 권한대행체제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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