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쿠팡 뛰었어요"... 20년 인쇄업자가 말하는 '힙지로'의 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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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온 기자]
지난 3월 말, 서울 중구 을지로를 찾았다. 매캐한 잉크 냄새와 오래된 인쇄기의 진동은 여전했다. 최근 을지로는 재개발과 산업 쇠퇴 속에 흔들리고 있다. 2030 세대에게 '힙지로'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내게 을지로는 '아빠'와 같은 말이다. 지금 내 나이, 과거 26세에 처음 인쇄 일을 시작한 아빠, 한민배씨가 일하는 곳이 을지로이기 때문이다.
아빠가 을지로 인쇄 골목에 터를 잡은 지, 올해로 20년이 되었다. 당신이 을지로에서 일하며 먹여 살린 백수 딸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을까 고민하다, 아빠의 인쇄 인생 20년을 기록해서 선물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나도 이제 을지로와 인연을 맺을 준비를 하고 있다. 기자를 준비 중이기 때문이다.
'을지로 터줏대감 한민배씨, 인쇄업 종사 20주년 기념 인터뷰'라고 주제를 잡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아빠를 '민배씨'라고 불렀다. 내 최초의 인터뷰이는 우리 아빠 '민배씨'다. 다음은 그와 그의 동료 인쇄업자가 말하는 을지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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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실에서 만난 민배씨, 카메라를 보며 웃음을 짓고 있다. |
ⓒ 한시온 |
"25살, 형 소개로 약수동 커텐 회사에 들어갔어요. 카탈로그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월 50만원씩 받으면서 주 6일 일했죠. 거기서 디자이너였던 지금의 아내를 만났어요(웃음)."
결혼 후 생계를 위해 출력일을 배우며 출력실 실장으로 승진했고, 유기농 친환경 음식 사업에도 도전하는 등 여러 일을 했지만 결국 다시 을지로로 돌아오게 됐다. 다양한 회사를 전전하며 경험을 쌓은 그는 어느 날, 한 거래처 사장님의 제안으로 독립하게 됐다.
"'혼자 회사를 차려볼 생각 없냐'고 하시더라고요. 그게 지금 '하늘기획'의 시작이었죠. 어느덧 혼자 일한 지도 9년 차네요."
하나의 인쇄물이 나오려면 기획, 디자인, 출력, 인쇄, 후가공이라는 과정을 거친다. 그는 여기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까?
"공장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기획 의도에 맞게 제품이 잘 나오는지 관리하고 전체 공정을 다 알아야 하거든요. 이게 바로 제작자죠. 지금은 기획과 제작일을 맡고 있어요."
10년 전 그와 같은 회사에서 만났던 동료 전승진 대표는 현재 '마음공작소'를 운영하며 여전히 을지로에 남아있다. 같은 인쇄업자인 그는, 자기 일을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고객의 요구와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 사이의 중간 역할을 하는 거죠. 똑같은 인쇄물은 하나도 없어요. 사람들의 니즈에 맞는 제품을 만들어내는 게 우리의 경쟁력이에요."
조선시대 때 활자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해 약 600년 인쇄 역사를 가진 충무로 인쇄골목은 서울미래유산으로도 지정됐다. 이 치열한 인쇄 거리에서 민배씨가 20년 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히 기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쪽 업종은 기술 업종이면서 서비스업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고객이 뭘 원하는지 잘 캐치하고 소통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그걸 잘 했던 것 같고요."
전 대표는 이렇게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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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지로 3가 8번 출구로 나오면 제본소와 인쇄소들이 모여있는 인쇄 골목을 볼 수 있다. |
ⓒ 한시온 |
하루 종일 굉음을 듣는 그는 몇 년 전 생긴 이명이 이런 근무환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여기는 원래 밤에도 기계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동네였어요. 재개발로 을지로 공장들이 가정집이 많은 필동 쪽으로 올라갔는데 거기서도 민원이 들어온다고 할 정도였지. 전에 다녔던 회사에는 기계가 한 네다섯 대 있었는데 밤새 그 소음을 그대로 들어야 했거든요.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아마 청력이 안 좋은 경우가 많이 있을 거예요."
건물이 노후하고 기계가 오래돼서 사고도 많이 발생한다고 했다.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된 거래처 인쇄소 사장님 있거든요. 거기 사장님 손가락이 인쇄기에 껴서 다쳤어요. 또 다른 사장님은 손가락이 없어요. 얘기 들어봤더니 옛날에 직장 다닐 때 잘렸다고 하더라고요. 재단하는 사람치고 그런 경우 한 번씩은 다 있어요."
전 대표는 안전사고가 지금은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과거에는 공장에 안전 지침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아 위험했다고 회상했다. 실제로 작업 중 목숨을 잃는 사고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에 리프트 밑 공간을 청소하다가, 리프트가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누군가 버튼을 잘못 눌러버린 거예요. 리프트가 내려오면서 그 밑에 있던 사람이 압사했지. 안전장치가 잘 안 됐을 때 인쇄기에 사람이 빨려 들어가서 죽은 경우도 있어요."
종이의 위기, 투잡이 기본인 사장들... 그럼에도 가치 있는 건
최근 온라인 매체가 발달하면서 종이 매체의 수요는 점점 줄어들었다. 민배씨는 혼자 일하는 것의 장점으로 시간적 자유로움을 꼽았지만, 단점으로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을 들었다.
처음 인쇄 일을 시작했을 땐 일이 많아 야근이 잦았지만 지금은 불경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 대표 역시 상황이 비슷했다.
"민배씨도 어제도 쿠팡(알바) 했다잖아요. 자영업자들이 지금 일이 없어요. 저도 (이 일 하면서 같이) 쿠팡 1년 반을 다녔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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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거래처 하청업체인 을지로 인쇄소의 사진, 우측 나온 인쇄물(책자)를 확인하고 있는 모습. |
ⓒ 한시온 |
전 대표 왈, 성수동은 을지로와 비슷한 특징을 지녔단다(성수동은 한때 가죽, 인쇄, 제화 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오래된 공장, 창고들이 최신 유행 카페, 전시회, 패션브랜드들이 입점되면서 현재는 젊은 세대들이 자주 찾는 장소로 거듭나게 됐다). 그는 성수동 사례를 언급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성수동도 이미 인쇄 업체들이 빠지고 핫플레이스로 변했잖아요. 경기 파주 인쇄 단지는 이미 꽉 찼다고 하고. 거기 이사 가는 건 규모가 큰 업체들이고, 이 동네 네다섯 평 되는 데서 일하는 사람들은 거기로 이사 갈 수가 없어요. 결국 도태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있는 거죠."
재개발이 되더라도, 을지로에 남아 있는 인쇄업자들이 함께 모여 일할 수 있는 공간만큼은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게 이들의 바람이다. 인쇄업은 여러 공정이 긴밀히 연결된 산업이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에 모여 있어야 빠르고 정확한 작업이 가능하다는 이유다.
"누가 이 일 하고 싶다고 하면, 솔직히 (하지 말라고) 말려요."
전망을 물으면 돌아오는, 인쇄업계 사람들의 솔직한 고백이다. 시끄러운 기계 소리, 적지 않은 폐기물 등으로 사회적 인식도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는 이유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는 이들이 있다. 민배씨는 희소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다루는 작업물의 가치는 더 높아졌다고 생각해요. 전시회 책자나 수첩 같은 결과물을 사람들이 보고 '이거 예쁘다', '나도 하나 갖고 싶다'고 할 때 보람을 느끼죠."
전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잖아요. 디자이너가 만든 시안을 기반으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실제 물건이 나오는 과정이 매력적이에요."
인쇄업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 권의 책, 한 부의 달력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다섯, 여섯 개 업체의 손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을지로'라는 공간은 특별하다.
"여기서는 사람들끼리 손발이 잘 맞아요. 서로 오래 알고 지낸 사이들이 많아서, 실수가 생겨도 빠르게 대응할 수 있죠. 이 일은 단순히 종이만 찍어내는 게 아니에요. 현장에서 쓰이는 소화기 표지판이나 리프트 안전 수칙 같은 사람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중요한 인쇄물도 만들어요. 그게 실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면 정말 뿌듯하죠."
라벨, 택, 명함, 달력… 일상 속에 꼭 필요하지만 크게 눈에 띄지는 않는 것들이다. 그런 것들을 정성스럽게 만들어내는 이들의 손끝에서 우리 삶은 조금 더 정확해지고 안전해진다.
이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아직 사라지지 않은 인쇄 공동체의 가치이자 문화이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예술이며 삶의 무게를 고스란히 눌러 찍는 한 장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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