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천 다 앗아간 화마…3주 지나도록 잠 못 이뤄

유건연 기자 2025. 4. 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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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일군 과원 한순간 잿더미
저장사과 25t·농기계 20대 전소
물질적 피해 넘어 마음에 생채기
아이들 보며 재기 다짐하지만…
“국가가 농민 아픔 살뜰히 챙겨야”
사과 농부 정희호씨가 경북 북동부를 집어삼킨 초대형 산불에 모두 타버린 과원에서 망가진 관수호스를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마음속 상처는 더욱 커져만 갑니다. 자식들을 위해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생각을 하루에도 수십번 하지만 잿더미로 변한 창고와 농기계·사과나무를 보면 한숨만 나옵니다.”

정희호씨(56·경북 안동시 길안면 구수리)는 2만6446㎡(8000평) 규모의 농사를 지으며, 세 아이를 키우는 농부다. 경북 북동부를 휩쓴 역대 최악의 초대형 산불은 30여년간 차곡차곡 일궈 온 그의 삶의 터전과 생업을 하루아침에 앗아버렸다. 평생 일군 삶의 터전을 한순간 잿더미로 만든 화마는 물질적 피해를 넘어 그의 마음에 크나큰 생채기를 남겼다.

정씨는 “사과농사 30여년 경력에 우박·태풍·저온피해 등 온갖 재해를 다 겪어봤지만, 이렇게 농사 밑천까지 송두리째 앗아 간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과연 원상복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고 고통을 토로했다.

그는 과원 3분의 2가 화염과 그을음 피해를 본 것으로 추정했다. 과수원에 설치한 분무 장치(미니 스프링클러)와 관수·관정 시설이 나무와 함께 불탔다. 무엇보다 창고에 보관하던 트랙터 6대와 부속기 4대, 운반기 8대, 승용관리기 7대, 고소 사다리차 3대 등 각종 농기계 20여대가 형체도 없이 타버렸다. 저온 저장고에 보관하던 사과 25t(컨테이너 1252개 분량)은 강한 불길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컨테이너 박스와 팔레트도 모두 소실됐다. 목숨만 건졌을 뿐 자신의 농사 기반은 모두 불타버렸다.

“아침에 눈을 뜨면 뭘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앉아 있다”는 정 씨는 “평소라면 오전 5시에 농장에 나와 일과를 시작하는데, 봄 방제가 시작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땐데…” 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산불이 순식간에 농장과 농기계 보관 창고에 옮겨 붙어 타는 모습을 생각하면, 3주가 지나도록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 “매일 같이 술에 의존한다”고도 했다. “처음 일주일 정도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며 스스로 위로했다”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농기계 하나 없는, 정말이지 아무 것도 없는 현실을 생각하면 막막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고 했다.

부농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미래를 향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삶의 터전에 매일 같이 나와 보지만 허탈함과 안타까움이 그를 무겁게 짓누른다.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없어 급하게 1000만원 빚을 내 중고 트랙터 1대를 장만했다. 밭이라도 일궈야 답답함을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트랙터 작업을 하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이 하얘져 집중을 할 수 없어 사고가 날 뻔하기도 했다.

정씨를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불투명한 미래다. 기반 시설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나무를 심고, 농기계를 구매해 과원을 가꾸는 일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종 농자재와 농기계를 다시 장만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필요한 데다, 상품성 있는 사과를 수확하기 위해선 최소 3∼4년은 지나야 한다. 4∼5년 동안 변변한 소득 없이, 융자나 대출로만 농비를 감당해야 한다. 아직 갚아야 할 빚도 남아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인 막내가 산불 소식에 충격을 받고 한동안 힘들어 하다가 최근에 다시 책을 손에 잡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꼭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한다는 그. 하지만 생각만큼 해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정씨는 산불 피해 이주민과 농민의 아픔을 제대로 살펴서 보듬어주고, 재기할 수 있도록 국가가 살뜰하게 챙겨주길 절실히 바랐다. 그는 “역대 최악 산불로 저보다 피해가 큰 농가도 여럿 있다”면서 “정부가 산불로 고통받는 피해농민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지원해주길 간절히 바란다”고 애달프게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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