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국민을 군대로 기르자” 무장 독립사상가의 외침

김진형 2025. 3. 21.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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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출신 우성 박용만 저서
‘국민개병셜’ 114년만 첫 완역
해외 한인 독립군 양성에 활용
스카우트 소개한 부록 첫 공개
변절설 유통 과정 밝힌 논문도
최근 국문학 등 업적 연구 속도

철원 출신 우성 박용만(1881~1928·사진)은 일본, 미국, 러시아, 중국 등지에서 활동하며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한 지도자급 독립운동가다. 칼을 찬 무장항일투쟁론자로 알려진 그는 이승만, 안창호와 더불어 미주 3대 지도자로도 꼽힌다. 그러나 이같은 역사적 위상이나 활동상에 비해 관련 사료 발굴이나 연구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올해, 박용만의 첫 책이자 대표 저서인 ‘국민개병셜’이 114년 만에 한애라·조정민 연구자의 역주로 다시 발간됐다.

미국 컬럼비아대 도서관 소장본과 감리교신학대 도서관 소장본을 비교 연구한 책이다.

‘국민개병셜’은 1911년 대한인국민회 기관지인 ‘신한민보’에서 출간돼 미주와 하와이, 간도와 연해주에 있는 재외 한인사회의 교육서로 사용된 독립운동 방략서다.

국민 모두가 애국심으로 뭉친 군사가 돼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담겼다. 신흥강습소, 신흥무관학교, 명동학교 등에서 교재로 쓰이며 한인 독립군 양성에 활용됐고, 독립의식을 고취했다.

이처럼 중요한 책이지만 그간 ‘국민개병셜’은 원본을 찾지 못하고 1945년 LA에서 발간된 신문 ‘독립’에 연재된 본문만 활용됐던 만큼 책 발간의 의미가 더 큰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박용만이 직접 쓴 ‘자서’와 ‘부록: 영미양국의 아동군’은 이번 역주본을 통해 처음 공개됐다. 그간 학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내용으로 영미의 초기 스카우트 운동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철원에서 활동하며 박용만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한애라 역사학자는 해제를 통해 박용만의 생애와 활동을 집중 조명했다. 한 연구자의 외가가 박용만의 집안이기도 해서 눈길을 끈다. 한 연구자가 어렸을 때 외갓집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가 있을 때마다 박용만 선생의 이야기를 나누던 기억이 남아 있다고 한다.

정치사상가, 국문학자, 언론인으로서 박용만에 대한 수식어는 ‘최초’의 연속이다. 1908년 최초의 해외 한인독립운동단체 대표자 모임인 애국동지대표자대회를 개최했고, 1909년 해외 최초 독립군 장교 양성기관인 한인 소년병학교를 설립했다. 1911년 미주 한인사회의 대표적 신문인 ‘신한민보’의 주필을 맡아 최초로 임시정부 필요성을 주창하기도 했다.

저자들은 박용만에 대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구상하고, 자신이 한 말을 실천으로 끝까지 지킨 민족지도자로 평가한다. 일제에 빼앗긴 조국을 구하는 독립운동 방책으로 국민개병설을 주창한 것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국민 책임이라는 그의 사상은 책 첫 문장부터 드러난다.

“군사를 기르는 일은 국민의 빚진 것이요, 나라를 방비하는 것은 국민의 의무이니 오늘날 전쟁은 국민 전체의 전쟁이요. 한 조정이나 한 임금의 전쟁이 아니라. 그런고로 그 이김엔 국민이 그 이를 누리고 그 패함엔 국민이 그 화를 받고 결단코 국민 이외에 다른 물건이 있어 그 사생과 화복을 대신하여 맞지 않는 바라.”

그간 박용만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소외된 편이었지만, 최근 국문학계의 조명을 받는 등 연구에 속도가 붙고 있다. 현재 추서된 건국훈장 대통령장보다 상격을 높여 대한민국장을 수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외무총장으로 선임된 박용만은 임시정부에 취임하지 않고 군사주의에 입각한 활동을 전개, 임시정부와 결별한 이력이 있으며 1928년 의열단원 이해명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 연구자는 최근 ‘독립운동가 박용만 피살사건 재판의 배경과 전개’라는 논문을 통해연구자는 박용만 변절설의 유통 과정도 소개 했다. 박용만은 임시정부 반대파의 대표 인물로 계파 갈등의 중심에 서 있었지만, 그 죽음의 실상은 계획된 처단이 아닌, 우발적 사건으로 인한 허망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도 전한다.

한 연구자는 “박용만 변절설 유통의 시작은 결국 총독부 경무국이고 여기에 독립운동가들이 휘말렸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용만은 이미 1904년부터 공화주의를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 방향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김진형 formation@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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