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만든 세계 골프의 명작… 연간 12만 개 공 빠지는 ‘악마의 홀’로
2025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파3 홀’로 꼽히는 17번 홀(파3)의 치명적인 위험을 또다시 증명했다. 3라운드가 열린 15일 오후(현지 시각) 대회 코스인 TPC 소그래스 스타디움 코스(미 플로리다주 폰테 베드라비치)에 최대 시속 48km의 강풍이 몰아치자, 사방이 물로 둘러싸인 아일랜드 홀인 17번 홀은 말 그대로 ‘악마의 홀’로 돌변했다. 이날 평균 타수 3.36타로 18개 홀 중 세 번째로 어려웠다. 세계 정상급 선수들이 출전해 ‘제5의 메이저’라 불리지만 이날 단 5명만 버디에 성공했다. 보기는 15개, 더블보기는 8개나 속출했다. 이날 146야드로 세팅돼 주말 골퍼도 8번이나 9번 아이언으로 올릴 만한 만만한 거리지만,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예측할 수 없는 17번 홀 앞에서 골퍼들은 자신의 운을 하늘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최진하 전 KLPGA투어 경기위원장은 “17번 홀은 우연히 만들어진 세계 골프의 보석 같은 명작”이라고 했다. 그는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킹스칼리지런던 대학원을 수료한 정치학도로 출발해 출판 업계에서 골프의 역사와 규칙에 흥미를 느껴 골프 박사가 된 독특한 이력을 지녔다.
TPC 소그래스의 스타디움 코스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첫째로, TPC(Tournament Players Club)라는 용어는 소위 프로 대회(Tournament)에 출전하는 선수(Players)들을 위해 만든 전용 코스를 의미한다. 현재 PGA 투어에는 30여 개의 TPC가 조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최초로 만든 코스가 TPC 소그래스다. TPC 소그래스에는 PGA 투어의 본부도 들어서 있다.
둘째로 스타디움 코스라는 용어는 갤러리(미국에서는 관람객이라는 의미로 spectators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들이 최고의 프로들이 경연하는 장면을 직관할 수 있도록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좌석이 코스 곳곳에 조성된 코스를 뜻한다. 의자가 계단식으로 들어차 있는 스탠드 좌석이 아니라 잔디 좌석이다. 홀을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도록 티잉 구역 주변, 페어웨이 둘레나 그린 주위에 언덕(mounds)을 쌓아서 만들었다. 따스한 햇볕을 쬐며 잔디 언덕에 앉거나 비스듬하게 누워서 세계 최고의 프로들이 샷 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묘미는 소름이 돋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1974년부터 개최되었다. 원래 대회의 명칭은 토너먼트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었고, 1987년부터 지금처럼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라고 불리고 있다. 1982년부터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은 TPC 소그래스 스타디움 코스에서 개최되고 있다. 1980년에 개장된 스타디움 코스에서 열린 1982년 대회에서 아놀드 파머, 니클라우스와 트레비스 등 당대의 메이저 타이틀 보유자들이 컷 탈락했다.
피트 다이와 앨리스 다이 부부가 설계한 스타디움 코스에 대한 출전 프로들의 불만과 악평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 중 압권은 마스터스 우승자인 벤 크렌쇼의 평가다. 벤 크렌쇼는 스타디움 코스를 다스 베이더가 만든 코스라고 단언했다. 스타디움 코스의 설계자인 피트 다이를 스타워즈의 빌런인 다스 베이더에 비유했다. 점잖은 신사의 대명사로 통하는 톰 와슨도 스타디움 코스가 농담(joke) 같다고 평한 바 있다. 25명의 프로가 80타 이상을 쳤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TPC 소그래스가 들어선 지역은 방울뱀이 득실대던 습지대 정글이었다. PGA 투어가 지역의 독지가들로부터 단돈 1달러에 기증받은 땅이었다. 습지를 호수로 만들고 흙을 퍼올려 언덕을 만들면서 갤러리 친화적인 코스를 조성했다. 17번 파3 홀은 한쪽 면만 조그마한 연못이 있는 단순한 홀로 설계되었다. 우연히 17번 홀의 퍼팅그린 예정 부지 주변에만 양질의 모래가 있어서 파내어 다른 홀들에 사용하다 보니 코스가 완성될 즈음에는 분화구처럼 그 주변이 넓고 큰 공터가 생겨났다. 설계에는 없던 난감한 상황에서 앨리스 다이가 공터를 물로 채워서 아일랜드 그린으로 조성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스타디움 코스의 시그니처 홀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우연히 17번 파3 홀이 사방으로 물로 채워졌다.
스타디움 코스의 17번 파3 홀은 아일랜드 그린으로 불린다. 실제로는 섬(island)은 아니다. 한반도처럼 반도(peninsula) 모양이다. 퍼팅그린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가느다랗게 조성되어 있어서 다른 홀과 연결되고 있다.
17번 파3 홀의 퍼팅그린은 사과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앞뒤와 좌우 폭은 30야드가 안 된다. 처음의 설계대로 그린 뒤쪽이 물로 향하도록 내리막 경사로 만들어졌다면 경기가 상당히 지체되었을 것이나 다행스럽게 설계와는 다르게 그린 뒤쪽이 올려졌다. 초기에 바람 없는 날에 볼을 4개씩이나 물에 빠트린 프로는 바람이 불면 17번 홀은 경기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대회가 취소될 지경이라는 불평을 터뜨렸을 정도였다. 이 홀에서 최악의 점수는 12타로 정규 타수보다 9타나 더 쳤다.
17번 파3 홀은 150야드 이내로 세팅된다. 대체로 137야드에서 147야드로 세팅된 티잉 구역에서 프로들은 웨지나 9번 아이언으로 티샷한다. 그렉 노먼은 이 홀을 142야드로 세팅된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파3 홀로 꼽았다. 짧은 홀치고는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로 TPC 소그래스 스타디움 코스에서 가장 어려운 홀은 237야드로 세팅되는 8번 파3 홀이다. 이 홀에서 프로들은 페어웨이 우드로 티샷하기도 한다.
17번 파3 홀은 전형적인 벌칙형 홀이다. 티샷이 갈 곳이라곤 세 군데뿐이다. 그린에 볼을 올리지 못하면 조그만 항아리형 벙커나 물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인구에 회자하는 가장 유명한 장면은 1999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1라운드에서 나왔다. 프레드 커플스의 티샷은 물에 빠졌다. 앞으로 나가서 드롭존을 사용하는 대신 프레드 커플스는 다시 티업하고 3타째를 쳤다. 그 볼이 덩크 샷으로 홀인 되었다. 홀인원은 아니고 파다. 유명한 장면이다.
17번 파3 홀에서의 관건은 바람이다. 17번 홀의 티잉 구역에서 살펴볼 때, 그린 주변의 물이 잔잔하면 맞바람이 부는 것이고, 물결이 친다면 뒷바람이 부는 것이다. 그러나 우측 호수 위에 서 있는 큰 나무 때문에 공중 바람은 휘몰아 돌고 그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2025년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1라운드에 17번 홀은 146야드로 세팅되어 3.11차의 평균 타수로 난도 7위, 2라운드는 128야드로 평균 2.923타, 난도 11위였으나 바람불었던 3라운드는 146야드로 세팅되어 평균 3.36타로 난도 3위였다. 이처럼 바람은 이 홀에서의 난도를 결정하는 열쇠다.
17번 홀은 짧은 파3 홀이지만 클럽 선택이 어렵다. 몇 타 차이의 선두냐는 별 의미가 없다. 이 홀에서의 점수는 순식간에 더블 보기 이상일 수 있다. 즉, 버디(2타)에서 콰드러플 보기(7타)까지 언제나 가능한 홀이다. 게다가 17번 홀이다. 실수를 만회할 홀이 한 홀밖에 없다.
단순한 웨지 샷 실수가 우승 가능성을 날려버릴 수 있다. 마스터스가 열리는 오거스타 내셔널의 아멘 코너 중 12번 홀(파3 홀)은 인 코스의 3번째 홀이다.
이 홀도 짧은 파3 홀이고, 이 홀에서의 실수로 마스터스 우승자가 갈린다. 그래도 실수를 만회할 6홀이 남아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TPC 소그래스의 17번 홀은 마지막 홀 바로 앞에 있다. 한 번의 웨지 샷 실수는 리더보드에서의 탈락을 의미한다. 그걸로 끝장난다. 가혹하다. 그럼에도 우승자라면 137야드 거리에서의 웨지 샷 테스트를 통과해야 자격이 있지 않으냐는 반론도 나온다.
플레이어스 챔피언십이 열리는 TPC 소그래스 스타디움 코스의 17번 홀은 마지막 챔피언조가 일요일 오후 3시쯤 통과할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일요일 오후 3시의 약속이라고 불린다. 이 미팅 결과에 따라서 챔피언십의 향방이 달라진다. 우승을 다투는 프로들은 싫어할지라도 갤러리나 TV 시청자들은 즐겁기만 하다. 라운드마다 평균 12개의 티샷이 물에 빠진다. 50개의 볼이 물에 빠진 적도 있었다. 최고의 프로들이 곤경에 빠지는 장면에 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린에 티샷을 올린 프로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는 장면은 갤러리와 시청자를 웃음 짓게 한다. 흥미진진한 드라마가 펼쳐지는 이 17번 홀에는 12대 이상 카메라가 설치된다.
명작은 우연히 탄생하기도 한다. TPC 소그래스의 스타디움 코스 17번 홀은 페블비치 7번 홀, 오거스타 내셔널의 12번 홀에 당당하게 견줄만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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