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명 "국민 개-돼지로 보던 전두환 역,처음에 거절한 이유는..."
[이선필 기자]
▲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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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유재명은 '다행'이라는 표현을 몇 차례 사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10.26 군사 반란의 전말이 아닌 두 개인의 사연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자칫 유재명의 전상두가 강조될 경우 이야기의 균형감이 깨질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 차례 역할을 거절한 이유기도 하다.
"전두환, 악당이라는 단어만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인물"
계엄령 정국에 군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항소도 하지 못한 채 내란죄(대통령 암살) 명목으로 16일 만에 형장의 이슬이 된 박태주 대령(이선균). 그리고 그를 변호한 정인후 변호사(조정석). 이 두 캐릭터 사이에서 전상두는 자칫 기능적으로 소모될 여지가 있어 보였다. 출연 제안을 한 차례 거절했던 유재명은 "돌아서니 자꾸만 잔상이 남았다"라는 이유로 영화에 합류했다.
"전상두라는 인물이 10.26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고, 어떤 작전을 펼쳤는지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 솔직히 두세 장면 더 있었으면 싶었다. 제게 주어진 분량은 순간순간을 끊어서 보여드리는 게 전부였거든. 만약 이 작품이 밀실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모색하는 검은 권력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저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전상두를 표현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전상두는 다분히 상징성이 강한 인물이었고, 뒷짐 지고 돌아서는 모습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제 연기를 보는 게 조마조마했다. 골프장 장면이 나오기 전까진 박태주와 정인후를 따라가는 인물이었거든. 결과물을 보니 솔직한 말로 다행이다 싶었다. 내 순간 이기심으로 이야기의 균형감을 깨뜨리지나 않을까 싶었거든. 기발한 상상력, 시대를 넘나드는 영화도 좋지만 이렇게 개인에게 켜켜이 쌓은 고뇌를 통해 시대를 보여주는 것 또한 영화의 본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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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두는 서사가 잘 안 보여서 고민했을 뿐이지, 전두환이라서 고민한 게 아니었다. 김국호가 본성적으로 악인이라면 전상두는 좀 다른 게 엘리트였잖나.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장군이 됐고, 자신의 힘으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박정희나 노태우도 그렇고, 이런 사람들을 단순히 악인이라고 표현할 순 없을 것 같다. 한국 현대사에서 엄청난 위치를 차지하잖나. 어떤 평론가는 흑화된 영웅이라는 글을 쓰시기도 했는데 영화를 보신 분들이 좀 다른 표현들을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배우 조정석, 그리고 이선균을 기억하다
정중동이었던 전상두가 유일하게 단 한 번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장면이 하나 있다. 영화 후반부, 정인후 변호사가 절망감을 안고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고 있는 전상두를 찾아가는 장면이다. 제발 박태주 대령을 살려달라는 애원을 전상두는 가볍게 무시하며 최고의 조롱과 굴욕을 안긴다. 약 10분 분량의 해당 장면을 위해 배우들은 3일간 반복해서 연기했다고 한다.
"사실 면전에 대고 욕하는 정인후를 그냥 총으로 죽일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정말 단순한 악인이 된다. 하지만 전상두는 끝까지 듣는다. 그리고 '나 정도면 (왕이 될) 자격 있는 거 아냐?'라고 반문한다. 그 오만함, 그래서 영화를 본 어떤 분들은 더 악마 같다고 하시더라. 박정희처럼 전두환 또한 스스로를 그렇게 정당화시킨 게 아니었을까. 지독한 권력욕을 그 장면에서 표현하는 게 목표였다.
정인후와 처음 대면하는 장면도 중요했다. 실수로 뒤집힌 명찰을 찬 그를 보고 전상두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아주 고급스러운 조롱을 던진다. '변호사라는 양반이 그러나?'라고. 이 단순한 말로 그를 인간 대접하지 않는 모습,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실제로 마음만 먹으면 정인후를 몇 번이든 죽일 수 있었는데 고문만 하고 살려두잖나. '한번 놀아봐. 난 위에서 널 조종할테니'. 그 비릿한 조소, 씩 웃고 마는 모습을 통해 그 시대의 검은 권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영화 <행복의 나라>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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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닿지 못한 행복의 나라
▲ 영화 <행복의 나라>에서 10.26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상두를 연기한 배우 유재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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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선 편집됐지만, 전상두가 박태주에게 가족 사건을 던져주면서 했던 말이 있다. '네가 내 밑에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라는 대사다. 관객 입장에선 분노할 말이지.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말이거든. 야만이라는 게 그런 것 같다. 현재에도 앞으로도 어떤 권력자들은 그런 모습을 보일 것이다. 대체 왜 그런 이들이 나오는지는 역사학자나 사회학자들께서 정의해주시면 좋을 것 같다. 다만 우린 그 사소한 예의 없음이, 그 조그만 배려 없음이 얼마나 인간을 짓누르는지를 알고 함께 분노해야 한다."
인터뷰 말미 그는 영화에서 하숙집 딸로 분한 배우 진기주, 박태주 대령의 아내를 연기한 강말금 배우를 비롯해 변호인단 역할을 수행한 여러 배우들 이름을 언급했다. "좋은 배우들과 함께 현장을 경험한 게 큰 기쁨이었다"며 그는 용기를 내서 이 영화를 개봉시킨 분들께도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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