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흑인' 인어공주가 좋다
[조은결 기자]
어려서부터 인어공주는 내 최애 영화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엄마 지인 중 비디오 가게를 하는 분이 비디오 몇 개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걸 질릴 줄도 모르고 동생이랑 수십 번을 봤다. 그중 하나가 <인어공주 2> 였다. <인어공주 2>는 엄마가 된 인어공주와 그 딸의 이야기다. 그때 접한 첫 인어공주는 집안 대대로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세상을 꿈꾸고 또 그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용감한 캐릭터였다.
2023년, 실사화된 <인어공주>가 개봉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그대로지만, 현시대에 맞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수정되었다. 특히 인어공주 에리얼이 가진 왕자 에릭에 대한 감정보다 바다 위 세상에 대한 욕망이 두드러진다. 흥행 성적도 좋지만, 어쩐지 인터넷에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무관한 혹평이 쏟아진다.
▲ 영화 <인어공주> 스틸 이미지. |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에리얼은 왕자를 만나기 전부터 바다 위 세상을 꿈꿨다.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 엄격한 아버지가 막아서도 소용없다. 에리얼은 혐오로 그은 선을 넘기를 꿈꿔왔으니까. 에리얼이 부르는 'Part of Your World'는 왕자가 있든 없든 바다 위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에리얼은 왕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바다 위 세상을 사랑해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낸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울슐라의 첫 제안을 거절했던 에리얼은 평생 바다에만 갇혀 살라는 도발에 위험한 계약을 감행한다.
모든 여정이 끝나고, 에리얼 앞에 나타난 아버지 트라이튼은 말한다. "네 뜻을 전하기 위해 네 목소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어(You shouldn't have had to give up your voice to be heard)"라고. 이 말은 영화 안팎으로 의미가 깊다.
여성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이 겪은 침묵의 역사에 대해 말해왔다. 그는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에 대한 폭언, 사이버에서 이루어지는 협박 등이 결국은 '우리 놀이터에서 꺼져'와 같은 의미라고 지적한다. 실사화된 <인어공주>의 캐스팅 이슈가 기사화되자, 온갖 부정적 반응이 쏟아졌다. '못생긴' '흑인' 인어공주는 그들의 놀이터에서 놀 수 없다는 말이 다양한 표현으로 퍼졌다. 익숙한 아름다움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짜 취급받아 온, 등장 자체를 거부당해온, 소수자들은 '흑인 인어공주'의 등장을 축하할 새도 없이 목소리를 잃었다.
▲ 인어공주 스틸컷 영화 <인어공주> 스틸 이미지. |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
개인적 선호나 표면적 이유 뒤에 숨은 차별을 구분해 내기란 어렵다. 때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가진 이유가 차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걸 차치고라도, 전형적인 미를 갖춘 백인 인어공주는 대체 누구를 위해 좋은가 하는 의문 정도는 품어보길 바란다.
다 큰 어른들이 '나의 인어공주는 이런 게 아냐!' 하고 징징대는 동안 수많은 비백인 아이들은 이입할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미디어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을 해왔다. 인어공주는 절대 흑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인어공주는 반드시 흑인이어야 했다.
용기를 낸 캐스팅, 흥행에도 불구하고 '흑인' 인어공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하다. 영화 속 에리얼은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영화 밖 에리얼들은 그러지 못한다. 자발적인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면 결국 침묵 '당할' 게 두려워서. 겨우 영화 하나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받을 게 무서워서.
나는 인어공주가 좋다. 인어공주가 흑인이라서, 왕자 보다는 세상을 꿈꿔서,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이유로 인어공주가 좋다. 디즈니의 다양성을 싫어하는 목소리가 괜찮다면, 디즈니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목소리도 괜찮아야 한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도 공격받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여성혐오, 수동적 여성상의 상징이었던 인어공주는 2023년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되찾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아 재탄생했다. 영화는 잘 모르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말고, 낯선 세계로 들어서라고 말한다. 무지로 그은 선 너머로 나아가, 침묵 당해야 했던 목소리를 되찾으라고 잔뜩 웅크린 이들을 격려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시도로 흑인 인어공주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이제 흑인 인어공주가 있는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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