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흑인' 인어공주가 좋다

조은결 2023. 5. 3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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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영화 <인어공주>

[조은결 기자]

어려서부터 인어공주는 내 최애 영화 중 하나였다. 어릴 때 엄마 지인 중 비디오 가게를 하는 분이 비디오 몇 개를 선물로 주셨는데 그걸 질릴 줄도 모르고 동생이랑 수십 번을 봤다. 그중 하나가 <인어공주 2> 였다. <인어공주 2>는 엄마가 된 인어공주와 그 딸의 이야기다. 그때 접한 첫 인어공주는 집안 대대로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은 세상을 꿈꾸고 또 그 세상으로 몸을 던지는 용감한 캐릭터였다.

2023년, 실사화된 <인어공주>가 개봉했다. 전반적인 내용은 그대로지만, 현시대에 맞지 않는 몇몇 장면들이 수정되었다. 특히 인어공주 에리얼이 가진 왕자 에릭에 대한 감정보다 바다 위 세상에 대한 욕망이 두드러진다. 흥행 성적도 좋지만, 어쩐지 인터넷에는 영화의 완성도와는 무관한 혹평이 쏟아진다.

세상을 사랑한 공주의 이야기
 
 영화 <인어공주> 스틸 이미지.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에리얼은 왕자를 만나기 전부터 바다 위 세상을 꿈꿨다. 자신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 엄격한 아버지가 막아서도 소용없다. 에리얼은 혐오로 그은 선을 넘기를 꿈꿔왔으니까. 에리얼이 부르는 'Part of Your World'는 왕자가 있든 없든 바다 위 세상을 갈망하는 마음을 잘 보여준다.

에리얼은 왕자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바다 위 세상을 사랑해서 그 모든 위험을 무릅쓸 용기를 낸다. 왕자와의 사랑을 이루기 위한 울슐라의 첫 제안을 거절했던 에리얼은 평생 바다에만 갇혀 살라는 도발에 위험한 계약을 감행한다.

모든 여정이 끝나고, 에리얼 앞에 나타난 아버지 트라이튼은 말한다. "네 뜻을 전하기 위해 네 목소리를 포기할 필요는 없어(You shouldn't have had to give up your voice to be heard)"라고. 이 말은 영화 안팎으로 의미가 깊다.

여성운동가 리베카 솔닛은 여성들이 겪은 침묵의 역사에 대해 말해왔다. 그는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에 대한 폭언, 사이버에서 이루어지는 협박 등이 결국은 '우리 놀이터에서 꺼져'와 같은 의미라고 지적한다. 실사화된 <인어공주>의 캐스팅 이슈가 기사화되자, 온갖 부정적 반응이 쏟아졌다. '못생긴' '흑인' 인어공주는 그들의 놀이터에서 놀 수 없다는 말이 다양한 표현으로 퍼졌다. 익숙한 아름다움과 다르다는 이유로 가짜 취급받아 온, 등장 자체를 거부당해온, 소수자들은 '흑인 인어공주'의 등장을 축하할 새도 없이 목소리를 잃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인어공주를 싫어하는 수많은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흑인이 주인공이라서 싫은 게 아니고'로 시작하는 문장 뒤에는 저마다의 이유가 쏟아져 나온다. 주연을 맡은 할리 베일리가 자신이 생각한 인어공주가 아니라는 말에, 그들이 생각한 인어공주가 누군지 물으면 전형적인 미를 갖춘 백인 여성을 말한다. 그리고 꼭 다시 한번 차별이 아니라고 덧붙인다. 그리 낯선 모순은 아니다. 원래 차별에도 이유가 달린다.
 
▲ 인어공주 스틸컷 영화 <인어공주> 스틸 이미지.
ⓒ 월트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개인적 선호나 표면적 이유 뒤에 숨은 차별을 구분해 내기란 어렵다. 때로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가진 이유가 차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걸 차치고라도, 전형적인 미를 갖춘 백인 인어공주는 대체 누구를 위해 좋은가 하는 의문 정도는 품어보길 바란다.

다 큰 어른들이 '나의 인어공주는 이런 게 아냐!' 하고 징징대는 동안 수많은 비백인 아이들은 이입할 주인공을 찾지 못하고 미디어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을 해왔다. 인어공주는 절대 흑인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에, 인어공주는 반드시 흑인이어야 했다.

용기를 낸 캐스팅, 흥행에도 불구하고 '흑인' 인어공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조용하다. 영화 속 에리얼은 목소리를 되찾았지만, 영화 밖 에리얼들은 그러지 못한다. 자발적인 침묵을 깨고 목소리를 내면 결국 침묵 '당할' 게 두려워서. 겨우 영화 하나를 좋아한다고 했다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받을 게 무서워서.

나는 인어공주가 좋다. 인어공주가 흑인이라서, 왕자 보다는 세상을 꿈꿔서, 정확히 어떤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싫어하는 것과 같은 무수한 이유로 인어공주가 좋다. 디즈니의 다양성을 싫어하는 목소리가 괜찮다면, 디즈니의 다양성을 사랑하는 목소리도 괜찮아야 한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도 공격받지 않고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여성혐오, 수동적 여성상의 상징이었던 인어공주는 2023년 소수자들이 목소리를 되찾기를 바라는 메시지를 담아 재탄생했다. 영화는 잘 모르는 존재를 두려워하지 말고, 낯선 세계로 들어서라고 말한다. 무지로 그은 선 너머로 나아가, 침묵 당해야 했던 목소리를 되찾으라고 잔뜩 웅크린 이들을 격려한다.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시도로 흑인 인어공주가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이제 흑인 인어공주가 있는 세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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