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과 검모잠의 한성 고구려국 - 고구려 부흥전쟁 (4)
[고구려사 명장면-131] 한국사 교과서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에 대한 서술을 보면 단지 안승과 검모잠이 등장할 뿐이다. 관련 문헌 자료가 워낙에 얼마 되지 않기도 하지만, 그나마 이 두 인물에 대한 기록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신라본기'에 한 줄이나마 고연무의 오골성 전투가 전해지고, 근래에 발견된 유민 묘지명의 단편에서 부여와 책성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있었다는 분위기라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스럽다.
유민 묘지명 등 여러 기록을 보면 고구려 영역 곳곳에서 부흥전쟁이 전개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중국 측 기록을 보면 한반도 내 안승과 검모잠의 부흥운동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을 뿐이다. 당 조정은 검모잠 등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670년 4월에 고간(高偘)을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行軍總管)으로, 말갈 장군 이근행(李謹行)을 연산도(燕山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정벌군 4만명을 편성해 투입하였다. 왜 이렇게 당 조정은 안승과 검모잠의 움직임에 예민하게 반응하였을까? 몇 가지 점을 추정하고 있다.
먼저 안승과 검모잠이 고구려 복국(復國)을 내세웠기 때문이라는 견해다. 안승 등이 고구려 부흥을 표방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요동은 물론 부여와 책성 등 다른 지역 부흥전쟁이 고구려 부흥을 외치지 않고 단지 반당(反唐)운동에 머물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보장왕의 외손(外孫)임을 내세우는 안승이라는 혈통상 명분을 갖춘 인물이 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 부흥운동 보다 명분상의 강점이 있기는 있다. 그렇지만 안승 등이 아직 다른 지역 부흥전쟁의 구심점이 되었다는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안승이라는 인물 자체가 당에 위협적인 존재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면 안승이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부터 살펴보자. '삼국사기'에는 안승(安勝)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 측 기록에는 안순(安舜)으로 표기되어 있다. 서로 통하는 이름이기 때문에 굳이 따져볼 필요는 없다. 안승의 혈통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제각각인데, 보장왕의 서자(庶子), 또는 손자, 보장왕의 외손, 연정토의 아들 등이다. 이중 보장왕의 외손이며 연정토의 아들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연정토는 연개소문의 동생으로서 아마 연개소문이 집권한 뒤에 보장왕의 딸과 혼인하여 안승을 낳았을 것으로 보인다. 연정토는 고구려 최말기에는 동해안 비열홀(지금의 안변) 일대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들 사이에 분란이 벌어지자 666년 12월에 휘하의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 뒤 669년 2월에 안승이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한 것도 아버지 연정토의 투항 소식을 이미 알고 아버지의 예를 따랐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앞선 추정이 옳다면 이때 안승은 20대 중반의 나이였을 것이다.
668년 9월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왕족 대부분은 보장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 갔는데, 이때 안승은 평양성에 머무르지 않았던 것인지, 혹은 보장왕의 외손이라서 당군이 파악한 왕족 범주에서 빠져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안승은 당군의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하였다. 그리고 669년 4월 고구려 지배층에 대한 대규모 사민이 있기 전인 669년 2월에 신라로 탈출하였으니, 당으로 끌려가지 않은 고구려 왕족으로 보장왕의 혈통과 연결되는 유일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검모잠이 고구려 부흥을 추진하면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한 것은 명분상으로 당연하다. 하지만 동시에 안승이 고구려를 멸망으로 몰아넣은 연개소문 가문 출신이라는 점에서 보면, 다른 부흥운동 세력들에도 과연 고구려 복국에 합당한 정통성을 갖는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둘째로 검모잠 등이 평양에서 거병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들의 부흥운동이 평양에서 시작했는지는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 설사 평양에서 거병했다고 하더라도, 전회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3만호 가까운 지배층을 강제 사민시켜 평양 일대를 공백으로 만들어 놓고, 당의 안동도호부조차 요동의 신성(新城)으로 옮겨 놓은 마당에 평양에서 거병했다는 점이 과연 당 조정을 긴장시켰을지 의문이다. '신라본기'에는 검모잠의 행적에 대해 중국 측 기록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문무왕 10년(670년) 6월에 고구려 수림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해 갔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받들었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아뢰어 말하길(하략)."
짧은 문장이지만 검모잠의 부흥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짚어볼 대목이 적지않다. 먼저 수림성, 궁모성, 사야도, 한성 등 지명이 언급되고 있는, 한성은 지금의 황해도 재령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 3경(京)의 한 곳이다. 이외 수림성, 궁모성, 사야도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지만 대략 검모잠의 행적을 그려볼 수는 있겠다.
검모잠이 패강 남쪽에서 살해한 당 승려 법안은 전해인 669년 2월에 신라에 와서 자석을 구해 보내라는 당고종의 명을 전달했던 인물이다. 당시 자석은 부상자의 지혈제로도 사용되었다. 신라가 자석 두 상자를 구해 당에 보낸 때가 그해 5월이었는데, 법안이 670년 6월 이전 검모잠에게 살해될 때까지 1년여 넘게 신라 혹은 한반도 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어쨌든 670년 6월 이전에 이미 사민이 이루어져 공백지대로 되어 있던 평양 일대에서 무언가 활동을 하였던 점은 분명하며, 그것이 단순히 승려로서 종교적인 행위가 아닌 당의 한반도 정책과 관련된 활동이었을 것이다. 즉 검모잠 입장에서 볼 때 법안의 행위가 매우 적대적이었기에 법안과 당의 관리를 살해했다고 짐작된다. 안동도호부가 신성으로 옮겨지고, 대규모 사민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당은 평양 일대에서 남은 주민들에 대한 회유와 같은 소극적 정책을 지속하고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음 검모잠은 애초에는 신라로 투항하기 위해서 남하하였는데, 사야도에 머물고 있던 안승을 만남으로써 발길을 돌려 한성에서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세우고 고구려 부흥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사야도를 지금의 강화도 일대가 아닌가 추정한다. 669년 2월에 안승이 4000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승은 이듬해 초까지 사야도에 피신해 있었던 것이다. 아마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는 당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입장에서 안승이라는 존재를 사야도에 숨겨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처음부터 계획되었다기보다는 신라로 남하하는 과정에서 안승과 조우하는 등 정세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검모잠이 안승을 내세워 고구려 복국을 도모한 한성은 평양성, 국내성과 더불어 고구려 3경 중 한 곳이다. 고구려 전기 내내 도성이었던 국내성과는 달리 한성은 6세기 이후 고구려 남방 정책의 중심지로서 성장한 신흥 부도읍이었다. 따라서 한성 일대 귀족들도 당의 사민정책의 대상이었을 것이지만, 평양성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그 피해가 적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669년 2월에 안승이 거느린 4000여 호가 한성의 주민들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그렇다면 검모잠이 처음 평양에서 부흥운동을 시작하였다는 견해는 따르기 어렵다.
검모잠과 안승이 한성에서 다시 고구려국을 세울 수 있었던 기반도 다시 한성으로 돌아온 이들 4000여 호가 힘입은 바가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단 신라에 투항했던 안승과 주민들이 한성에서 고구려국을 부흥하기 위해서는 신라가 이를 묵인하거나, 나아가서는 알게 모르게 후원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위 '신라본기' 기사대로 검모잠과 안승이 고구려를 복국하고 곧바로 6월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지원을 호소한 점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신라 문무왕은 7월에 한성으로 사신을 보내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였다. 668년 당이 멸망시킨 고구려를 잇는 한성 고구려국을 신라의 제후국으로 공식 인정한 것이다. 이는 당에 대해 신라가 우회적으로 적대적 태도를 취한 셈이다.
당이 검모잠과 안승의 부흥운동에 대해 예민하게 대응했던 이유는 바로 그 배후에 신라의 반당적 태도가 있음을 간취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전쟁과 짝하여 나당전쟁 역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한반도에는 다시 전쟁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하였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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