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 지각변동 ‘어려운 노래’ 뜨나 [콘텐츠의 순간들]

김윤하 2025. 4. 2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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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케이팝 음악계에서는 세계 무대를 겨냥한 이지리스닝이 각광받았다. 최근 엔믹스가 내놓은 복잡한 앨범이 호평받으면서 다시 하드리스닝이 떠오르고 있다.
3월17일 미니 4집 <Fe3O4: FORWARD>를 발표한 걸그룹 엔믹스. ⓒJYP엔터테인먼트 제공

3월17일, 그룹 엔믹스(NMIXX)가 발표한 미니 4집 〈Fe3O4: FORWARD(에프이쓰리오포: 포워드)〉를 둘러싼 반응이 심상치 않다. 골수 케이팝 팬도, 전 세계 페스티벌을 휘젓고 다니는 음악 마니아도 똑같은 반응이었다. 최근 몇 년간 손에 꼽을 만한 웅성거림에 한 번, 그 대상이 엔믹스여서 또 한 번 놀랐다. 2022년 2월 데뷔해 올해로 만 3년을 꽉 채워 활동한 엔믹스는 아쉽게도 대대적으로 대중에 회자된 일이 드문 팀이다. 아는 사람은 아는 실력파라는 해설을 빼면, 데뷔 6개월 전 멤버는커녕 그룹명도 공개하지 않은 채 앨범 한정판을 예약 판매했던 소속사(JYP엔터테인먼트)의 패기나 ‘믹스팝(mixxpop)’이라는, 데뷔 후 이들 뒤를 줄곧 따라다니는 알쏭달쏭한 용어만 남는다. 어떤 것도 케이팝 저관여층의 흥미를 쉽게 끌 만한 요소는 아니다.

그렇게 심드렁한 이들의 관심을 끈 건, 다름 아닌 앨범 〈에프이쓰리오포: 포워드〉에 담긴 음악이었다. 발매 전 공개된 ‘하이라이트 메들리’로 이미 기대감을 드러낸 이들은 앨범 전곡 공개와 동시에 대부분 만족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마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듣고 ‘어디서 또 잘 빠진 팝 트랙으로 채운 앨범 하나 가져왔구나’라고 짐작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웬걸, 엔믹스의 새 앨범은 그런 느슨한 추측의 정반대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부류의 작품이었다.

첫 곡 ‘하이 호스(High Horse)’부터 그렇다. 케이팝이라기에는 꽤 어둡고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와 브레이크비트 사이를 두터운 질감으로 뽑은 해원과 배이의 목소리가 천천히 헤집고 나온다. 곧바로 갑작스레 내리꽂히는 눈부신 빛처럼 규진의 목소리가 쏟아지다가는 지우, 릴리, 설윤이 차례로 노래의 본 무드를 쌓아간다. 그 뒤를 비호하는 건 기묘한 비트를 타는 베이스와 타악기 샘플이다. 이후로도 노래는 몇 번이나 분위기와 리듬, 조도와 채도를 바꾸다 도입부와 같은 구절로 노래를 마무리한다. 이렇게 복잡다단하게 진행하는 동안 시간은 고작 3분 23초가 지나 있다.

게다가 ‘하이 호스’는 앨범의 색깔을 설명하는 고작 한 조각의 퍼즐일 뿐이다. 첫 곡의 쿨한 온도를 기억하는 힙합 비트를 이리저리 비틀다 힘차게 뻗어나가는 타이틀곡 ‘노 어바웃 미(Know About Me)’를 필두로 수록곡 ‘슬링샷(Slingshot (〈★))’ ‘골든 레시피(Golden Recipe)’ ‘파피용(Papillon)’은 트랩, 래칫 같은 힙합 하위 장르에서 오케스트라 현악 연주까지 거침없이 콜라주한다. 앨범은 멤버들의 하모니를 바람 거센 날 철썩이는 파도처럼 담은 마지막 곡 ‘오션(Ocean)’으로 무사히 연착륙에 성공한다.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전개에 얼얼한 고막을 붙들고 기꺼이 처음으로 돌아가 한 번 더 모험에 도전해보고 싶은 부드러움이다. 

취향을 뒤바꾼 사건, 에스파

이 앨범을 들으며 에스파가 생각난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슈퍼노바’ ‘아마겟돈’ ‘위플래시’ 3연타를 거치며 에스파가 만들어낸 궤적은 단순한 인기몰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에스파는 지난해 6월 이후 사람들의 취향을 완전히 뒤바꿔버렸다. 그 이전, 케이팝의 가장 큰 화두는 ‘이지리스닝’이었다.

케이팝 이지리스닝의 정의는 매우 쉽고 간단했다. 듣는 사람들에게 ‘쉽게’ 들리면, 그걸로 됐다. 우선 형태부터 간소해졌다. 전혀 다른 곡을 최소 두세 개 이어 붙여 만들던 형식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엔 달콤하고 안온한 멜로디와 메시지들이 들어섰다. 노랫말은 대부분 영어였다. 2020년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가 한국 대중음악이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빌보드 핫 100 싱글차트 1위에 오른 뒤로, 이지리스닝은 글로벌을 타깃으로 한 케이팝 가수라면 필수 교양으로 거쳐야 하는 관문이 되었다. 퍼포먼스 때문에 타이틀곡의 복잡함만은 포기할 수 없다면 더블 타이틀이나 스페셜 싱글로라도 꼭 선보여야 했다. 월드 스타로서 일종의 책임이었다.

걸그룹 에스파가 3월29일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빌보드 위민 인 뮤직 어워즈 2025’에 참석했다. ⓒEPA

여러 목표와 야망이 뒤섞여 있었기에, 케이팝 이지리스닝은 영미권 팝 시장에서 사용하는 것과는 당연히 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강렬한 퍼포먼스를 닮아 점차 과격해지는 음악과 복잡한 곡 구성은 케이팝과 대중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든 일등 방해꾼으로 꾸준히 언급되었다. 이지리스닝은 세계를 정복한 케이팝이 부족한 단 하나, 대중을 사로잡기 위한 비기였다. 이렇듯 케이팝 ‘이지리스닝’의 탄생에는 ‘하드리스닝’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놀랍게도 바로 그 ‘하드리스닝’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가 에스파였다. 2020년 발표한 데뷔 싱글 ‘블랙 맘바(Black Mamba)’부터 이들은 쉬운 무언가로 승부하겠다는 안일한 시도를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에스파의 첫 히트곡이었던 ‘넥스트 레벨(Next Level)’부터 그랬다. ‘이지리스닝’이 성공 공식이 되어버린 업계 분위기 속에서 ‘넥스트 레벨’은 튀어도 너무 튀는, 미우나 고우나 에스파만이 할 수 있는 곡이었다.

이후 3년을 꺾이지 않은 뚝심은 기어코 케이팝 신의 흐름마저 바꿔놓았다. 지난해 에스파가 거둔 범접 불가능한 뛰어난 성과에서 올해 초 엔믹스의 호평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흐름은 파도는 아직일지언정 바람의 방향은 확실히 바뀌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여기에 오직 미국 시장을 노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양산형 케이팝 이지리스닝에 대한 염증과 에스파의 말처럼 ‘우린 어디서 왔나’를 고집스레 묻는 케이팝 미식가들의 준엄한 충고가 더해졌다. 이 바람의 변화로 케이팝 하드리스닝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수 있을까. 케이팝의 거대한 지각(地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윤하 (대중음악 평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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