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은 왜 이스탄불 합의에 집착하나 [남문희의 코리아 체스판]

우크라이나 전쟁은 예방전쟁인가, 정복전쟁인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 주장대로 미국과 나토의 위협에서 러시아 안보를 지키기 위한 것이 전부였다면 협상도 그만큼 어렵지 않을 것이다. 반면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정복해 완전 속국화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라면 협상은 쉽지 않을 것이다. 전쟁의 불씨도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예방전쟁이라는 푸틴 대통령 주장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 같다. 집권하면 24시간 안에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다는 주장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현실을 접하며 목하 시각 교정 중이다. 트럼프 협상팀이 고심 끝에 만든 협상안에 대해 유럽과 러시아의 반응이 천양지차인 데서도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일 것이다.
4월25일 로이터 통신은 지난 3월17일 미국 측이 유럽과 우크라이나 대표에게 전달한 ‘위트코프 문서(트럼프 대통령의 중동 특사인 위트코프가 아이디어를 낸 협상안)’의 내용을 공개했다. 러시아의 크름반도(크림반도) 점령과 우크라이나 남부 및 동부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통제를 인정한다.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 대신 유럽과 우방국들에 의한 ‘강력한 안전보장’을 명시했으나 세부 내용은 빠졌다. 평화협상 타결 시 서방의 대러 제재는 해제한다. 이에 대해 유럽은 충격적이라는 반응이다. 그런데 러시아의 반응은 더욱 놀랍다.
미국 싱크탱크 전쟁연구소(ISW)는 4월30일자 보고서에서 “러시아 당국자들은 평화 합의를 받아들이기 위한 유일한 조건은 우크라이나의 완전 항복이라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라고 밝혔다. 또 4월25일 푸틴 대통령은 위트코프 특사의 ‘현재 전선에서 동결’하자는 제안을 거부하며 러시아가 루한스크·도네츠크·자포리자·헤르손 ‘전역’을 손에 넣는다는 내용이 평화 합의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현재 점령지를 기준으로 선을 긋자는 위트코프의 얘기에 푸틴은 각 주의 미점령지까지 내놓으라고 명세서를 내민 셈이다. 트럼프 협상팀은 푸틴의 예방전쟁론에 따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중단에 기존 점령지 인정을 더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푸틴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트럼프의 오판 어디서 시작됐나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도 바뀌기 시작했다. 4월30일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 체결한 광물 협정에서 처음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침공’ 때문임을 인정했다. 당연한 거 아니냐 할 테지만 지난 2월23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침공 책임을 명시한 유엔 결의안을 내려 하자 이에 맞서 ‘침공’이 아닌 ‘분쟁’이라는 표현으로 별도 결의안을 제출할 때와 비교하면 큰 변화다. 그러나 전쟁 책임에 대한 트럼프의 인식은 여전히 양쪽 모두에 문제가 있다는 선에 머무르고 있다. 4월14일 나이브 부켈레 엘살바도르 대통령과의 회견 자리에서 그는 “바이든도 막을 수 있었고 젤렌스키도 막을 수 있었으며, 푸틴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라고 했다. 트럼프의 이 같은 인식은 어떻게 해서 생겼을까.
트럼프만을 탓할 문제가 아니다. 이미 미국의 저명한 국제정치학자가 푸틴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촉발시켰다고까지 주장했다. 바로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로 유명한 미어샤이머 시카고 대학 교수 얘기다. “2021년 집권한 바이든 정부의 나토 활성화와 우크라이나와의 안보협력 강화가 러시아의 위기감을 높인 게 전쟁의 직접적 촉발 원인”이라는 것이다. 국립외교원 이태림 교수 논문(‘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러시아적 시각과 서방적 시각 비교 고찰’)에 따르면 오바마 정부 부통령 시절부터 러시아에 대해 초강경 입장을 취해왔던 바이든이 2021년 취임 후 미국의 대러 정책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대러 입장까지도 강경한 방향으로 유도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사례로, 2021년 7월에 31개국을 초청해 흑해에서 대규모 ‘시 브리즈 21(Sea Breeze 21) ’훈련을 우크라이나와 공동 주관, 9월에는 젤렌스키를 워싱턴으로 초청해 나토와 유럽연합 가입 지지를 재공식화, 11월에는 ‘미국·우크라이나 전략 파트너십 헌장’을 체결하는 등 우크라이나와의 군사협력을 한층 강화하는 실질적 조치를 취했다는 것이다.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바로 터져나온 미어샤이머의 이 같은 주장은 러시아 안보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푸틴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트럼프는 자신의 측근을 통해 직접 푸틴의 생각을 알아보려 했다. 미국 대선이 있던 지난해 2월6일 터커 칼슨 전 폭스뉴스 사회자가 크렘린궁에서 푸틴 대통령을 두 시간 동안 단독 인터뷰한 것이다. 터커 칼슨은 미국 대선 후 트럼프 진영의 막후 실세로까지 소개됐던 인물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해법을 묻는 그에게 푸틴은 귀가 번쩍 뜨일 얘기를 했다. “이 전쟁은 1년 반 전에 끝낼 수 있었다. 바로 2022년 3월29일 맺은 이스탄불 합의를 지켰다면 말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포기하고 관계국의 안전보장을 받아들이면 러시아 군이 침공 전 지점까지 철수하는 것을 포함해, 18개 항의 합의를 했다. 우크라이나 대표가 서명까지 했는데 키이우로 돌아간 뒤 얘기가 달라졌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가 키이우까지 날아와 반대했다고 한다. 그들이 이스탄불 합의로 돌아올 것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인가 그게 문제다. 돌아오면 평화 교섭을 재개할 수 있다.”
푸틴의 말은 사람의 가슴을 뛰게 하는 데가 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만 포기하면 러시아 군이 침공 전 지점까지 철수하겠다는 것으로 들렸을 테니 평화협상의 길이 눈앞에 어른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되고 있는가. 역시 대러 강경파 바이든과 군산복합체, 네오콘이 합작해서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서사가 성립된다. 트럼프가 “나라면 24시간 안에 해결할 수 있다”라고 한 것도 자기는 네오콘이나 군산복합체로부터 자유롭다는 뜻도 내포돼 있다.
물론 착각이다.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는 말은 푸틴의 화법을 연구할 때 반드시 새겨야 할 경구다. 푸틴은 철군 조건으로 나토 가입 중단만 거론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들리게 했을 뿐이다. 사실 철군 조건으로 치자면 푸틴의 말 속에 섞여 있는 18개 항 합의가 핵심이다. 그 전모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몇 조항만 봐도, 꼭 보리스 존슨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우크라이나가 국가 해체를 각오하지 않는 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이런 조항이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가입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러시아·중국·영국·프랑스가 안전을 보장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안전보장 국가의 하나로 들어간 러시아가 다른 국가들의 안보 조치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는 병력 규모까지 상세하게 규정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 측이 군인 25만명, 탱크 800대, 화포 19만 대는 유지해야 한다고 한 데 대해 군인 8만5000명, 장갑차 342대, 화포 519대로 제한하고 미사일 최대 사거리는 40㎞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24년 6월24일 푸틴 대통령이 외무부 간부들에게 연설한 내용에서 이스탄불 합의에 들어 있는 다른 주요 골자들도 추가로 확인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 군이 먼저 도네츠크·루한스크·헤르손·자포리자의 행정경계선 밖(러시아 군 미점령 지역 포함)으로 철수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군이 철수를 개시하고 우크라이나 정부가 나토 가입을 포기한다는 의사를 밝히면 평화 교섭을 시작한다. 러시아 측의 요구는 우크라이나의 중립화·비동맹화·비핵화·비군사화·비나치화이다.”
중립화나 비동맹화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고 타국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안전보장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비군사화는 무장해제 내지는 군비의 대폭 축소, 비나치화는 러시아 지배를 거부하는 정권은 무조건 나치라고 낙인을 찍어왔기 때문에 이는 곧 젤렌스키 정권이 물러나고 친러 정권이 들어서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이스탄불 합의는 예방전쟁이나 영토의 일부 점령이 아니라 완전 항복을 요구하는 항복문서이자 러시아에 편입된 속국이 되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다 잡은 고기를 놓친 아쉬움 때문에 여전히 이스탄불 합의로부터 평화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젤렌스키가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버티는 이유다.
이스탄불 협상은 ‘겉은 예방전쟁이요 속은 정복전쟁’인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을 드러낸다. 2021~2022년 이 두 가지는 동시에 진행됐다. 실제로는 정복전쟁을 추구하면서 예방전쟁이라는 허위 명분으로 분칠하는 과정이 있었다. 미어샤이머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의 주장은 사실 목소리의 크기에 비하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2021년 7월 이전의 얘기를 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의문이다. 논문 저자인 국립외교원 이태림 교수 역시 그 점에 주목했다. 바이든 정부가 처음부터 ‘러시아 압박’을 기획했는지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2021년 5월 열린 블링컨-라브로프 외무장관 간의 건설적 회담 분위기나, 2021년 6월의 미·러 정상회담에서는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교수는 “2021년 6월 이후 어떤 특정 계기로 인해 바이든 정부의 대러 기조가 급선회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추후 과제로 돌렸다.

바이든 정부 초창기 상황은 필자도 관심을 가지고 취재했다. 바이든이 대러 강경파였다는 미어샤이머 주장은 맞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면서 큰 변화가 있었다. 1기 트럼프 정부에 이어 바이든 정부의 목표도 ‘중국 봉쇄’였다. 그러려면 당장의 지역 현안인 아프간·이란·북한 문제 해결이 급선무였다. 아프간 전쟁에서 손을 떼고 미군을 인도-태평양으로 전환 배치하고, 트럼프 정부 시절 중단된 이란 핵 협상을 재개해 성과가 나면 북한 핵 협상으로 이어가려 했다. 러시아는 바로 이 세 가지 지역 현안 모두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나라였다. 2021년 6·16 정상회담 직후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과 러시아가 ‘두 강대국 관계’가 되느냐 여부는 앞으로 몇 개월에 달렸다”라고 한 말은 진심이었다. 러시아가 미국에 협조하면 중국 대신 러시아를 두 강대국 관계, G2의 파트너로 대하겠다는 뜻이다.
푸틴은 어떻게 바이든을 속였나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흘렀다. 이란 핵 협상에서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 2021년 6월20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란 핵 합의 복귀를 위한 국제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첫날 회의를 마치자마자 이란 대표단이 본국으로 철수해버린 것이다. 바로 전날인 6월19일 이란 대선에서 핵 협상에 강경한 에브라힘 라이시가 당선됐는데, 8월 초인 그의 임기 시작 전 이란의 핵 합의 복귀를 서두르기 위해 소집한 회의였다. 그런데 대표단이 철수해버려 그다음을 기약할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은 돌발 상황의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란 혼자 이런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6월20일 당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이 대(對)러시아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 뒤의 진행은 미어샤이머 교수가 정리한 대로다.
푸틴은 왜 바이든의 선의를 걷어찼을까.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푸틴이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국정 지지율이 위험수위까지 떨어져 위기감이 감돌았던 것이다. 팬데믹이 본격화한 2020년 4월에 59%라는 역대 최저 기록이 나왔다. 크렘린이 직접 3대 국영방송을 틀어쥐고 언론통제를 하는데도 이 정도면 심각한 상황이다. 문제는 2024년 대선까지 4년 남았는데 딱 한 가지 외에는 지지율을 끌어올릴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전쟁으로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는 방법이다. 2014년의 3월 크름반도 합병은 그에게 강력한 성공사례였다. 그 한 해 전인 2013년 11월에도 지지율이 61%로 역대 두 번째 낮았는데, 합병 다음 해인 2015년 6월 89%로 껑충 뛰었다.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캠플 주사로 전쟁만 한 게 없다는 점이 입증된 것이다.
푸틴이 극우 사상가이자 유라시아주의를 주창하는 알렉산드르 두긴의 신봉자란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두긴의 〈지정학의 기초〉는 그의 대외 행보 나침반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영미 해양세력의 단극 질서를 몰아내고 러시아 중심의 다극화를 실현하려면 조지아 침공, 우크라이나 병합,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미국의 인종·종교적 분열과 고립주의 성향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동안 여기에 맞춰왔는데 우크라이나 병합만 남았다. 팬데믹 기간 푸틴이 거의 칩거하다시피 하면서 극우 역사가인 메딘스키의 역사서들을 탐독한 것도 그 명분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일부”라는 명분 말이다.
바이든 정부가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하려 한다는 것은 그에게 기회였다. 중앙아시아에 힘의 공백이 발생하는 것이다. 2021년 6월16일 푸틴이 바이든을 만난 것은 그의 아프간 철군 의지를 확인하고 우크라이나 침공 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2021년 7월12일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일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것은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에 대해 공개적으로 의문을 제기하며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 러시아 땅에서 형성된 구소련 시대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며 병합 의지를 밝힌 것이다. 그때 이미 전쟁은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토 국경선에 배치됐던 군을 빼 우크라이나 국경선에 집결시키기 시작했다. 푸틴의 주장대로 이 전쟁이 나토를 막기 위한 예방전쟁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2월까지 10만명을 집결시켰다.

두 번째 작업에 착수했다. 우크라이나 정복이라는 전쟁 목적을 숨기고 미국과 나토의 압박을 부각하기 위한 것이다. 이란 핵 협상이 파투 난 데에 분개한 바이든 정부가 나토와 우크라이나를 끌어들여 러시아 주변에 긴장을 고조시킨 것은 푸틴에게 명분을 만들어줬다는 점에서 고마운 일이었다. 2021년 12월17일 러시아 외무부는 나토와 미국에 각각 공동안보를 위해 필요한 조치에 대해 논의하자며 조약 형식의 문건 초안을 보냈다. 푸틴의 장기대로 명분은 그럴싸하지만 세부로 들어가면 상대방이 절대 응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2022년 2월24일의 특별군사작전 사흘 전 발표할 선전포고성 국정연설에 미국과 나토에 공동안보를 위한 마지막 제안까지 했는데 무시당했다는 몇 줄을 보태기 위한 요식 절차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네오나치’ 주장
사실상 선전포고였던 2022년 2월21일 두 시간에 걸친 국정연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역사를 다룬 전반부와 미국 및 나토와의 관계를 다룬 후반부로 나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전쟁 명분으로 부족했던지 뇌관을 하나 심어놓았다. “우크라이나가 2021년 3월 새로운 군사전략을 채택했다. 크림반도와 돈바스에 지하 테러집단을 조직할 것을 제안하고 앞으로 있을 전쟁의 방향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라는 내용이 뜬금없이 들어간 것이다. 당시 바이든 정부가 폭로한 대로 폭발물을 잘 다루는 러시아 요원들을 돈바스에 침투시켜 ‘가짜 깃발 작전(자작극)’을 벌이고 이것을 우크라이나 군의 소행이라 몰아붙여 전쟁 명분으로 삼으려 밑밥을 깐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CNN을 비롯한 주요 외신들이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선제 도발 증거라며 친러 반군이 유포한 영상들이 실은 사전에 기획 촬영된 것이라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폭로해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다음의 침공 명분으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 바로 네오나치 담론이다. 2022년 2월21일 연설에서 두세 차례 등장하기는 하나 큰 비중은 아니었다. 그 뒤 네오나치에 대한 강조가 늘어나더니 전쟁 1년째인 2023년 2월21일 국정연설에서는 “2014년 쿠데타 이후에 등장한 네오나치 정권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특별 군사작전 결정이 내려졌다”라는 궤변이 등장했다. 그 전엔 없던 네오나치 정권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았다.
그러자 바로 다음 날 영국의 BBC 방송이 팩트체크에 나서 망신을 주었다(2023년 2월22일자 BBC 뉴스 ‘우크라이나 전쟁: 푸틴 대통령 연설 팩트체크’). “젤렌스키 대통령은 유대인으로 나치의 홀로코스트 피해자 가문 출신이라는 것, 2019년 우크라이나의 마지막 총선에서 극우 후보에 대한 지지율이 2%로 다른 여러 유럽 국가보다 훨씬 낮았다는 점 등이다. 그 밖에 나치 산악부대 문양인 에델바이스를 사용했느니 하는 얘기 등 조금만 찾아봐도 확인할 수 있는 조잡한 얘기들을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원래 ‘네오나치’ ‘파시스트’ ‘외국 기관의 에이전트’ 같은 용어는 2014년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 정세를 호도하기 위해 러시아 국영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대국민 선전용으로 사용하던 말이다. 또한 정보기관들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사정을 잘 모르는 해외 인사들에 대한 영향 공작 차원에서 주로 활용해왔다. 그런데 대통령이 직접 사실무근의 용어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 전쟁의 명분이 궁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오로지 극우 역사관에 입각한 우크라이나 병합의 욕망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협상의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요행히 협상이 이뤄진다 해도 푸틴의 국내 지지율이 위험수위로 떨어질 때마다 캠플 주사 차원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악순환에 빠질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협상을 빨리 끝내고 북·미 관계로 넘어가겠다던 트럼프 정부의 계획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 같다.
남문희 편집위원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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