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 군용트럭 막은 청년의 감사 인사 [2025년 광장이 1980년 광주에게]

글 장일호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2025. 5. 2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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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주변을 돌던 중 서강대교 쪽에서 군용차를 발견했다. 국회 방향이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뛰었다. 차량은 앞에 선 김씨를 아랑곳 않고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일종의 위협이었다. 김씨도 군용트럭에 몸을 기대며 비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12·3 비상계엄 이후 첫 5·18이다. 〈시사IN〉은 2024년 12월3일을 겪은 광장의 시민과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 6인의 이야기를 교차해 소개한다. 12·3 세대는 45년 전 광주민주화운동의 주역들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감사와 다짐의 마음이 빼곡했다. 그 시간에 기대 내일을 그려볼 수 있었다고, 역사의 가르침을 이어가겠다고, 덕분에 살아남았다고. 5·18 세대도 지난겨울의 광장에서 ‘광주 정신’을 부활시킨 12·3 세대에게 자랑스러움과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과거가 현재를 구했고, 현재가 과거를 되살렸다.

2024년 12월3일 국회 앞에서 군용차를 막은 김동현씨는 1980년 5월과 달리 아무도 죽지 않은 탄핵집회를 기적처럼 생각한다. ⓒ시사IN 이명익

4월4일 밤에는 123일 만에 발 뻗고 잤다. “진짜 간만에 잘 잤어요. 일어났는데 오랜만에 개운하더라고요.” 김동현씨(34)는 “1980년 5월과 달리 아무도 죽지 않은” 2024년과 2025년의 광장을 ‘기적처럼’ 생각한다. “오발탄 하나면 반복될 수 있었을 역사니까요.” 청년 주거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 민달팽이유니온 조합원인 김씨는 계엄이 선포된 2024년 12월3일 밤 운동을 마치고 인터넷 포털사이트를 열었다가 속보 뉴스를 봤다. 으레 ‘정치적 수사’겠거니 생각하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심상치 않았다. 되는대로 옷을 껴입고 가방에 속옷과 양말 등을 챙겨넣었다. 한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겠다는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며 일주일치 고양이 식량과 물을 챙겨놓았다. 만약을 대비해 친구에게 집 주소와 비밀번호를 보냈다. 

서울 화곡동 집에서 여의도 국회로 향하는 20분 남짓, 택시 안에서 김씨는 기사에게 양해를 구하고 창문을 열어 소리쳤다. “여러분, 계엄입니다! 국회로 가야 합니다!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아직 계엄 소식을 모르는 시민들이 많은 것 같았다. 다시 떠올려도 현실감 없는 시각이었다. 벙찐 얼굴들, 김씨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을 것만 같았다. 12월4일 새벽 1시2분, 국회가 계엄 해제를 의결했지만 ‘활동가의 촉’은 발걸음을 국회 앞에 묶어두었다.

국회 주변을 돌던 중 서강대교 쪽에서 군용차량을 발견했다. 국회 방향이었다. ‘막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뛰었다. 군용차는 앞에 선 김씨를 아랑곳 않고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다. 일종의 위협이었다. 김씨도 군용차에 몸을 기대며 비킬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서너 사람이 김씨와 함께 군용차 앞을 막아섰다. 운전병이던 김씨는 부대 번호와 차량 번호를 재빠르게 확인했다. 5602부대, 제1공수특전여단이었다. 무섭다기보다는 화가 났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지? 돌이켜보면 신뢰였던 것 같아요. 내가 막으면 누군가 나를 지켜준다 믿었고, 실제로 그랬어요.”

2024년 12월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인근에서 김동현씨가 몸으로 군용차를 막고 있다. ⓒ워싱턴포스트 화면 갈무리

그날 이후로 김씨의 일상도 광장의 시간에 맞춰졌다. 연결의 감각이 김씨를 남태령으로, 한강진으로, 경복궁으로 이끌었다. 비현실적인 계엄에 맞서는 현실의 시민은 역설적이게도 강하고 따뜻했다. “내가 이 연대와 연결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탄핵 블루’라고 해야 하나, 노스탤지어라고 해야 하나(웃음). 요즘은 오히려 그런 기분이 들어요. 제가 활동가로 살면서 성공의 경험이 없거든요? 늘 지는 싸움만 했는데 처음으로 이겼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계속 생각해요. 우리가 광장에서 겪은 것은 꿈이 아니다. 우리가 다시 만드는 세계는 이전과는 다를 거다, 그러니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자고 말하고 싶어요.”

시민단체 1700여 곳이 모여 만든 비상행동의 정식 명칭은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이다. 김씨는 ‘사회 대개혁’에 우리 사회가 좀 더 주목하길 바란다. 광장이 드러낸 ‘몫 없는 사람들’의 몫을 찾아주는 정치, 그게 살아남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김씨는 믿는다. 45년 전 광주 덕분에 오늘날을 가능케 했던 것처럼, 오늘의 ‘생존자’는 역사와 미래를 믿기 때문에 싸운다. 김씨가 1980년 5월 광주로 보낸 편지에는 그래서 감사가 담겼다.

김동현씨가 광주 시민들에게 적은 손편지에는 “덕분에 살아남았다”라는 고백이 담겨 있다. ⓒ시사IN 이명익

광주에게

출근하느라 국회 앞을 지날 때면 여전히 묘한 기분이 듭니다. 국회의원들과 시민들이 함께 계엄령을 해제한 곳, 무엇보다 수백수천의 시민들이 한몸처럼 계엄군을 막고, 경찰과 대치하던 밤의 기억이 선명한데, 어느새 2025년 4월4일 윤석열은 탄핵되었고 그 누구도 죽지 않았습니다.

가방에 먹을 것과 옷가지,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고양이) 사료와 모래를 한가득 부어둘 때 먹었던 마음들이 어제 일처럼 선연한데 광장에는 천막도, 깃발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꿈인가 싶어 지난 사진들과 영상들을 보다보면 현실감을 되찾습니다.

최근엔 비육사 출신의 군인 분들이 헬기를 지연시켰다는 뉴스와, 병력들이 서강대교를 넘지 못하게 지시하고, 상관의 명령에 항명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총알들도 개인에게 불출되지 않았습니다. 오발탄 하나가 1980년 광주에서의 학살을 반복할까 두려웠지만 87년 광주와 함께 되찾은 민주주의와, 광주 학살 이후 개정된 계엄법 덕분에 국회가 계엄령 해제를 결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과 역사 속에 자리잡은 광주의 아픔이 계엄군을 멈춰세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켜주시고, 말씀해주신 기억들이 우리의 현재를 도왔습니다. 지난 광주에서 군인들에게 다친 학생들을 구하던 손길과 치료하던 손길은 남태령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사비를 털어 시민군을 먹이고, 돌보던 광주의 기억은 남태령과 한강진, 경복궁으로 이어져, 시민들을 돌봤습니다. 우리의 연결과 연대는 광주에 이미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들을 증언하고 알렸던 투쟁이 지난했음을 압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길어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것임도 짐작합니다. 2024년 12월14일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알지 못한 감정에 헤매던 저는 광주 5.18 항쟁 추모 영상에서 한 유족 분이 돌아가신 남편 분에게 전하는 편지에 울음을 터뜨렸고, 그제야 제 감정이 공포와 두려움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살아남았다는 것을 실감했고, 그제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며 눈물을 닦아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주주의를 지키고, 만들어주셔서 덕분에 민주주의 세대들이 2030 여성들이 민주주의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편지로나마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해 앞으로도 함께하겠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김동현 드림

 

글 장일호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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