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있잖아, 그거.” 일상에서 흔히 접하지만 이름을 몰라 ‘그거’라고 부르는 사물의 이름과 역사를 소개합니다. 가장 하찮은 물건도 꽤나 떠들썩한 등장과, 야심찬 발명과, 당대를 풍미한 문화적 코드와, 간절한 필요에 의해 태어납니다. [그거사전]은 그 흔적을 따라가는 대체로 즐겁고, 가끔은 지적이고, 때론 유머러스한 여정을 지향합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영화 감독 故 박남옥(1923~2017). 1955년 개봉한 첫 영화 ‘미망인’은 그녀가 딸을 낳은 지 사흘 만에 지인들과 의기투합해 제작을 시작한 영화다. 박남옥은 갓난아기를 처네에 둘러업은 채 스태프 15명의 식사를 손수 차리며 메가폰을 잡았다. [사진 출처=마음산책]
처네다. 처네는 아기를 업을 때 두르는 끈(옷고름)이 달린 작은 포대기를 뜻한다. 강보(襁褓)라고도 하는 포대기는 아기를 덮어주거나 업을 때 쓰는 작은 이불을 뜻한다. 엄밀히 처네와 포대기는 각각 다른 물건을 지칭하는 이름이지만, 구분하지 않고 쓰이는 편이다. 끈이 아기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역할을 해, 비교적 안정감 있게 아기를 업고 다닐 수 있다. 아기 역시 양육자와 밀착해 심장 소리와 체온을 느끼며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처네의 원래 이름은 쳔의, 한자로는 천의(薦衣)다. 근대 이후 한자음과는 별개로 처네로 읽던 것이 굳어진 것이다. 처네는 ① 아기 포대기 외 다른 용도로도 쓰인다. ② 작아서 간편하게 덮을 때 쓰는 이불, ③ 부녀자의 머리쓰개다. 이 중 작은 이불 처네는 차렵이불 혹은 무릎담요로 진화했다.
모든 초보 엄마 아빠들은 처네(포대기) 쓰는 법을 배우기 위해 유튜브를 찾아보는 게 국룰이다. [사진 출처=마이리틀데이지]
지금은 현대적인 (서구식) 육아용품 자리에 자리 많이 내준 처네와 포대기이지만, 역설적이게도 해외에서 오히려 인기를 끌었다. 우리말 발음을 그대로 로마자 표기로 옮긴 ‘podaegi’란 단어로 알려진 처네는 2010년대부터 할리우드 스타부터 일반인까지 널리 쓰는 육아용품으로 자리 잡았다. 2013년 영화 홍보 차 한국을 찾은 영화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선물로 받은 포대기를 한눈에 알아보기도 했다. 특히 부모가 아기와 밀착한 상태로 두 손 두 발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점이 대호평. 뜬금없는 ‘한류 아이템’으로 등극한 건 포대기뿐만이 아니다. 한국 고유의 농기구 호미 역시 ‘Ho-Mi’라는 이름으로 서구권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정원 가꾸기에 최적화된 연장이라는 평이다.
- 였지만 지금은 좀 지나간 유행이 됐다. 2025년 북미 이커머스 기준, podaegi 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제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유튜브 등 영상 플랫폼에서도 마찬가지. 하지만 당시 당국과 언론의 “두유 노 포대기?” “아이 러브 포대기” 한류열풍 기획 상품으로 폄훼할 일은 아니다. 유모차 등 아이와 부모가 분리된 육아용품이 일반적인 서구 시장에서, 신체적·정서적 밀착과 실용성을 모두 챙긴 포대기 계열 육아용품이 자리 잡는 데에 일조한 것은 분명하다. 미국과 유럽의 Z세대는 이제 부모에게 “내가 너를 밤새 업어 키웠는데!”라는 말로 시작하는 K-잔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다.
2013년 영화 [아이언맨 3] 홍보를 위해 내한한 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방송 인터뷰에서 포대기를 선물로 받고 “이거 포대기 아니냐”라며 되묻기도 했다. [사진 출처=KBS]
긴 천으로 아기를 휘감듯이 업거나 안은 형태의 물건을 통틀어 베이비 슬링(baby sling)이라고 한다. 영어권 웹사이트에서는 포대기도 베이비 슬링의 한 가지 종류로 소개된다. 아기 띠 혹은 베이비 캐리어(baby carrier)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베이비 슬링이다. 긴 천 대신 손쉽게 탈착 및 조절이 가능한 어깨끈과 허리끈 등 기능성 디자인으로 아기를 쉽고 안정적으로 안을 수 있게 돕는다. 처네와 달리 아기와 부모가 마주 보듯이 안을 수 있다. 단, 음식을 먹다가 아이 머리에 흘릴 수도 있다.
미국 이커머스에서 판매 중인 베이비 슬링(왼쪽)과 베이비 캐리어(오른쪽). 일단 왼쪽 아기가 꽤나 부담스럽겠다는 건 잘 알겠다. [사진 출처=아마존]
“야 이게 맞냐?” “야 나도 잡혔어. 우유나 한잔해.” [사진 출처=캐나다 도서관 및 기록 보관소·공공 저작물]
크레이들보드(cradleboard), 파푸스(papoose, 혹은 파푸스 캐리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전통적인 육아용품으로 일종의 지게식 요람이다. 나무 등으로 견고한 바닥을 만들고 천과 가죽 등으로 아기를 단단히 여민다. 햇볕과 외부 충격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 쪽에 가림막 같은 후드가 있는 경우도 많다. 모양만 보면 이동식 미니 침대나 바퀴 없는 유모차에 가깝다. 아기를 고정해(=신체의 자유를 빼앗아) 위험한 곳으로 이동하는 걸 방지하고, 필요에 따라 부모가 등에 메고 이동하거나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무 등에 기대어 놓거나 해먹(그물침대), 그네에 매달아 놀이 기구로도 썼다.
캐나다 백과사전은 크레이들보드에 대해 아기로 하여금 자연과 주변의 일상을 조용히 관찰할 수 있게 만들며, 많은 원주민 문화권에서 인내심 제고와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측면에서 관찰 행위를 중요시하는 지점과 맥이 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뿐만 아니라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북부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사미족도 비슷한 형태의 요람을 사용했다. 전통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크레이들보드와 달리 파푸스는 아기 띠를 뜻하는 단어로 쓰이기도 한다.
베이비 캐리어를 앞으로 메고 뭔가 먹을 때에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그저 신난 이 아빠의 미래를, 우리는 알고 있다. 엄마의 대사도 알고 있다. “시체가 말을 하네?” [사진 출처=인터넷 커뮤니티]
출처 : 박남옥-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마음산책, 201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코트라 해외시장뉴스(한국 전통 육아용품 포대기, 미국에서 Podaegi로 인기 상승, 2019), 한국 전통 포대기의 유형과 변천(한재휘·이은진, 2020), 캐나다 백과사전(Cradleboard,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