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주주만의 것? 상법 개정이 품은 위험
‘국장(한국 증시) 탈출은 지능순’이라고들 한다. 투자자들은 주로 ‘미장(미국 증시)’으로 간다. 지난해 7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X(옛 트위터)에 한국인 투자자들을 “스마트 피플(smart people, 현명한 사람들)”이라고 썼다. 당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투자한 미국 회사는 테슬라였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현재 한국인 투자자들이 보유한 미국 주식 총액은 1121억 달러(약 164조원)에 달한다. 한국인들에게 테슬라 다음으로 인기 있는 미국 기업은 엔비디아,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등 이른바 ‘매그니피센트 세븐(magnificent 7)’의 빅테크들이다.
합리적인 투자 선택이다. 한국 대기업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매그니피센트 7에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한국의 대표 기업인 삼성전자와 현대차, SK하이닉스의 지난해 12월 말 현재 PBR은 각각 0.92배, 0.51배, 1.6배.
PBR은 기업의 시가총액(주가x주식 수)을 순자산(자기자본)으로 나눈 수치다(시가총액/순자산). 순자산(총자산-총부채)은 ‘온전한 소유’를 의미한다. 기업은 현금이나 금융상품, 공장, 기계설비, 부동산 등을 갖고 운용하기 마련인데 그중 타인에게 갚아야 하는 돈(부채)을 뺀 금액이 순자산이다. 결국 PBR은 기업이 ‘온전히 소유한 가치’가 ‘시장에서 어떻게 평가되느냐(주식가치)’를 따지는 지표다. PBR이 1배 이상인 기업은 ‘온전히 가진 것’보다 높은 시장평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1배 이하면, 그 반대의 경우다.
매그니피센트 7의 PBR을 보자. 그중 낮은 편인 알파벳(구글과 유튜브의 모기업)과 아마존, 메타(페이스북의 모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PBR은 지난해 12월 말 기준 각각 7.28배, 8.23배, 8.29배, 10.6배에 달한다. 무시무시한 수치는 지금부터다. 테슬라는 18.8배, 엔비디아 50.9배, 애플 57.9배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주가(=기업가치)는 ‘온전히 보유한 것(순자산)’에도 미치지 못하거나 약간 높다. 매그니피센트 7은 주가(=기업가치)를 심지어 순자산의 수십 배까지 튀길 정도로 ‘유능’하다. 누구에게 돈을 맡기고 싶겠는가.
PBR 올리는 두 가지 방법
‘국장 탈출’의 원인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대기업들의 주가가 항구적으로 낮은 현상)’다. 한국 기업들의 주가를 높이면 국내외 투자자들이 ‘국장’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 총선을 앞둔 지난해 초, 여야 정치권엔 이런 컨센서스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었다. 경제활동인구(유권자) 가운데 절반 정도(1400만여 명)가 상장회사 주주다.
윤석열(3월20일 현재 내란죄 피고인)은 지난해 1월 한국거래소를 방문해 ‘상법 개정안’ 카드를 꺼내 든다. 현행 상법엔 이사(경영의사결정 기구)가 회사에만 ‘충실’하면 되는 것으로 규정되어 있다(이사 충실의무). 윤석열은 이사 충실의무를 주주로까지 확대하자고 제안했다. 진보 성향 시민단체들과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해온 의제를 사실상 수용한 것이었다.
이 의제는 진보 성향 시민들의 유서 깊은 숙원인 ‘재벌 해체’론의 연장이기도 하다. 재벌 해체론에 따르면, 재벌로 불리는 지배주주들은 자기 영향권 내인 이사회를 움직여 소수 주주(지배주주 이외의 모든 주주로 개미 투자자는 물론 펀드 등 기관투자자도 포괄하는 개념)들에게 불공정한 조치를 강행해왔다. 이에 따라 국내외 투자자들이 ‘국장’을 꺼리면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귀결되었다. 기업가치(주가라고 부르든 PBR이라 부르든)를 높이기 위한 근본적 대안은, 이사회에 대한 지배주주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이사 충실의무 대상에 (소수)주주를 추가하면 어떨까?
한 달여 뒤인 지난해 2월, 정부·여당은 ‘기업 밸류업(=기업가치 혹은 주가 높이기)’ 프로그램을 발표한다. 목표는 ‘PBR 올리기’다. 일본 정부가 시행해온 ‘개인 투자 촉진’ 정책을 본떴다. 왜 하필 PBR일까? 순식간에 정책 목표(주가 올리기)를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PBR 올리기는 자칫 기업의 장기 성장 역량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수도 있다.
PBR(시가총액/자기자본)을 높이려면 뭘 해야 하나? 첫째, 기술혁신, 시장점유율 확대, 소비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새로운 시장 창출, 강력한 브랜드 형성 등이 정답이다. 단순하지만 어렵다. 충분하고 끈질긴 실물 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하다. 시장이 해당 기업의 미래 가능성을 확신하기 시작하면 분자(시가총액)의 상승으로 PBR이 오른다. 대표적 사례는 타이완의 TSMC다. 이 회사의 지난해 말 PBR은 7.9배.
둘째, 분모(순자산)를 줄이면 된다. 주주환원(배당+자사주 매입)을 늘리는 방법이다. 배당금 확대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면 주가가 상승한다. 혹은 자사주를 매입한 뒤 소각하면 주식 수가 줄어들고 주가는 오른다. 이런 돈들은 순자산에서 뺀다. 분자가 감소하며 PBR은 배가된다. 대표적 사례는 애플이다.
정부가 ‘PBR 올리기’를 다그치면, 기업은 어떤 방법을 선택하기 쉬울까? 당연히 두 번째다. 유형자산(공장, 기계설비 등)과 연구개발에 대한 대규모 투자는 결실을 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다. 성공 여부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주주환원은 단기간 내에 주가를 올릴 수 있는 유력 수단이다. 그러나 장기 투자 여력은 그만큼 작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들의 경우, PBR 올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주력 산업이 반도체, 자동차, 철강, 조선 등 자본·기술 집약적인 제조업이기 때문이다. 현금흐름 가운데 상당 부분을 유형자산에 투자해야 한다. 연구개발비를 많이 쓰면 그만큼 비용이 증가하면서 순이익(주주환원의 재원)이 감소한다. 더욱이 제조업을 둘러싼 글로벌 경쟁이 갈수록 뜨거워지면서 투자는 생존의 문제가 되었다. 제조업 이외의 산업들은 아무리 고부가가치라고 해도 광범위한 고용을 창출하지 못한다. 미국이 제조업 ‘전선’으로 돌아온 이유다. 중국은 한국 경제의 등골 노릇을 해온 여러 제조업에서 급속한 발전을 이뤄냈다. 초저가 상품들을 글로벌 시장에 쏟아내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생존엔 주주환원보다 투자가 훨씬 더 절실할 수 있다.
PBR이 낮아도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는 클 수 있다. 예컨대 최근까지 삼성의 비즈니스 모델은 수직계열화와 ‘그룹 경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계열사(삼성디스플레이, 삼성전기, 삼성SDI 등)들로부터 주요 소재를 공급받아 완성재(반도체, 스마트폰)를 만든다. 중국 업체로부터 더 싸게 살 수 있다(아웃소싱) 해도 계열사로부터 매입한다.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계열사 간 협력으로 연구개발과 기술혁신, 비용 절감 등에서 큰 시너지 효과를 내기도 했다.
한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아웃소싱 전략을 펼쳤다면 국내 고용과 기술력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수준이었을 터이다. 다만 이 계열사들은 법률적으로 별개의 회사들이다. 그들의 협력은 그룹 차원의 ‘경영 사령탑’이 비공식적이고 암묵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재벌 해체는 이 ‘사령탑’을 제거해 계열사들 각각을 온전한 독립 회사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사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하는 상법 개정안은 재벌 해체의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디스플레이를 중국 BOE에서 더 싸게 살 수 있는데 굳이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매입했다고 치자. 이는 삼성전자 주주 입장에선 회사의 수익을 줄여 주주에게 피해를 준 것으로 간주된다. 이사회는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 위반으로 기소될 수 있다.
주주에게 충실하면 좋은 이사?
사실 이사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포함시키자는 주장엔 논리적 함정이 있다. 이사의 의무는 회사가 무생물(법인, 즉 ‘법적 인간’으로 각종 계약에서 인간처럼 간주되지만)로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라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인간인 이사가 회사로부터 업무를 위임받아 회사를 위해 회사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의무화한 것이다. 의사(이사)와 ‘의식 없는 환자(회사)’ 간의 관계와 같다.
‘충실의무(duty of loyalty)’는 회사에 대한 이사의 의무 중 하나다. 이사가 개인적 이익을 위해 회사에 해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위반하면 엄격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의무는 ‘주의의무(duty of care)’이다. 이사는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성실하고 주의 깊게 경영 의사를 결정해야 한다. 주의의무 위반은, 그 결과가 매우 엄중하지 않다면, 경영 판단에서의 과실로 인정되어 ‘면책’되기도 한다.
원칙적으론 이사의 의무 대상에 주주는 포함될 수 없다. 주주는 회사 같은 무생물이 아니라 인간이다. 의사결정 및 집행 능력을 가진 존재다. 실제로 미국의 연방법이나 주(州)법에서도 ‘이사는 주주에게 충실의무를 진다’라는 명문 조항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델라웨어주 상법에 간접적이지만 명시적 조항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이사나 임원은 그릇된 행위(아마 ‘주의의무’ 위반)를 저질러도 면책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엔 면책이 허용되지 않는다. “회사 혹은 그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duty of loyalty to the corporation or its stockholders) 위반.”
‘회사에 대한 이사의 충실의무’가 기본 원칙이지만, 회사와 주주의 이익은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따라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가 파생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더욱이 미국에선 1970년대부터 ‘회사는 주주의 것이며 주주를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라는 관념이 확산되었다. 1980년대 후반쯤엔 주류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다. 이런 법률과 문화가 최근 미국 자본주의의 배경이다.
매그니피센트들의 PBR이 높은 이유는, 한국 기업들과 달리, (바이든과 트럼프가 그토록 육성하고 싶어 하는) 제조업적 특성이 약하기 때문이다. 그 기업들은 대체로 플랫폼과 브랜드 파워로 돈을 번다. 알파벳의 경우, 구글로 장악한 검색 시장에서 엄청난 광고 수익을 올린다. 유튜브에선 유저들이 생산한 동영상으로 돈을 번다. 메타의 인스타그램도 마찬가지다. 매그니피센트들은 데이터센터나 클라우드 인프라, 물류창고(아마존) 외엔 유형자산에 투자할 필요가 없다. 주주에게 제공해서 주가를 올릴 재원이 풍부하다.
‘매그니피센트 7’ 중에서는 그나마 테슬라 정도가 제조업체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를 직접 설계하고 대규모 자체 공장에서 완성차를 만들어낸다. 엔비디아는 반도체를 직접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계만 담당하는 팹리스(Fabless) 업체다. 애플은 아이폰을 출시하니까 제조업체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산하지 않는 기업이다. 부품의 생산과 완성품 조립을 외부 업체에 맡긴다. 이를 위한 고용 가운데 상당 부분이 미국 밖에서 이뤄진다.
이제 애플이 57.9배 PBR을 기록한 비결을 구경할 차례다. 애플의 자금 사용 패턴을 2010년(회계연도 기준일은 9월30일) 이후 재무제표에서 찾아봤다. 애플이 유형자산 투자에 사용하는 돈(매출액 대비)은 2010년대엔 대체로 5% 안팎이었는데 2020년대 들어선 2~3%대로 낮아졌다. 같은 기간 삼성전자(연결)는 10%대 초반에서 중반, 타이완 TSMC는 무려 30~50%에 달했다. 애플의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비도 의외로 낮다. 2024년까지 3~8% 사이다.
대신 애플은 주주환원에 엄청난 돈을 투입했다.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2011년까진 배당도 자사주 매입도 없었다. 팀 쿡이 애플 CEO로 취임한 이후엔 연간 100억~150억 달러를 배당하고 있다. 자사주 매입도 매년 시행된다. 2017년까진 연간 400억 달러가 최고 기록이었다. 이후엔 700억 달러를 웃돌더니 지난해엔 950억 달러를 자사주 매입에 사용했다. 대체로 순이익의 90~100%를 주주환원(총배당금+자사주 매입)에 사용했다. 이 비율이 몇 해 동안엔 150% 내외까지 치솟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한 2011년 398억 달러였던 애플의 부채는 지난해 308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애플의 순자산은 766억 달러에서 570억 달러로 오히려 줄었다.
그러나 애플을 ‘곧 망할 기업’으로 보는 사람은 없다. 수익성이 높고 현금 창출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유형자산에는 크게 투자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조업체인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PBR을 높이기 위해 이런 전략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
인텔은 반도체 ‘제조업체’이지만 무리한 주주환원 전략을 펼치다 쓰러지기 직전까지 갔다. 이 회사의 매출액 대비 유형자산 투자는 2010년대 초중반 15~20%로 동종 업계와 비슷했다. 연구개발비는 매출액 대비 20% 내외였다. 동종 업계에서 최고 수준이다.
인텔은 2010년대에 순이익의 40~50%를 배당했다. 순이익이 전년도의 절반 이하로 떨어진 2022년엔 60억 달러, 190억 달러 수준의 적자를 기록한 2024년에도 16억 달러의 배당금을 주주들에게 지급했다. 이와 함께 2021년까지는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자사주를 매입·소각했다. 2018~2020년엔 매년 100억 달러 이상의 자사주를 사들였다. 인텔은 장기 성장을 위한 투자와 주주환원 사이에서 헤매다 위기를 맞았다. 투자 수준을 유지하는 한편 2010년대 중반 이후 주주환원도 크게 늘린 삼성전자는 인텔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놀랄 만한 중국의 투자 규모
중국에서 주주의 지위는 낮다. 국유기업은 물론 대형 민영기업까지 이사회(?)의 의사결정에 공산당 정부가 개입한다. 주주환원은 전통적으로 낮다. 자사주 매입도 흔치 않다. 지난해 상장사 1900여 개가 자사주 1300억 위안 상당을 매입했다고 알려졌다. 팬데믹 이후 주가 부진 때문에 중국 정부가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이 같은 상황이 반도체, IT 등 중국 국가 차원의 전략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이 급격히 치고 올라가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 방침에 따라 유형자산과 연구개발에 공격적 투자를 퍼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통신장비 거대 기업인 화웨이가 대표적 사례다. 연례 보고서를 살펴보니, 이 회사의 연구개발비는 2010년대에 이미 매출액 대비 14~15%로 글로벌 동종 업계에서 꽤 높은 편이었다. 이 수치가 2020년대 들어서는 단번에 20%를 넘겼다. 2022년에 25.1%, 2023년 23.4%다.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1조1100억 위안(약 224조6000억원)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했다. 심지어 순이익보다 연구개발비가 훨씬 크다. 2010년대엔 연구개발비가 순이익의 1.5~2배였다. 2022년부터는 4~5배에 이른다.
화웨이는 공식적으론 비상장 민영기업이다. 소속 노동자들의 지분이 약 99%다. 런정페이 회장의 지분은 1.4%에 불과하다. 일종의 ‘노동자 협동조합’이다. 이사회도 ‘(주주이기도 한) 노동자’들이 선출한다.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자 주주’들의 출자금, 내부유보이익(이익잉여금), 중국 국영은행들의 대출 등으로 운영자금을 마련한다. 자본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공식적 입장과 달리 화웨이의 진짜 주인은 공산당 정부라는 의혹이 파다하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화웨이는 2008~2018년에 모두 750억 달러 상당의 정부 금융지원과 세제 혜택을 받았다. 주주환원은 노동자 주주들에게 지급하는 배당이 전부다. 그러나 연례 보고서에선 배당액을 찾지 못했다. 화웨이는 외부 주주의 개입이 없기에 장기 전략(5G 선행투자, OS 개발)을 일관되게 추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중국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인 SMIC는 2000년대 들어 홍콩과 뉴욕 증시에 상장해 자금을 조달하기도 했지만, 정부계(국유기업, 반도체 투자 국부펀드 등) 지분이 50%에 가깝다. 중국 정부는 SMIC를 ‘반도체 굴기’의 핵심 기업으로 선정해 부동산 무상 제공, 세제 혜택, 수요 보장 등의 수단으로 지원한다. SMIC는 최근 생산능력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매출액 대비 유형자산 투자가 2022년엔 85%, 2023년엔 120%다. 심지어 매출액보다 더 많은 금액을 기계 설비 등에 투자하는 것이다.
같은 시기, 삼성전자의 같은 비율은 17% 정도에 불과하다. 더욱이 SMIC의 경우 2022~2023년 매출액이 17.2% 줄었는데 유형자산 투자는 오히려 17.8% 늘렸다. 반도체 대량생산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SMIC는 최근 구형 장비(미국의 디커플링으로 첨단 장비를 수입하지 못한다)만으로 7나노 칩 양산에 성공해 화웨이에 공급하고 있다.
지난 3월13일, 상법 개정안이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공포한다면 1년 뒤부터 이사 충실의무 대상은 현행 법안의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된다. 이 법안의 명목적 보호 대상은 ‘주주’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소수 주주’다. 그동안 지배주주의 횡포로 계열사 구조 재편 등에서 소수 주주들이 큰 손실을 봤고, 이런 폐단을 수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하다.
재계에서는 행동주의 펀드들이 일부 지분을 매입해 소수 주주 자격으로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를 요구할 것으로 본다. 통하지 않으면 충실의무 위반으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이에 대해 개정안 찬성론자들은 재계의 우려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는 지배주주와 소수 주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설명이다. 주주 모두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설비투자나 배당, 기술혁신에 대한 투자와는 관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사가 주의 깊고 신중하게 의사결정을 내리지 않고(주의의무 위반)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고 소송을 걸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번 상법 개정안은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만 담았지 주의의무 위반은 담지 않았다. 그러므로 기업의 장기 투자를 억제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의 관련 판례들에 따르면, 우려되는 측면이 있다. 이사의 행위가 ‘주의의무 위반’인지 ‘충실의무 위반’인지 자체가 법정에선 쟁점이 된다. 원고 측은 이사회의 행위가 주의의무가 아니라 충실의무를 위배했다고 공격하기 마련이다. 주의의무는 면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송의 가능성 자체가 이사들의 의사결정을 옥죌 수도 있다.
상법 개정안 찬성론 측에서는 ‘회사는 주주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회사가 누구의 것인가’ ‘이사의 역할은 무엇인가’ 등은 지금도 글로벌 학계의 논쟁거리다. 이사의 충실의무를 회사와 주주로 한정하는 경우, 주주는 이해관계자(노동자, 채권자, 지역사회, 공익 가치)들 가운데서 특권적 지위를 누리게 된다. 2010년 미국의 온라인 광고 플랫폼인 크레이그리스트와 이베이(전자상거래 대기업) 간의 소송이 좋은 사례다. 당시 크레이그리스트의 지분 28%를 취득한 이베이는 이 회사의 고유한 가치(동네 커뮤니티 중심)를 바꿔 수익을 늘리려고 했다. 크레이그리스트 이사들은 경영권 보호 장치를 활용해서 이베이의 지분을 희석시켰다. 델라웨어 법원은 이사들이 주주에 대한 충실의무를 위반했다고 판정했다. “영리법인의 이사회는 주주가치 극대화를 법적 의무로 삼아야 한다.” 이사가 주주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관계자들을 배려하면 법적 책임을 지게 될 수 있다.
상법 개정안은 지배주주와 소수 주주 간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개정안의 발효는 주주가치의 강화를 의미한다. 한국의 자본시장과 기업 환경은 미국처럼 주주환원을 강화하는 쪽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런 가운데 한국 기업들은 자본시장의 압박을 거의 받지 않는 데다 정부 지원을 업고 장기 투자에 집중하는 중국 기업과 경쟁해야 한다.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는 이른바 재벌 가족을 ‘오너(소유자)’라고 부른다. 그들이 전체 그룹 계열사 지분 가운데 가진 것이 5% 남짓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소수 주주(선봉은 행동주의 펀드일 수밖에 없다)를 한국 대기업들의 ‘오너’로 만드는 것이 대안일 수 있을까. 기업이 주주만의 것일 수는 없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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