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밸류업 외치는 사이, 무너지는 한국 제조업

남종석 2025. 4. 9.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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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가 국가’로 변모했다. 이는 엘리트와 상층 중간계급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두 주식에 투자하며 ‘서학 개미’로 등장한 시점과 겹친다.
2024년 11월 부산항 부두에 수출입 화물이 쌓여 있다. ⓒ연합뉴스

데이터에 기반하여 한 국가의 경제성장을 분석하는 것을 보통 ‘성장회계’라고 부른다. 성장회계에서는, 경제학에서 생산요소라고 일컫는 자본(기계설비, 건물 등 유형자산)과 노동(인구), 총요소생산성(기술) 등으로 성장 요인을 분석한다.

성장회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의 투자다. 기업은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기술을 고도화시켜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 물론 경제성장에선 인구와 기술도 중요하다. 그런데도 자본의 투자가 결정적 요소로 꼽히는 이유가 있다. 투자로 매입하는 기계설비에 기술적 진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자리를 만드는 데도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 특히 신기술 개발 등 공격적인 투자는 성패가 불확실한 만큼 미래의 위험(투자 실패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러나 이는 기업 혁신의 가장 중요한 지표이기도 하다. 파업을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추는 행위를 파업이라고 한다면, 기업이 투자하지 않는 것은 ‘자본 파업’이라 부를 수 있을 터이다.

그동안 한국 경제의 놀라운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 역시 투자였다. 한국은행 국민계정에선 투자를 ‘총고정자본형성’이라 부른다. 총고정자본형성을 구성하는 것은 설비투자, 건설투자, 무형자산(지식재산권, 기술 관련 연구개발 등) 투자다. 국민계정에 따르면, 1990년 이후 한국의 총수요에서 총고정자본형성(투자)이 차지하는 비율은 30% 내외에 이른다. OECD 주요국 가운데서 가장 높은 편이다. 최근엔 무형자산 투자의 상대적 비중이 상승한 반면 설비투자 비중은 줄고 있다. 2000년 이후 한국은 이스라엘과 함께 국민소득 대비 연구개발 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였다. 2022년 현재 인구 1000명당 연구개발 인력이 9.5명으로 세계 1위다.

선진국으로 진입, 마냥 기뻐할 일일까?

한국은 이제 명실공히 ‘선진국’이다. 1인당 소득이 커지고, 소비력이 올랐으며, 기술도 고도화되었다. 마냥 즐거운 일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선진국이 되었다는 것은 경제성장률이 하락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저성장 국가일 때는 투자만 적절하게 하면 급속한 경제성장이 가능하다. 그러나 경제 규모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성장률이 하락한다. 한국의 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 5%대에서 2010년대 초반 3%대, 2010년대 후반 2%대로 하락했다. 최근에는 2%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성장률 하락, 즉 총수요 증가의 정체가 기업에 의미하는 것은 수익성 약화다. 수익이 줄거나 수익률이 떨어지면 신규 투자가 감소하기 마련이다. 투자는 불확실성이 동반되는 행위이기 때문에 예상수익률이 하락하면 기업들은 투자를 망설인다. 투자 감소는 좋은 일자리 창출 능력의 축소와 혁신역량 쇠퇴를 초래한다. 이로써 저가격을 경쟁력으로 삼는 나라들에겐 한국을 추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그런 나라의 업체들이, 한국이 점유했던 시장으로 밀고 들어온다. 한국 기업의 수익성은 악화된다. 과거 한국이 유럽과 일본을 위협했듯 중국이 지금 한국에게 그렇게 하고 있다.

이제 한국 기업들의 투자율이 얼마나 떨어졌는지 살펴보자. 〈그림 1〉은 키스밸류(Kis-Value·한국신용평가가 제공하는 기업 분석 및 연구 프로그램) 데이터를 기반으로 제조업 기업들의 유형자산 투자율을 계산한 수치다. 각 연도에 표시된 수치는 해당 연도의 유형자산이 직전 연도에 비해 얼마나 늘었거나 줄었는지 표시한다. 〈그림 1〉에서 대기업(재벌 소속 계열사와 중견기업)을 보면, 2006~2016년엔 유형자산 투자율이 7%대 중반~10% 사이에서 등락하다가 2017년 이후엔 대체로 2%대를 기록하고 있다. 유형자산 자체는 늘었지만 ‘늘어나는 정도’가 크게 떨어졌다는 의미다. 그러나 2021년과 2022년엔 유형자산 투자율이 각각 –1.8%로 음(陰)의 수치다. 유형자산이 직전 연도보다 오히려 감소했다.

최근 10년 사이 ‘뭔가’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기업의 설비투자 감소는 민간에서 창출하는 좋은 일자리가 현저히 줄어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 기업들은 해외에도 많이 투자한다. 해외 투자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해외에 공장을 건설해 생산활동을 벌이는 ‘제조업 투자’, 다른 하나는 외국의 주식, 채권 등 금융자산을 사고파는 ‘포트폴리오 투자’다. 이 같은 한국의 해외투자는 2015년을 기점으로 크게 달라지는 양상을 나타낸다.

〈그림 2〉를 보면, 한국 기업들의 해외투자가 2015년을 전후해서 크게 증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5년 이전의 해외투자는 주로 한국 제조업체들이 국내 인건비 상승에 대응해 아시아 국가, 특히 중국에 역외생산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중국 시장을 개척하려 했다. 2015년 이후엔 중국 비중이 현저히 줄어들면서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미국 등을 새로운 생산기지로 삼게 된다.

이쯤에서 〈그림 2〉에 〈그림 1〉을 교차시켜 관찰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2015년은 한국 조선업 붕괴 및 자동차산업 산출 감소가 급속히 진행된 시기다. 두 업종의 산출 감소는 일반기계(부품 공급), 철강, 1차 금속 등의 산업까지 강타했다. 이로써 한국의 ‘전통 제조업’ 부문의 침체가 본격화된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부터 한국 제조업체들의 해외직접투자액이 크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변화가 있다. 2015년 이후 해외투자에서 금융투자의 규모가 제조업 투자를 추월했다는 점이다. 해외 현지에 공장을 세우거나 외국 기업 인수로 생산기지를 건설하는 데 사용하는 돈보다 외국의 주식이나 채권 등 금융자산을 매입하는 금액이 더 커졌다. 2015년 이후 해외 금융투자를 주도한 것은 주요 금융기관이 운영하는 펀드였다. 최근엔 개인들의 해외 주식 매입이 해외 금융투자 증가의 주된 요인이다. 이른바 ‘서학 개미’가 이 부문의 주류로 등장했다는 의미다. 제조업 해외직접투자 증가 및 국내 설비투자 감소, 해외투자 가운데 금융투자 증가는 국제수지의 변화와도 큰 관련성이 있다.

‘자본가 국가’의 ‘시민 주주’들

큰 폭의 해외투자 증가는, 한국이 자본 수출국으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경상수지에서 무역수지만큼이나 본원소득수지(특히 자본수지)의 비중이 커졌다(편집자 주: 경상수지는 국제거래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돈’에서 ‘한국으로부터 나간 돈’을 뺀 차액이다. 전자가 많으면 경상수지 흑자, 후자가 많으면 경상수지 적자다. 경상수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항목이 무역수지와 본원소득수지다. 외국에 상품을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은 무역수지, 해외 투자로 받는 배당금과 이자는 본원소득수지에 속한다).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로 출근하는 직원들. ⓒ시사IN 조남진

한국은행에서 발표하는 경상수지 흐름을 보면 2017년 이후 무역수지가 급격히 감소한다. 반면 금융투자 및 제조업 현지 투자에 따른 본원소득수지는 꾸준히 상승하더니 2019년에는 100억 달러를 훌쩍 웃돌았다. 심지어 2022년과 2023년엔 무역수지가 적자인 반면 본원소득수지는 각각 200억 달러와 300억 달러를 넘겨 해당 연도의 경상수지가 가까스로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과거 한국은 해외로부터 수입한 자본에 국내 노동을 결합시켜 재화를 생산했다. 이를 수출해서 해외에 이자를 갚거나 원금을 상환했다.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한국이 노동자 국가에서 ‘자본가 국가’로 변모한 것이다. 이는 엘리트와 상층 중간계급만이 아니라 정규직 노동자들이 모두 주식에 투자하며 ‘서학 개미’로 등장한 시점과 겹친다. 오늘날 한국의 고소득 노동자들은 ‘자본가 국가’의 ‘시민 주주’들이다.

이 같은 변화는 한국인, 특히 노동자와 서민들의 삶을 어떻게 바꿨고 바꿔나갈 것인가? 〈그림 3〉은 최근 5년간 배당이 진행된 대기업의 배당률과 노동소득분배율 추이를 나타낸다. 기업의 생산과정에서 창출된 부가가치에서 노동의 몫인 임금총액(노무비·총급여·퇴직적립금·복리후생비 등)의 비율을 노동소득분배율이라고 한다. 배당률은 사내유보금이나 이익잉여금 중 주주에게 배당되는 금액을 총주식 수로 나눈 수치다. 〈그림 3〉에서 배당률은 2020~2021년을 기점으로 크게 상승하는 반면 노동소득분배율은 오히려 하락한다. 제조업 배당률은 전 산업의 평균을 훨씬 웃돌지만 추이는 같다. 이 글을 읽는 독자 가운데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잉여자산을 주식에 투자한 투자자가 있으시다면, 이 그림을 보고 어떻게 느끼시는가?

노동소득분배율 하락이 반드시 취업자(‘고용되어 있는’ 노동자)의 임금 하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통계수치에서 임금 몫의 총액은 ‘고용된 노동자 수와 평균임금의 곱’이다. 취업자들의 임금이 오른다 해도 취업자 수가 더 크게 줄어든다면 개별 기업의 노동소득분배율은 하락한다. 어떤 대기업이 매출과 수익성이 상승하는 가운데 고용 중인 노동자 임금은 올리지만 신규고용을 피하거나 자연 감소 인원을 충원하지 않는다면, 해당 업체가 생산하는 부가가치 중에서 노동자들의 몫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대기업들은 유형자산 투자율이 꾸준히 내려가는 가운데서 앞으로는 배당률을 높이고 자사주 매입·소각을 더 늘릴 가능성이 크다. 주주들 입장에선 기업의 장기적 성장보다 당장 주가 상승을 바랄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시민 주주(유권자)들을 배려해서 여야 모두 ‘주가 올리기’나 금융소득에 대한 과세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대기업들의 장기적 경쟁력과 국가경제 차원에서는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그동안 한국 경제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던 동력은 기업들의 공격적 투자였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상승 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생산설비를 자동화시켜버린 측면도 있다. 그 의도가 어떻든, 이런 설비투자의 증가는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 산출을 증가시켰다. 그런데 〈그림 1〉에서 보듯이 이런 메커니즘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공격적인 투자로 잘 알려진 한국의 성장모델은 설비투자율이 크게 감소하면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있다. 2020년 이후 그 경향은 더욱 짙어진다. 재벌 집단의 핵심 기업들은 신규 투자를 줄였고 계열사들에 대해서조차 독립된 생존을 요구할 만큼 기업집단이 규모 확대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쪽으로 선회했다. 더불어 해외직접투자가 국내 투자를 대체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여길 수도 있는 점은 설비투자 증가율이 감소하는 상황에서도 연구개발 투자액의 비중이 올랐다는 정도다. 한국평가데이터의 자료에 따르면, 제조업 부문의 대기업(배당하고 있는)들에선 연구개발이 꽤 활발하다. 매출액 대비 연구개발 투자액의 비중이 2012년 평균 1.77%에서, 2016년 2.03%, 2023년 2.31%로 상승했다(〈그림 4〉 참조). 이는 국민소득 계정의 총고정자본형성에서도 나타난다. 지식재산권 등 무형자산 투자 비중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일반 노동자와 시민들이 반드시 반길 소식은 아니다. 이미 설비투자 증가율의 감소는 생산직의 신규고용이 매우 제한적으로만 이뤄지도록 하고 있다. 연구개발 투자액의 증가를 감안하면, 기업들이 새롭게 발굴한 투자 영역은 고부가가치 산업 진출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업이 성장하더라도 한국 내에 공장을 더 짓거나 고용을 확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으로 이어진다. 기업들이 자본 파업에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동맹군’은 일반 노동자에서 지식노동자로 교체되고 있다.

수많은 시민들이 주가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이에 한국 대기업들은 엄청난 구조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도 미국과 유럽 기업들처럼 연구개발이나 고부가가치 분야에 집중하고 생산기지는 역외에 두는 경향이 더욱 심화될 경우, 지금까지 보유해온 국내 제조 역량도 장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대기업의 신규고용은 주로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고급 인력에 쏠릴 것이다. 제조업에서조차 일반 노동자들에게는 고용 없는 성장의 고통이 주어지고, 유명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에게만 고임금 일자리가 제공되는 신세계가 한국의 노동자와 시민을 덮치고 있다.

남종석 (경남연구원 연구위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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