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윤찬 손 따라 흐르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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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축제 시즌 개막
플라톤이 그랬다. 음악은 우주에 영혼을, 정신에 날개를, 상상력에 비상을, 그리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다고. 봄이 되면 클래식 축제가 기지개를 켜는 것도 겨우내 움츠렸던 영혼을 깨우는 힘이 음악에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아시아의 잘츠부르크페스티벌’로 불리는 통영국제음악제는 과연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난달 28일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라흐마니노프 2번을 협연한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의 개막공연부터 통영은 활기로 가득찼다. 임윤찬이 종지기가 되어 먼 곳에서부터 밀려드는 파도와 같은 ‘타종’으로 클래식 축제 시즌의 대항해가 시작되었음을 선포했다. 때마침 통영에선 벚꽃이 봉오리를 터뜨리고 있었다.
2002년 시작해 아시아 최고의 현대음악축제로 성장한 통영국제음악제의 올해 열기는 유별나다. 음악제의 정체성인 현대음악가 윤이상 30주기이기도 하지만, ‘통영의 아이콘’이라 할 임윤찬이 상주연주자로 참여했기 때문이다. 2019년 통영에서 열린 윤이상콩쿠르에서 15살 나이로 역대 최연소 우승을 하며 존재감을 알린 뒤 어느덧 세계를 누비는 연주자로 발돋움한 임윤찬이 금의환향한 셈이다. 진은숙 예술감독은 “임윤찬에겐 통영이 고향 같은 곳이라 친정에 오는 느낌으로 기쁘게 함께했다”고 밝혔다.
2022년 반클라이번 콩쿠르 우승 당시 임윤찬은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 연주에 대한 소망을 말해 주목받았는데, 지난달 30일 리사이틀 프로그램이 바로 골드베르크 변주곡이었으니 더욱 특별했다.
어쩌면 300년 전 사람인 바흐와 밀당을 하며 한바탕 2인무를 추는 느낌이었는데, 음악학자 진회숙은 “임윤찬의 로맨틱한 해석도 좋았지만 새삼 후대 연주자들에게 주관적인 해석을 열어놓은 바흐가 위대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혹시 음악제란 죽은 작곡가들의 영혼을 일제히 흔들어 깨우는 제의가 아닐까. 실제로 임윤찬이 지난해 버르토크 콩쿠르 우승자인 음악의 벗 이하느리에게 위촉한 5분짜리 신곡 ‘Round and velvety-smooth blend...’로 리사이틀의 문을 연 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가장 중요한 곡을 연주할 때 현 시대를 살아가는 유망한 작곡가의 곡이 함께 연주되면 의미가 있겠다”는 그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매년 세계적인 지휘자와 협업하는 TFO도 올해 더욱 특별해졌다. 프랑스 지휘자 파비엥 가벨과 스위스 베르비에 페스티벌 상주 악단인 베르비에 페스티벌 체임버 오케스트라가 협업해 세계 정상급 연주력을 보여준 것. 임윤찬과의 개막 공연 외에 지난달 29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대한 교향시 ‘영웅의 생애’로 다이내믹한 음향적 스펙터클을 과시했고, 6일 지휘자 성시연이 이끄는 벤자민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이 폐막 공연으로 남아있다.
현대음악제라는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충실하다. 5일 ‘피에르 불레즈를 기리며’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현대음악 거장 피에르 불레즈가 만든 앙상블 앵테르콩탕포랭 공연으로, 피아노 3대와 하프 3대 편성 등 좀처럼 보기 드문 본격 현대음악 무대다. 개막 후 3일간 상영된 필리프 그라마티코풀로스의 단편영화들도 흥미로웠다. 조지 오웰, 프란츠 카프카 등에 영향받은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이 대사 한마디 없이 조지 크럼, 피에르 셰페르, 이보 말렉 등 거장들의 음악으로 섬뜩하게 제시되며 현대음악의 존재감을 웅변했다.
1989년 시작된 교향악축제는 지방 자치단체들의 교향악단 창단 붐을 일으키며 국내 교향악 발전에 기여한 의미있는 행사다. 2000년부터 25년간 ‘한화와 함께하는 교향악 축제’라는 이름으로 지속됐던 한화 그룹의 단독 후원이 종료되고, 올해는 ‘The New Beginning’이라는 부제 아래 예술의전당이 홀로서기에 나섰다. 20일까지 18개 악단이 매일 콘서트홀을 채운다.
후원사의 부재는 자생력을 찾을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예술의전당은 ‘세계적인 페스티벌로 도약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는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역대 최다 해외 협연자를 섭외했다. 2024 윤이상콩쿠르 우승자인 바이올리니스트 차오원 뤄(4일 수원시향), 일본 대표 바이올리니스트 사야카 쇼지(6일 KBS), 2023 부소니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아르세니 문(13일 전주시향),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최연소 첼로 수석을 역임한 이상 엔더스(28일 서울시향) 등이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타격도 있지만 운영의 묘를 살려 공연 퀄리티와 서비스는 동일하게 제공한다. 1만~5만원으로 저렴하게 유지되던 티켓가격도 B석을 1만원에서 2만원으로 올렸을 뿐”이라고 밝혔다.
교향악축제는 각 단체가 현재 가장 자신있는 레퍼토리로 경쟁하는 장이다. 한정호 평론가는 “음악은 경쟁이 아니지만 오케스트라는 경쟁으로 발전한다”면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합을 지역 팬의 온정적인 지지를 넘어 중앙 무대에서 경쟁하며 악단의 발전을 확인하는 척도가 된다”고 말했다.
올해는 라벨과 쇼스타코비치를 중심으로 경쟁구도가 형성됐다. 창원시향(1일)과 인천시향(2일), 부천필(11일)이 라벨을, 창원시향(1일)과 청주시향(9일), 대전시향(12일)이 쇼스타코비치를 깨운다. 관현악단에게 대표적인 ‘도전의 아이콘’ 말러도 강남심포니(8일)와 부산시립(17일), 경기필(20일)의 삼자대결 구도로 여러 번 깨어나야 한다.
정한결(2일 인천시향), 데이비드 이(8일 강남심포니), 윤한결(10일 국립심포니), 김선욱(20일 경기필) 등 80~90년대생 젊은 지휘자들의 대결도 흥미롭다. 2023 카라얀 콩쿠르 우승자 윤한결이 나서는 국립심포니 공연과 광주시향에서 자리를 옮긴 홍석원이 갈고닦은 말러 교향곡의 깊이를 보여주는 부산시향(17일), ‘부소니 만장일치 우승’ 피아니스트 아르세니 문의 잠재력과 지역 악단으로서 관현악 대곡 브루크너 교향곡 9번에 도전하는 전주시향(13일)도 주목할 만한 공연으로 꼽힌다.
스무 살이 된 올해는 숫자 20을 활용한 프로그램 등 14개의 기획 공연이 13일간 펼쳐진다. SSF의 시그니처인 사적 438호 윤보선 고택에서 열리는 ‘고택음악회’는 26일 졸리베의 플루트·바순·하프를 위한 크리스마스 목가극, 프라이스의 피아노 5중주, 드보르작의 성서의 노래 Op. 99, 멘델스존의 피아노 3중주 제2번 등 성스러운 작품들만 모았다.
황 평론가는 ‘4중주가 연주하는 5중주’(24일)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했다. 브람스 현악 5중주,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5중주 등 최고의 명곡들을 아벨 콰르텟, 아레테 콰르텟 등 현재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젊은 4중주단과 베테랑 솔리스트들의 호흡으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퍼스 20’(27일)은 20주년에 걸맞게 작품 번호 20으로만 이뤄진 공연으로, 역시 아벨 콰르텟과 아레테 콰르텟 등이 함께한다. 황 평론가는 “베토벤의 젊은 시절 출세작인 클라리넷·바순·호른·바이올린·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위한 7중주와 신동 시절 멘델스존의 경이로운 현악 8중주는 실내악의 새로운 차원을 경험하게 해줄 것”이라고 말했다.
통영=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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