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사우디·한양아파트… 오일머니 속 韓현대사
1970년 중동특수 성장한 韓경제
사우디 떠난 아버지 이야기 묶어
석유자본 대한 굴곡진 역사 꺼내
실사와 생성형 AI 기술 등 섞어
구겐하임賞 수상하며 이목 집중
모든 것엔 ‘그것’이 있었다. 인류가 한정된 자원 속에서 불안을 호흡 삼아 살게 된 데는. 중동 지역의 끊이지 않는, 끝나지 않을 분쟁에는. 또 사우디아라비아에 한국식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겨나고, 한국 경제가 이른바 ‘중동 특수’로 1970∼1980년대 급격한 성장을 이룬 것에는. 그래서 그 시절 적지 않은 한국 어린이들이 대추야자의 달고 찐득한 맛을 기억하게 된 데는, ‘석유’가 있었다.
지금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46·사진) 작가도 그 ‘어린이’ 중 한 명이다. 1970년대 후반에 태어난 작가의 유년은 먼 나라에서 아파트를 짓고 있다는 아빠를 1년에 두어 번 김포공항에서 기다리던 기억으로 점철돼 있다. 당시 한국의 건설사들은 앞다퉈 중동으로 ‘진격’했고, 한양건설 직원이던 작가의 아버지도 그 무리에 있었다.
최근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개막한 ‘플롯, 블롭, 플롭’(Plot, Blop, Plop)은 석유를 매개로 한 다층적 서사를 확인할 수 있는 전시다. 김 작가는 신작 영상 ‘알 마터 플롯(AI-Mather Plot) 1991’을 공개했다. 다학제적 연구와 탐색을 통해 영상, 사운드, 텍스트, 퍼포먼스를 넘나들며 작업해 온 김 작가가 처음으로 개인사를 전면에 드러낸 작품이다. 28분가량의 영상에는 작가가 가족 앨범에서 꺼내 온 사진, 직접 현지를 방문해 찍은 영상, 생성형 인공지능(AI)과 게임 엔진 애니메이션 등 전통 기법과 첨단 기술이 적절히 섞여 있다. 다소 발음이 어려운 전시명은 ‘구획, 방울, 퐁당’이라는 뜻. ‘석유’를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인류의 역사가 특정 지역의 이야기, 어느 개인의 기억과 복잡하게 맞물려지는 과정을 지켜보다 보면, 제목이 지닌 의미에도 흥미가 생긴다. 김 작가는 “이야기의 구성을 뜻하는 플롯은 도면이나 땅을 나누는 구획, 음모나 작전이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블롭과 플롭은 석유라는 액체 방울, 또 그것이 낙하하며 내는 소리를 상징한다”고 했다. 이어 “석유가 매개했던 역사, 아파트 도면이 시사하고 있는 중의성, 그 장소가 교차해내고 있는 기억들을 끄집어내려고 했다”며 작업 동기를 밝혔다.
신작이지만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으며 마무리이기도 하다.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에 당시 한국 작가 중 최연소로 참여했던 작가는 설치와 퍼포먼스를 통해 문명사 속 석유의 자본화를 고찰한 바 있다. 이른바 ‘제페토’ 3부작으로 불리는 기존 석유 시리즈가 사운드 중심의 퍼포먼스였다면, 이번 작품은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버전인 셈이다. 영상을 보고 나면 ‘제페토’의 세계가 탄생한 근원에 자리한 작가의 가족사를 알게 되는 묘미가 있다. 짧은 다큐멘터리 같기도 한 작품에는 작가의 내레이션이 쉬지 않고 흐른다. 현지를 방문해 직접 촬영한 아파트의 풍경과 애니메이션 등으로 구현한 도면, 입주민 등 다양한 인물과의 인터뷰 등이 국가주도로 중동에 파견됐다가 귀국한 건설 인력들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한양건설이 수주했던 알 마터 아파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대규모 주택단지로 당시 교민들에겐 ‘한양아파트’로 통했다. 걸프전 때는 쿠웨이트 난민들의 피난처가 되면서 ‘쿠웨이트 아파트’로 불리다가, 현재는 주로 중산층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작품명 속에 ‘1991’이 들어간 것도 이 작품을 읽는 핵심 요소다. 중동에 파견된 한국 건설 인력들은 걸프전 발발로 1991년 대거 귀국한다.
지난해 ACC미래상을 수상하며 가상의 미래 서울을 배경으로 한 ‘딜리버리 댄서의 선: 인버스’를 선보인 김 작가는 주로 AI를 활용한 영상 작품을 선보이며 ‘디지털 혁신’의 최전선에 선 아티스트로서 평가받는다. 지난 2월부터 독일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으며, 5월에는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 기획전에 참여하고, 11월엔 미국 현대미술관 모마에서도 전시가 예정돼 있다. 게다가 얼마 전 한국인 최초로 LG구겐하임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됐으니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가라도 해도 과장이 아니다. 그러니 더욱 놓쳐선 안 될 전시. 만약 ‘딜리버리 댄서’ 시리즈로 김 작가를 알게 됐다면, 뚜렷한 서사와 아날로그적 감성이 깃든 이번 신작이 오히려 새롭게 느껴질 것이다. 만약 김 작가를 몰랐다면, 한 개인의 가족사와 한국 현대사가 녹아있는 이번 작품으로 자연스럽게 작가에게 ‘입문’하게 될 것이다. 관람은 무료, 전시는 6월 1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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