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라도 ‘보아야 한다’는 우주적 메시지 [.txt]

임인택 기자 2025. 3. 28.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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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시현 작가 등단작 수록 첫 소설집
지구 절멸기 ‘인간의 본질’과 ‘선택’ 탐구
414명 작가 성명서 헌재에 “시민들 얼굴을 보라”
조시현(33) 작가는 27일 한겨레와 전화 인터뷰에서 “기계적 사고방식이 광장의 폭력뿐만 아니라 세계 폭력과도 맞닿는다”며 “다른 생명에 가하는 폭력, 작금에 여성, 노동자, 장애인, 어린이들에게 가해지는 관성적 폭력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에서 소설로 이어지는 문제의식을 두고 한 말이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기계 할배들이 광화문으로 간다”로 시작하는 시의 제목은 ‘기계적 풍경의 디스토피아’다.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로/ 할배의 역할을 다하러” 간다는 것이다. 이어 시는 목도한다.

“기계는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대신해줍니다/ 더럽고 어렵고 위험한// 기계 할배들이 항문에 기름을 넣는다//…// 역할을 빼앗긴 휴먼들이 길거리를 배회한다/ 할배 됨을 빼앗겼기 때문에 그들은 뭔가 다른 휴먼이 되어야 하고/… // 그들은 다시 할배의 자리를 되찾고 싶었다”고. 작중 25세기다. “기계 할배들은 국민 체조를 하고 기계 남자들은 선거를 한다”, 물론 “기계 여자는 아직 만들지 않았고”. “피가 뜨끈하다/ 나 생명이라는 말 아주 싫어해요// 한편 나라가 디비진다/ 괜찮아요 기계 외국인도 있거든//…// 바닥에 귀를 대면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안전하고// 합리적이란 말 싫어합니다// 기계 지구가 오늘도 무사합니다”

조시현 작가의 첫 시집 ‘아이들 타임’(2023)에 수록된 이 시는 다른 여러 시들과 시공간을 공유하며 ‘지구 절멸기’라 해도 무방할 25세기 중반의 지구-인간상을 시전한다. 다만 이 미래란 게 다분히 과거적이다. 가령, 표제시 ‘아이들 타임’도 미래(2888년)의 슬픔과 그리움이되 과거(2500년대)로부터 발신된 것.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라는 시구의 함의대로다. 하물며 기계적 합리주의로 국민을 육성(체조)하고 국가를 구성(선거)한다는 시대는 과거인가, 미래인가. 그 세계를 떠받치는 2444년 광화문 기계들은 당최 뭐란 말인가.

조시현의 작품에서 디스토피아는 결국 인간에 의해 ‘선택된’ 과거이므로, 작가는 반복하여 묻는 자가 된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는가. 인간은 무엇으로 인간인가.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l 조시현 지음, 문학과지성사, 1만8000원

2018년 소설, 2019년 시로 등단한 조 작가의 소설집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은 ‘휴머니티’와 ‘선택’에 관한 더 노골적이고 우주적이며 우화적이고 기묘한 질문들이다. 수록 단편으로 ‘동양식 정원’ ‘중국식 테이블’ ‘파수 破水’가 기묘한 현재라면, ‘어스’ ‘무덤 속으로’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등은 노골적 미래(와 다름없는 과거)이기도 하다.

주제·형식에서 가장 선명한 작품으로 ‘어스’를 꼽아본다. 지구가 인간에 의해 위태로운 2074년이 배경이다. 욕망도, 정쟁도, 전쟁도 원인이진 않다. 인간 자체가 문제다. 화학 물질에 찌든 육신이 더는 썩지 않고 지구를 오염시킨다는 연구 결과에 따라 정부는 매장을 금지한다. 지구 오염이 임계치에 달한 탓이다. 맨살로 자연과 접촉하는 것도 안 된다. 다섯 달 남짓 해가 뜨지 않고, 맨손으로 심은 씨앗이 발아한 마지막이 20년 전 일이다. “인간을 매장하는 것이 쓰레기-혹은 그보다 더 나쁜 것-를 묻는 것이나 다름없다”. 출산도 곧 통제될 판이다. 응당 더 벌어지는 계급 격차. (노후한 디젤 트럭을 교체할 수 없는 당대 영세사업자처럼) 친환경 주거지로 이주 못 하는 빈자들은 환경오염 책임이 큰 구식 주거단지에 살며 “비난과 비용”을 감수한다. 요행히 공장 노동자인 ‘여리(나)’와 ‘안나’는 저소득층 지원 단지로 이주해 살림을 차렸다. 낙천적이며 요령 좋은 안나가 먼저 다가와 준 덕에 연애를 시작할 수 있던 여리는 되뇐다. “나는 항상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미래를, 다음에 올 것을. 매번, 매번, 매번, 쉴 틈 없이. 생활을 애썼고,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게 너와 함께 살아가게 될 미래였기 때문에, 정말이지 열심히 했어.”

안나는, 그리고 죽는다. 사체는 특수 방호복을 갖춘 ‘수거원’만 접근할 수 있는 매립지에 묻힌다. 안나 또한 피할 수 없는 곳. 문제는 유약한 소시민에 불과한 여리에게 안나가 남긴 유언이다. “존엄하게 죽고 싶어” “나를 묻어줘.”

안나는 “언제나 더 나은 것을 선택할 수 있어서 인간”이라고 말해왔다. 여리는 안나가 원망스럽다. 치명적 ‘불법 매장’의 공범자가 되길 부탁받는 친구 병주와 모란은 안나와 여리 두 ‘여자’가 원망스럽다. “너넨 정말 쌍년이야.”

단편 ‘어스’의 미래는 단편 ‘무덤 속에서’다. 지구 매장도 더는 어려워 우주에 납골당을 쏘아 보낸다. 그 ‘무덤 속에서’는 단편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의 과거가 되고 만다. 지구상에 인간의 육신은 모조리 사라진다. 기계(휴먼 슈트)에 영혼이 잠시 머무는 세태. 중요한 것은, 점증하는 종말론적 설정이 아니라, 폐허에서 ‘존엄’을 묻고 선택하려는 행위의 감각이다. ‘크림의…’에서 휴먼 슈트를 하루 단위로 빌려 입어야 하는 영혼의 처지, 본성을 조시현은 시적으로 추인한다. 우주 납골당 관리 노동자의 정동을 펼쳐 보인 시 ‘무중력 지대’ 등이 첫 시집의 뼈대이기도 한바, 시집과 소설집은 연작처럼 호응, 주석, 변주, 증폭의 관계를 맺는다.

소설이든 시든 ‘돌아가다’의 관념이 눈에 띈다. 죽음의 본뜻이거니와 본디 “돌아가야 할 곳”(소설 ‘무덤 속으로’)으로 “돌아가야 한다”(시 ‘무중력 지대’)는 테제가 작가가 구하는 생명 본위의 미래상이기 때문이리라.

“무너진 도시에 빛이 내리면/ 그것도 사랑의 풍경이 될까// 돌아갈 수 없는 것에도 / 기꺼이 신은 손을 내밀까”(시 ‘리뉴’ 중)

시의 질문은 소설에서 힌트를 얻는다. 여리와 안나의 사랑(‘어스’), 나진과 마디의 사랑(‘크림의~’)이 잿빛 소설집의 숨구멍이 되는 까닭, 자매 성연과 주연의 갈등(‘무덤 속에서’)이 그리움이 되는 까닭을 통해 독자들은 알 만해진다. 이런 작가론과 맞물린다. “작가는 역시 사랑을 발굴하는 직업이다.”(수록작 ‘‘월간 코스모스’ 6월호, 특집: 외계 문학’ 중) 보이지 않는 것을 발굴해 드러내 보이는 것이므로, “보아야 할 것을 똑바로 보고 말해야 할 것을 분명히 말할 것”이라는 소설집 끄트머리 ‘작가의 말’과도 다르지 않다.

지난 25일 ‘윤석열의 즉각적 파면’을 헌법재판소에 촉구한 414명 작가 성명에서 조 작가는 “윤석열을 지체 없이 파면하라. 촛불로 투쟁하는 시민들의 얼굴을 보라”라고 썼다. 소설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간명하다. 시·소설에서처럼 ‘보일 것을 보라’가 아닌, 바투 ‘보이는 것’이라도 바로 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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