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호의 '계시록',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건 무엇인가

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2025. 3. 24. 14:3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즈 ize 한수진 기자

/사진=넷플릭스

신념에서 비롯한 믿음은 때때로 구원이 되지만, 방향을 잘못 틀면 파멸로 향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은 그런 신념의 탈선을 파고든다. 믿음이 어떻게 광기로 변모하고, 트라우마가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특히 영화는 단순히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 인간이 자신에게 필요한 진실만을 선택하고, 그 위에 신념이라는 이름을 덧씌우는 과정을 심리 스릴러의 구조 속에 정밀하게 녹여낸다.

'계시록'의 이야기는 한 여학생의 실종사건으로 시작된다. 그 중심에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 목사 성민찬(류준열), 여학생 실종사건의 강력한 용의자 권양래(신민재), 그리고 죽은 동생의 환영에 시달리며 죄책감 속에 허우적거리는 형사 이연희(신현빈)가 있다.

성민찬은 절박함 끝에서 신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보았다"라고 말하고, "계시를 받았다"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그 확신은 이내 맹목으로 뒤바뀐다. 그는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아닌, 믿음이 완성됐다고 여긴 순간 광기에 잠식당한다. 그 광기의 실상은 공포와 죄책감, 상실과 분노가 뒤섞인 개인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서 올라온 것이다. 그리고 성민찬의 마지막 장면은, 광기가 터지는 순간이 아닌, 스며드는 순간에 가장 무섭다는 걸 보여준다.

류준열은 점점 광기로 물들어가는 성직자를 소름 끼칠 정도의 집중력으로 표현한다. 극초반의 성민찬은 다정하고 절실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의 눈빛은 점점 이성을 잃는다. '믿는다'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 확신이 될 수 있는지를, 그는 목소리와 시선, 입술 떨림 하나로 보여준다.

/사진=넷플릭스

그러나 진짜 이 영화의 심연은 권양래다. 성한 곳 하나 없는 흉터 가득한 몸이 말해주는 그의 과거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장기간 학대당한 그는, 세상 누구보다 깊고 오래된 트라우마를 지녔다. 그는 생존을 위해 감정을 억누르고, 고통을 견디는 법만을 배웠다. 상처는 그의 몸에만 남은 것이 아니라, 기억 깊은 곳에 뿌리내려 인간에 대한 신뢰와 공감 능력을 서서히 갉아먹었다.

결국 권양래는 그 고통을 되풀이했다. 자신보다 더 약한 존재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며, 자신이 겪은 끔찍한 과거를 그대로 복제해 낸 것이다. 그는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됐다. 그가 저지른 폭력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그가 어떻게 그 지점에 이르렀는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불편한 질문이기도 하다.

/사진=넷플릭스

연상호 감독은 이 단순하지 않은 악을, 실제 자신과 쏙 빼닮은 신민재라는 배우를 통해 피부가 와닿는 살결로 그려낸다. 신민재는 폭력의 흔적이 새겨진 얼굴과 낮고 무표정한 목소리로 권양래를 연기한다. 극단적인 감정 표현 없이도 그의 고통과 뒤틀린 심리를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관객이 쉽게 증오하거나 연민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권양래는 우리가 외면해 온 진짜 얼굴을 하고 있다. 가해자라는 이름 아래 감춰졌지만, 사실은 오래전부터 사회가 만들어온 비극의 총합이다.

이연희는 신념이 뒤틀린 두 인물의 관찰자다. 권양래 때문에 친동생을 잃은 그는, 자신이 경찰임에도 동생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짓눌려 살아가는 인물이다. 죽은 동생의 환영은 그에게 현실보다 선명하다. 그가 쫓는 건 사건의 실체가 아니라, 죄의 대속이다. 그는 끝내 모든 것을 마주하되, 그 과정에서 깊이 파열된다. 그리고 이 인물만이 자신을 잠식할 뻔한 신념을 벗어던지고, 가장 인간적인 결말을 택한다. 그것은 용서나 회한 같은 감상적인 감정이 아니다. 모든 걸 내려놓음으로써 구원받는 역설을 보여준다. 이연희는 그 낙진을 통과한 후에야 살아남는다.

이 작품의 공포는 귀신이나 괴물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서 솟구치는 신념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연상호 감독은 그것을 핍진성 있는 대사와 절제된 연출로 구현해 낸다. 인물들의 광기는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오히려 그 현실성 때문에 더욱 섬뜩하다.

Copyright © ize & iz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