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이 비운 중도·보수…이재명은 합니다, 구경만[한기호의 정치박박]
석학에게 '내가 공산주의자?' 물으며 도돌이표
이재용 만남도 無반전…"소름 섹시" 아첨 각인
'대행의 대행 탄핵', 尹과 '극단의 저울' 평형行
170석 쥐고 헛심만…중도·보수 반대편 질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민주당은 성장 중시 중도보수' 발언이 한달을 넘겼다. 이재명 대표는 지난달 18일 친(親)민주당 유튜브 '새날'에서 "저희는 진보가 아니다, 중도 보수 포지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 이튿날 국회 기자들을 만나서도 "민주당은 원래 진보 정당이 아니다. 성장을 중시하는 중도 보수 정당"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MBC '100분 토론'에선 "건전한 보수, 합리적 보수의 역할도 우리 몫이 돼야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국민의힘을 "범죄 집단"으로 규정하면서다. 친윤(親윤석열)계가 당권을 잡고 윤석열 대통령과 '계엄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고 극우로 치달은 빈 자리는 충분히 노릴 만했다. 화제성 측면에서도 '효과는 굉장했다'고 보인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이 대표는 '중도·보수 접수' 선언은 했지만 "우클릭"을 극구 부인했다. '이재명은 합니다'가 힘을 못 쓴데다 '도돌이표'다. 22일 저녁 역사 석학 유발 하라리와 AI(인공지능)를 주제로 대담했지만 '(한국판 엔비디아 30% 국유화 발언으로)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생각하냐'고 물은 대목부터 이목을 끌었다. 이 대표는 "산업에 대한 공공의 투자 참여를 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다가 공산주의자라고 공격을 많이 받았다. 이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했다. 하라리 교수는 "난 경제학자가 아니기 때문에"라고 말을 아꼈다. 산업에 정부 개입이 필요하다고 짚긴 했지만, 19세기 산업혁명기 아동 노동처럼 일자리시장에서 발생 가능한 문제여서 결이 달랐다.
이 대표가 지난 20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을 만났으나 중도·보수를 매료시키는 데 보탬이 됐는지 모르겠다.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에서 반도체·AI 연구개발직 주52시간 근로제 예외조항을 기어코 빼겠단 민주당이 입장을 바꾸지도 않았고, 이 회장과 논의했단 이야기도 들려오지 않는다. 민주당은 모든 주주에게 충실할 의무를 경영진에 요구하는 상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단독 처리한 터다. 경영권 공격 남발을 우려하는 경제계가 '거부권 행사'까지 요청해도 민주당은 "즉시 공포"를 압박할 뿐이다. "정부도 직접 투자에 뛰어들어야", "모든 국민이 AI를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기업이 잘돼야 나라가 잘 되고…" 이 대표가 이 회장을 만났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인가.
외려 뒤따른 명(明)비어천가가 기억에 남는다. 친명(親이재명) 최민희 의원은 21일 이 대표와 이 회장이 손을 맞잡은 사진을 SNS에 올리며 "소름돋을 만큼 섹시한 장면"이라고 반색했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으로서 "이재명·이재용 심지어 '본래 형제였다'는 영화같은 스토리형 가짜뉴스까지 돈다"고 기분좋게 전파했다. 지난해 총선 설화(舌禍)로 '이재명·조국 심판론'을 집중시켰던 김준혁 의원은 "두사람은 경주 이씨 문중으로 같은 재(在)자 항렬"이라거나 "가장 강력한 대한민국의 정치지도자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그룹 회장의 만남"이라고 거들었다. 정책 전환도, 첫 대권도전기 "삼성족벌체제 해체" 외침도 간데없이 '체급 과시'만 남았다.
이 대표의 중도·보수 접수 선언은 21일부로 종언을 맞았다고도 본다. 민주당 주도로 5개 야당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총리 직무대행 겸 부총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했다.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심판 선고를 헌법재판소가 24일 월요일로 예정해 '실익'이 없는데도 밀어붙였다. 윤 대통령이 제도권 정치 무능에 따른 불만을 12·3 비상계엄 선포 강행으로 표출해 '선'을 넘어버렸듯, 제1당도 여차하면 '대행의 대행의 대행민국'을 만들겠단 겁박이다. 이 대표가 최 대행을 향해 19일 근거 불분명한 "현행범 체포"와 "몸조심하라"고 신변을 겨눌 때부터 '극단의 저울'은 윤·명 사이서 흔들리고 있었다. 이 무렵 민주당은 '초조·불안'이란 언론발 해석도 지우려 했다.
이 대표의 공직선거법 2심 선고 하루 앞인 25일로 못박고 대통령 파면 선고를 요구하는 것도 자발적 여론 형성과 거리가 멀다. 민주당은 계엄 내란행위의 가부(可否)를 따지는 정국 내내 과속을 요구했다. 여당 주류가 등진 중원(中原)에 민주당 역시 발을 들인 적 없다. 투표불성립된 윤 대통령 1차 탄핵안부터 "북한과 중국·러시아를 적대시"했다는 사유를 담는 등 밑천을 드러냈다. 12·3 계엄 전이든 후든 극좌 통진당 계열 인사들과 연대하는 '탄핵 집회' 동원을 반복해 확장력을 스스로 떨어뜨렸다. 의회폭주를 지적하면 계엄 반대자여도 '내란세력'으로 싸잡고, 탄핵심판에서 '내란죄'를 가벼이 다뤘다. '내란'을 전범·종북만큼 식상한 말로 마모시킨 게 그들이다.
"중도코스프레"를 비웃던 과거를 차치하고 이 대표는 중도·보수를 접수해볼 기회가 있었다. 보수정당이 할일을 빼앗아와 잊히게 했다면. 단독 170석으로서 '여력'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기본사회와 민생연석회의 60개 정책과제 포장갈이가 아닌 내용물을 고민하고, 상속세·기업경영·근로시간으로 다투는 상대가 국민의힘이 아닌 강성진보였다면 판이 달라졌을 것이다. 금투세 폐지도 마무리는 다수당이 했는데 생색을 못 냈다. 이 대표는 한 보수논객과 만나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탄핵·형사재판 '재심' 요청에도 귀를 기울였다. 문재인 정부 시절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명박·박근혜 사면'을 거론한 것에 비해 훨씬 과감한 태도다. 그러나 민주당은 최 대행이 박근혜 청와대 비서관이던 10년 전 대기업에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을 강요했다며 '국정농단'을 죄목으로 댔다. '중도·보수 하겠다니 진짠줄 알더라' 한편의 소극을 본 기분이다.
한기호기자 hkh89@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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