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벨경제학상이 놓친 동아시아 기적의 비밀
올해 노벨경제학상은 포용적 제도의 중요성을 연구해 밝힌 다론 아제모을루 미국 MIT 경제학과 교수, 사이먼 존슨 MIT 슬론경영대학원 교수, 제임스 로빈슨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 등 3인이 받았다. 이들의 수상 업적은 제도의 발달을 정치적 민주주의 지수로 수량화하고, 이 변수가 경제 성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준 계량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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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상자들, 제도 발달 유달리 강조
이들 연구가 한국엔 잘 안 맞아
기업들이 동아시아 기적의 핵심
」
이들의 논문 서론은 남북한을 비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한국 사례는 이 이론에 잘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국의 경우는 개발독재로 경제성장을 어느 정도 이룬 뒤에야 민주주의로 갔기 때문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선진국을 정의하는 중요한 기준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후발국의 경제성장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서구적 자유민주주의를 쭉 유지해 선진국이 된 나라는 없다.
동아시아의 공통적 경험은 개발독재라는 권위주의 단계를 거친 뒤에야 민주주의로 발전한 일종의 우회적 경로인데 이들은 놓치고 있다. 그렇다고 권위주의 독재가 모두 경제성장을 낳은 것도 아니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기적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국의 경우 개발독재는 좋은 교육과 일자리를 갖춘 중산층을 창출했고, 1987년 ‘넥타이 부대’가 상징하듯이 민주화 과정 자체가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사실 이러한 평화적 민주화야말로 정치적 기적이라고 할 만한 대단한 성과다. 동아시아의 개발독재는 다른 독재와는 달리 국민에게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포용적이었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교수 등의 연구 역시 한국을 사례로 들면서 아제모을루 교수 등이 제시한 제도 변수가 통계적으로 강건하지 않으며, 오히려 교육 등 인적자본 변수가 더 유의미한 변수임을 증명했다.
빌 게이츠도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책에 실망했다고 했다. 즉, 어떻게 포용적 제도를 실시할 것인가에 대한 유용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실패에 대해 비판만 한다는 지적이다. ‘아랍의 봄’으로 민주화를 달성한 나라들이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다시 독재로 회귀하고 있는 사례는 경제성장과 물질적 기반 없이는 민주화 자체가 뿌리를 내릴 수 없음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기적의 또 하나 핵심 변수는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시장에서 선진국 기업과 경쟁하는 초우량 대기업의 등장이다. 아제모을루 교수 등은 정경유착 등 대기업의 부정적 측면만 부각하고 공헌을 굳이 외면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필자는 일찍이 중진국 함정을 벗어나는 핵심 변수는 경쟁력 있는 대기업의 창출임을 계량적으로 입증했다. 즉, 제도가 아니라 기업이 동아시아 기적의 핵심이다. 세계 최대 민주주의 국가인 인도와 세계 최대 권위주의 국가인 중국은 1980년 1인당 실질 소득이 미국의 5%도 안 되는 빈국이었다. 지금 중국은 미국의 30%에 도달했으나 인도는 15%가 안 된다.
그동안 중국은 포춘 500대 기업을 130개 이상 창출해 미국을 넘보고 있다. 반면 인도는 유니콘은 많이 창출했지만 포춘급 기업은 10개 미만으로 대만보다 적다. 한국은 15개 내외로 한국·대만 모두 경제 규모보다 더 많은 대기업을 창출했고 바로 이 덕분에 선진국이 된 것이다. 서구학자들이 내세우는 제도 중시론은 워싱턴 컨센서스, 즉 시장개방과 금융 자유화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접근이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의 측면이 있다. 워싱턴 컨센서스 처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좋은 처방을 주었는데 너희들의 토양 즉, 제도가 안 좋고 부패하거나 독재라서 효과가 없었다’는 논리다.
워싱턴 컨센서스는 성공하지 못했고, 폐기됐다. 대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가 짚었듯이 한국은 시장개방과 자유화도 기업들의 실력이 올라간 뒤에야 했다. 그 이후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는 등 가장 개방된 경제라는 점에서 또 하나의 우회 전략이다. 그런 한국도 자본시장을 자유화한 직후 외환위기에 빠졌었다.
요컨대 민주주의 제도와 시장 개방은 후발국 경제성장의 충분조건이라기보다 필요조건이었다. 동아시아가 실패하지 않고 성공한 원인은 개발독재와 기업 육성 후에야 민주화와 개방으로 간 우회 전략 때문임을 노벨상 수상자들은 모르고 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이근 서울대 경제학과 석좌교수·한국경제학회 수석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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