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참군인 정우성·정해인…실제 삶은 더 참혹했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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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5일 만인 26일 189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1979년 12월12일 주도한 군사 반란이 벌어진 9시간에 집중한 영화다. 영화가 사실을 바탕으로 두고, 영화적 상상력으로 허구적 요소를 가미하다 보니 관람 뒤 실제 역사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있다. 서울 한복판에서 반란 세력과 군이 대치하거나, 반란 세력과 총격전을 벌이다 사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당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은 ‘진짜 있었던 일이냐’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영화와 실제 역사는 얼마나 같고, 또 다를까.
※기사 내용에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역사 속 정우성은 강제 예편…일가족은 풍비박산
영화에서 전직 대통령 전두환씨를 연상케 하는 극 중 전두광(황정민)이 이끄는 군사반란에 끝까지 맞선 사람으로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정우성), 공수혁(정만식) 특전사령관, 김준엽 육군본부 헌병감(김성균)이 부각된다. 실제 역사에서 전두환 세력과 맞섰던 세명의 장성인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정병주 특전사령관·김진기 육군 헌병감을 모티브로 한 인물들이다.
특히 영화는 전두광과 맞선 이태신의 갈등을 축으로 진행되는데, 이태신이 신군부 세력들에게 “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밀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를 뭉개버릴 테니까”라고 호통치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시사저널이 2006년 공개한 장태완 사령관의 ‘육필 수기’를 보면 당시 그는 자신을 회유하려던 반란 세력과의 전화통화에서 욕설과 함께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의 대가리부터 깔아뭉갤 것이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영화 속 이태신은 반란군을 대하는 장태완 사령관의 언행과 태도가 대부분 반영된 인물이다.
반란 세력의 쿠데타가 성공한 뒤 그와 가족의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장태완 사령관은 서빙고분실에 고초를 겪고, 강제 예편됐다. 6개월간 가택연금도 당했다. 아들의 처지에 실의에 빠진 그의 부친은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다 1980년 세상을 떠났다. 2년 뒤엔 서울대생이던 장태완 사령관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아 의문사로 남았다. 일가족이 풍비박산 난 것이다.
이후 전두환·노태우씨가 법의 심판을 받으며 ‘참군인’으로 재조명된 그는 2000년 새천년민주당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인으로 제2의 인생을 이어갔다. 2010년 7월26일 79살의 나이로 별세했다. 비극은 끝나지 않는다. 2년 뒤 그의 아내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일촉즉발 광화문 대치는 없었다
영화는 서울 종로구 경복궁 앞(광화문 광장)에서 반란군과 이들을 진압하려 출동한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이 대치하며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태신은 비전투병까지 포함한 100명의 병력과 전차 4대를 끌고 와 반란세력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 한다. 산하 포병부대에 반란군이 근거지로 삼은 곳을 포격할 준비 하라고도 명령한다. 새벽이지만 도심 한복판이라 민간인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상황이라 영화 속 긴장감은 최고조로 올라간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이런 장면이 벌어지진 않았다. 12월13일 새벽 장태완 사령관은 비전투병까지 소집해 출동을 준비하긴 했다. 그러나 참모들의 만류가 강했고, 반란세력이 육군본부를 장악하며 사실상 상황을 뒤집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해 출동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육필 수기에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모든 것은 끝난 것 같습니다. 사무실로 올라가서 사후 정리를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비서실장이)건의했다. 직감적으로 ‘이제 수도경비사령부는 내 부대가 아니고, 내 부하들이 아니다. 취임한 지 불과 24일 만에 나의 부대라고 믿었던 내 생각부터가 착각이었다’고 마음속으로 느끼면서 비서실장 건의대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때가 12월 13일 오전 1시31분경이었다.
그는 이후 자신을 “수도경비사령관의 책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인”이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권총 한 자루로 맞선 김오랑 소령
반란군이 공수혁 특전사령관을 체포하러 사령관실로 들이닥쳤을 때 이에 끝까지 맞서는 오진호 소령도 영화에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진호 소령은 배우 정해인이 연기했다. “사령관님 혼자 계시면 적적하시지 않겠습니까”라며 사령관실을 떠나지 않고 끝내 쓰러지는 정해인은 앞서 연기했던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 속 ‘안준호 일병’을 떠올리게 하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오진호 소령의 실제 모델은 김오랑 소령이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반란군에 가담한 3공수여단 10여명이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체포한다며 서울 송파구 거여동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실로 들이닥쳤다. 사령부에 전투 병력이 많지 않다 보니 정병주 사령관은 고립무원이었고,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만 곁을 지켰다. 김오랑 소령은 권총으로 반란군과 총격전을 벌이다 엠(M)16 소총의 실탄을 여러발 맞고 숨졌다. 정병주 사령관도 왼팔에 총탄을 맞았다.
이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정병주 사령관은 강제 예편 뒤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다 행방불명됐다가 결국 1989년 3월 서울 교외 야산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사인을 자살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당시 한겨레, 중앙일보 등 여러 언론이 ‘의문의 죽음’ 이라 전했다.
김오랑 소령의 아내 백영옥씨는 남편의 죽음 뒤 충격으로 시신경 마비가 되며 실명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다 1991년 6월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을 내렸다. 김오랑 소령 본인은 1990년에야 중령으로 추서됐고, 2014년이 돼서야 보국훈장이 추서됐다.
당시 장교들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희생도 있었다. 영화에서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연결하는 지하벙커를 지키다 숨진 병사는 당시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던 정선엽 병장이 모델이다. 전역을 3개월 앞둔 채 반란군과 맞서다 스러졌다고 한다. 반란군 부대에 속해 있던 박윤관 일병도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과정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숨졌다.
이들의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겨레가 2013년 진행한 크라우드 소싱 기획 ‘전두환 재산을 찾아라’에서 볼 수 있다. (▶바로가기: https://hani.com/u/ODM4Mg)
영화는 끝났지만 진행 중인 역사
‘영화보다 더 영화적인’ 역사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영화 개봉 다음날인 23일 서울 광화문에선 퇴역군인 단체와 일부 시민단체가 전두환 2주기 시민 추모행사를 열고 그를 추모했다. 전두환씨의 미납추징금은 아직도 920여억원이 남아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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