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왜 근로조건 기준은 인간 존엄성인가
윤석열 대통령은 강서구청장 선거 참패 이후 ‘차분한 변화’를 당정에 주문하였다. 아직 보선 후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라 섣부른 진단이긴 하지만 내용은 그대로 두고 ‘변화’는 스타일에 그치는 것이 그 실체인 듯해 보인다.
스타일의 변화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야당을 배려하는 듯한 화법이나 제스처에서 읽힌다. 미국식 ‘타운 홀 미팅’을 변형한 ‘카페 미팅’을 ‘비상경제민생회의’의 이름으로 열고 있는 것도 ‘출근길문답’이 사라진 후 굳어진 불통이미지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읽힌다.
그러나 정작 모두가 기대하는 국정기조의 변화는 실감하기 힘든 것이 ‘차분함’의 실체처럼 보인다. 대표적으로 반노동 정책이 그러하다. 윤 대통령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첫 번째 카페 미팅에서 민생 현안으로 외국인 노동자의 인건비 문제와 소규모 사업장의 중대재해처벌법 완화 방안을 부각시켰다.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민원을 제기한 자영업자나 소규모 사업자의 처지는 이해한다. 그러나 정부 수반으로 헌법수호의무를 가지는 대통령이라면 이런 민원이 가지는 헌법적 의미를 고려하여 신중히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외국인 노동자나 중대재해를 당한 소규모 사업장 근로자의 근로조건이 과연 우리 헌법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따져 볼 여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헌법 제32조 제3항은 근로조건의 기준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헌법적 명령에 따른 법률이 근로기준법이다. 인간의 노동은 생존의 토대가 되는 경제활동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지만 기계나 재화와는 달리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엄을 가지는 주체의 활동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 되는 게 문명국가의 보편적 원리이다.
그러나 헌법이 기본적 인권으로 근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음에도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한 현실론을 내세워 외국인은 물론 우리 국민인 근로자들에게도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근로조건이 만연하고 있다. 예컨대, 현행 근로기준법은 4인 이하 근로자를 둔 영세사업장에는 근로기준법의 적용을 면제하여 부당해고구제제도, 연장근로 가산임금 등 기본적인 근로보장마저 외면하고 있다. 헌재마저 이런 법률조항에 합헌의 면죄부를 여러 차례 부여하였는데, 그 논거로 영세사업장의 경제적·행정적 부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 어처구니가 없게 만든다. 부당해고나 장시간노동에 대한 가산임금은 노동환경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본질적 내용인데 이런 핵심사항이 사업장의 규모에 따라 달리 취급될 사안이라는 발상이 납득되지 않는다.
영세사업자의 경제적·행정적 부담이 현실적으로 문제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이 부담을 해소해야 하는 것이 헌법상 기본적 인권의 보장의무를 져야 할 국가의 역할이지, 오히려 헌법이 근로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 근로자에게 그 부담을 고스란히 전가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대재해처벌법을 완화하는 문제 또한 근로자의 생명과 신체가 훼손당하는 재해책임을 어떻게 사업장 규모에 따라 달리 취급하면서 근로자에게 위험을 전가할 수 있는가?
더구나 인간의 존엄성은 국적을 불문한 자연권이다. 일찍이 헌재도 고용허가를 받아 노동하는 외국인 근로자는 내국민과 마찬가지로 헌법적 보호를 받아야 함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다.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체불만 연간 1200억원에 달한다. 사업장 변경 횟수와 사유가 제한되는 고용허가제의 맹점을 이용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다양한 괴롭힘과 학대 등 인권침해 사례는 고질화되었다. 비닐하우스 숙소 등 참혹한 상태의 외국인 노동자 주거환경이 고발되어 온 것도 제법 되었다. 고용허가규정을 위반하고 외국인 근로자의 임금을 편취하는 취업사기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현실에서 차별을 아예 법제도로 공식화하는 외국인 가사노동자 법안이 버젓이 제안되기도 한다. 강제퇴거명령을 받은 외국인을 ‘송환할 수 있을 때까지’ 무기한 보호시설에 수용할 수 있는 출입국관리법 조항도 신체의 자유에 대한 국제인권법은 물론 우리 헌법의 기본원칙을 어긴 악법임에도 건재하다. 그리고 대통령이 민생예산이라고 강변한 내년도 예산에서 외국인 노동자 지원센터의 예산은 전액 삭감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우리 헌법의 최고가치이고, 무엇보다 근로기준에서부터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고 교육할 수 있겠는가? 제발 ‘차분한 변화’를 노동인권에 철저한 헌법정신의 실천에서 보여주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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