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53만명이 찾은 '日콜로세움'…1445억 들인 도서관의 비밀 [이영희의 나우 인 재팬]

이영희 2023. 1. 2.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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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도쿄 특파원

"처음엔 도서관 안에서 길을 잃었어요. 찾던 책이 저쪽에 있었나? 어떻게 가지? 빙빙 돌다 엉뚱한 책이 눈에 띄어 읽기도 하고. 그게 재밌어서 자꾸 오게 되더라고요."
지난달 28일 일본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 시내에 있는 '이시카와현립도서관'에서 만난 60대 여성 세키(関)씨는 요즘 이 도서관의 매력에 깊이 빠져 있다고 했다.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살고 있지만 지난 7월 16일 도서관이 문을 연 후 2주에 한 번은 꼭 이곳을 찾는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지난 7월 문을 연 이시카와현립도서관 내부. 서가를 원형으로 배치해 '북 콜로세움'을 만들었다. 이영희 특파원


지역 주민들뿐 아니다.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5개월 사이 53만 명이 이 도서관을 다녀갔다. '굉장한 도서관이 생겼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도쿄(東京)에서 신칸센으로 2시간 반 거리를 달려간 기자도 그중 하나다.

입구에 들어서면 일단 웅장한 광경에 압도된다. 4층까지 뻥 뚫린 높이 15m의 대형 홀을 원형 극장처럼 서가가 빙빙 둘러싸고 있다. 이 도서관의 심장인 '북(Book) 콜로세움'이다. 계단으로 이어진 둥근 서가엔 약 7만 권의 책이, 벽 쪽 서가까지 합치면 총 30만 권이 진열돼 있다. 설계를 맡은 건축가 센다 미쓰루(仙田満)는 "종래의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던 룰을 깨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고 싶었다"고 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지난 7월 문을 연 이시카와현립도서관 내부. 서가 사이사이 책을 읽을 수 있는 500석의 좌석이 마련돼있다. 이영희 특파원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지난 7월 문을 연 이시카와현립도서관 내부. 원형 서가를 돌다 보면 종종 길을 잃기도 한다. 이영희 특파원


새로운 룰은 구조에만 그치지 않는다. 원형 서가 곳곳엔 '호기심을 품다' '자신을 표현하다' '일본을 알다' 등 문장 형식의 주제가 적혀 있다. 북 콜로세움에는 철학·역사·문학 등 전통적 분류 방식을 버리고 12개의 주제로 나눠 책들을 진열했다. 이시카와현 문화진흥과의 가몬 요시타카(嘉門佳顕) 전문원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몰랐던 책과 조우하는 것, '세렌데피티(Serendipity·뜻밖의 발견)'를 경험하게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500석 규모 의자, 종류만 100가지


연면적이 2만2000㎡로 일본 현립도서관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도서관은 최근 지어지는 일본 공공도서관의 트렌드를 그대로 보여준다. 단순히 책을 읽고 빌리는 장소가 아니라 그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체재형 도서관'이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지난 7월 문을 연 이시카와현립도서관 내부. 편안한 독서를 위해 의자에 공을 들였다. 사진 (C)Hideki Ookura/Kurome Photo Studio


이시카와현립도서관은 '의자 마니아'들의 견학 코스이기도 하다. "도서관에 오래 머무르게 하려면 사람들의 몸이 직접 닿는 가구가 중요하다"는 철학에 따라 책상과 의자에 특별한 공을 들였다. 가구 디자이너 가와카미 모토미(川上元美)에게 의뢰해 도서관에 있는 총 500석을 100종류의 다양한 의자와 소파로 채웠다. 가와카미의 대표작인 '세오토 의자'를 비롯해 '임스체어' 시리즈, 덴마크 디자이너 아르네 야콥슨의 작품 등 전시장에서 볼 법한 의자들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사일런트 룸'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책을 볼 수 있다.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와 마시며 책을 읽는 것도 가능하다. 도서관에선 조용해야 한다는 심리적 장벽을 깨는 시도다. 도서 대출은 이시카와 및 인근 현 주민들만 가능하지만 입장 및 좌석 이용은 누구나 할 수 있다(무료). 4층 '아시아 문학·문화' 코너에는 한국어책도 수백 권 진열돼 있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에 지난 7월 문을 연 이시카와현립도서관 전경. (C)Hideki Ookura/Kurome Photo Studio


잘 만든 도서관 하나, 인구도 늘린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공공도서관을 이렇게 장대하고 우아하게 짓는 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기획부터 완성까지 6년이 걸린 이 도서관에 들어간 예산은 총 150억 엔(약 1445억 원)이다. 이시카와현 인구가 130만 명이니 한 명당 1만엔(약 9만6000원)이 넘는 돈을 도서관 건립에 지불한 셈이 된다. "입장료를 낸 사람만이 아닌 모두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가능했습니다. 최소 50년 간 지역의 문화적 토대가 될 도서관을 만드는 게 목표였고, 반대 의견은 없었습니다." 가몬 전문원의 설명이다.

무엇보다 이시카와현 가나자와시는 일본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찾아오는 미술관인 '21세기 미술관'과 건축 투어에 꼭 포함되는 '우미미라이(海みらい) 도서관' 등을 통해 문화 자원의 힘을 경험한 도시다. 이런 문화 자산 덕에 이시카와현은 코로나19 여파 속에 퍼져 나간 '워케이션(원하는 곳에서 업무와 휴가를 동시에 하는 근무 형태)'의 성지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일본 고치현 유스하라초의 '구름 위 도서관' 내부. 지역의 목재로 천장을 장식해 숲에 온 것처럼 꾸몄다. 사진 구름 위 도서관 홈페이지
일본 고치현 유스하라초의 '구름 위 도서관' 전경. 사진 구름 위 도서관 홈페이지.


실제로 잘 지은 공공도서관이 지역을 살린 사례가 일본에 있다. 2017년 문을 연 고치(高知)현 유스하라초(檮原町)의 '구름 위 도서관(雲の上の図書館)'이다.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을 설계한 세계적인 건축가 구마 겐고(隈研吾)가 디자인한 이 도서관은 지역의 목재로 내부 기둥과 천장을 꾸며 마치 숲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도서관이 지역의 '핫플레이스'로


3500명의 주민이 사는 산골 마을인 유스하라초는 '구름 위 도서관' 덕에 주말마다 외지인이 몰려드는 관광지가 됐다. 빈 집을 보수해 싼 가격에 임대하는 마을의 지원책과 맞물리면서 6년 사이 200여 명의 20~30대들이 이곳으로의 이주를 선택하기도 했다.
일본 도쿄 주오구에 12월 문을 연 '책의 숲 주오'. 지역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사진 도쿄 주오구 교바시도서관
도쿄도 주오구에 12월에 문을 연 책의 숲 주오. 사진 도쿄 주오구 교바시도서관


공공도서관 변화의 움직임은 작은 도서관까지 번지고 있다. 2022년 12월 4일 문을 연 도쿄도 주오(中央)구의 '책의 숲 주오(本の森ちゅうおう)' 역시 누구나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열린 도서관'을 목표로 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고 라운지에서는 도시락을 먹거나 큰 소리 대화도 허용된다. 개관 한 달여 만에 주중 하루 평균 1800명, 주말은 하루 3000명이 방문하는 지역 명소로 자리잡았다.

도쿄·가나자와=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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