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역사는 응천강 북쪽 언덕에 있다
[[오마이뉴스 이상기 기자]
밀양강 건너 영남루 오르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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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림서원에서 영남루를 가기 위해서는 삼문동을 지나 밀양교를 건너야 한다. 밀양이라는 도시도 북쪽으로 산이 있고 남쪽으로 강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해발 200m대의 낮은 산들이 뒤를 받치고 그 앞으로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도심 앞으로 밀양강(일명: 응천강 또는 남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삼문동을 휘감아 돈다. 이 물은 다시 남포동에서 남쪽으로 똑바로 흘러 삼랑진에 이른 다음 낙동강과 합류한다.
밀양교를 건너면서 보니 제51회 밀양아리랑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들이 요란하다. 날짜를 보니 5월2일부터 5일까지 나흘간 열렸다. 그래서인지 강변에 쳐진 포장들이 아직 그대로 있다. 하루만 일찍 왔더라도 축제에 참가할 수 있는 건데 아쉬운 마음이 든다. 다리를 건너자 오른쪽으로 문화원 건물이 보이고 그 위로 높은 곳에 영남루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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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버스정류장에서 차를 내린 다음 영남루를 향해 계단을 올라간다. 계단 주위에는 빨갛고 하얀 철쭉들이 벌써 지고 있다. 올해는 4월에 기온이 높아 꽃들이 일찍 핀 편이다. 계단 한쪽으로 이곳 밀양 지방을 다스렸던 지방관들의 송덕비가 꽤 많이 보인다. 부사를 지낸 통정대부 조준구(趙駿九)의 비석이 특이한 덮개돌로 인해 가장 눈에 띈다.
조선 후기 건축을 대표하는 영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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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을 올라 영남루 마당에 이르니 남쪽으로 2층 누각이 웅장하면서도 시원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영남루는 밀양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응천강(凝川江) 변에 위치한 밀양의 대표적인 누각이다.
이 건물은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 때 건립되었다가 사라진 영남사 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고려 공민왕 14년(1365) 당시 밀양군수였던 김주(金湊)가 누각을 새로 짓고 과거 절 이름을 따서 영남루라 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5년(1459) 밀양부사였던 강숙향이 규모를 크게 확장하였고, 중종 37년(1542) 밀양부사 박세조가 중건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병화로 불타버렸고, 인조 15년(1637)에 밀양부사 심흥이 다시 중건하기에 이른다. 그 후 헌종8년(1842)에 다시 불이 나 소실된 것을 2년 후인 1844년 이부재가 밀양부사로 부임하여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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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는 2층의 본루 외에 좌우에 침류각과 능파각이 있어 더욱 웅장한 느낌을 준다. 본루인 영남루는 조선 후기 우리나라 건축을 대표하는 국내 제일의 누각이다.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평양의 부벽루, 진주의 촉석루가 조선 후기의 3대 누각이다. 영남루 영역에 있는 또 다른 건물로는 사주문과 일주문 그리고 객사로 사용되던 천진궁이 있다.
영남루는 응천강에 연한 절벽 위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정면이 5칸 측면이 4칸이다. 그런데 이들 한 칸의 간격이 아주 넓고 기둥이 높아 누마루가 아주 높고 웅장해 보인다. 좌우에 날개처럼 부속건물이 붙어 있으며 계단으로 연결된다. 층계로 연결된 침류각(枕流閣)이 서편에 있는데 층계가 길고 경사가 급한 편이다. 이에 비해 동쪽의 능파각(陵波閣)은 계단이 짧고 경사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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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둘러 안전을 도모했고 기둥 사이가 넓어 사방 경치를 조망하기가 좋다. 특히 남쪽 응천강과 그 너머 밀양 들판의 전망이 아주 좋은 편이다. 공포(?包)는 기둥 위에만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鬼面) 모양의 꽃받침(花盤)을 하나씩 배치하였다. 안 둘레의 높은 기둥 위에는 이중의 들보(樑)를 설치하였는데, 들보에 돌출된 용 머리(龍頭)가 인상적이다. 천장은 지붕 밑이 그대로 보이는 연등천장이다.
누각의 기둥과 들보에는 '영남제일루'(嶺南第一樓) '현창관'(顯敞觀) 등의 현판 외에도 옛 선인들의 글귀가 여럿 걸려 있다. 퇴계 이황의 글귀가 있다고 하고 문익점의 글귀가 있다고 하는데 확인이 어렵다. 첫째 작은 글씨가 너무 높게 걸려 있기 때문이고 둘째 누각의 안쪽이 상대적으로 어둡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젊은 시절 이곳 영남루를 찾았으나 지위가 낮아 오르지 못했고, 그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영남루를 누구나 오를 수 있으니 좋은 세상임이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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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에서 응천강 쪽을 바라보니 시원한 바람이 얼굴에 부딪친다. 강 한가운데 솟구치는 분수에서 물보라가 피어오르고 그것이 누각에까지 날아온다. 누각이 높아서인지 세찬 바람이 기둥 사이를 관통한다.
저 아래 응천강에는 축제용으로 만들었던 부교가 강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건너다녔을 테지만 축제가 끝난 지금 건너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 하얀 천으로 뒤덮인 다리가 참 인상적이다.
단군 할아버지와 작곡가 박시춘 선생
영남루에서 우리 회원들은 응천강을 바라보며 대화도 나누고 단체 사진도 찍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제 영남루를 떠날 시간이다. 다음 행선지는 천진궁(天眞宮)이다. 영남루에서 마당을 건너 북쪽 방향으로 만덕문이 있고 그 문을 들어가면 천진궁이 나온다. 천진궁은 지금 수리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볼 수가 있다.
이곳 천진궁은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시조를 모신 전각이다. 여기서 역대 왕조란 단군 조선부터 이태조가 세운 조선까지를 말한다. 천진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 팔작지붕의 조선 후기 건물이다. 1974년 12월 28일자로 경상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117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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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진궁에는 한 가운데 단군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리고 동쪽 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락의 시조왕과 고려 태조왕의 위패를 모셨고, 서쪽 벽에는 신라, 백제 시조왕과 발해고왕, 조선 태조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10월 3일에 개천대제라는 이름으로, 3월 15일 어천대제라는 이름으로 제를 올린다.
천진궁을 나와 왼쪽 언덕을 보니 초가집이 한 채 보인다. 이곳이 바로 작곡가 박시춘 선생의 생가다. 박시춘(1913-1996)은 대중음악 작곡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히려 트로트 작곡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해방 전후 우리 가요계를 이끌었던 대표적인 작곡가다. 그는 '애수의 소야곡'을 처음 작곡했고 1937년 가수 남인수가 이 노래를 불러 크게 히트시켰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럭키 서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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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에는 박시춘 선생의 흉상과, '애수의 소야곡' 악보와 가사를 적은 노래비가 서 있다. 한때는 박시춘 선생이 작곡한 노래들을 이 노래비 앞에서 들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들을 수가 없어 아쉽다.
이마의 깊은 주름, 벗어진 머리, 검은색 선글라스 그리고 나비 넥타이가 그의 상징이었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현인, 김정구, 신카나리아 등 원로 가수들과 함께 방송에 출연해 노익장을 과시하던 때가 생각이 난다.
봉황이 춤추는 절에서 석조여래좌상을 만나다
영남루와 천진궁이 같은 영역에 있다면 무봉사와 아랑각은 언덕을 돌아 다른 영역에 자리 잡고 있다. 무봉사 가는 길 역시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계단 좌우에는 초파일을 알리는 연등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 무량문(無量門)에 이르니 청사초롱과 연등 너머로 법당이 보인다. 보물 제493호 석조여래좌상이 모셔진 대웅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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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봉사(舞鳳寺)는 영남루(嶺南樓)의 전신인 영남사(嶺南寺)의 부속 암자로 추측된다. 무봉사의 무봉은 봉황이 춤을 추었다는 의미인데, 이 이름의 근거는 혜공왕 9년 77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곳 영남사에 주석하고 있던 법조선사(法照禪師)가 절의 마당을 거닐고 있을 때 큰 봉황새가 춤을 추며 날아 와 앉았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그 자리에 암자를 짓고 그 이름을 무봉암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후 영남사가 없어지고 영남루가 지어지면서 무봉암이 무봉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 무봉사에는 보물인 석조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불상(佛像)의 형태와 광배(光背)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강석(花崗石)으로 만들어진 이 석불(石佛)은 상호(相好)가 조금은 엄격해 보이는 석가여래좌상(釋迦如來坐像)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이 만져서인지 얼굴부터 어깨와 팔에 이르기까지 때가 많이 묻었다. 그러나 불상(佛像)에 채색(彩色)의 흔적이 있어 원래의 모습은 더 화려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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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배(光背)는 보주형(寶珠形)으로 불상과 같은 재질의 화강석재이다. 윗부분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앞쪽으로 약간 구부러져 있고 당초문(唐草文)과 연화문(蓮花文) 그리고 화염문(火焰文)이 적당히 섞여 있다. 이들 문양 사이로는 세 분의 화불이 보인다. 그리고 광배의 뒷면에는 연화좌(蓮花坐) 위에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을 양각하였다. 그러나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뚜렷이 구별하기 어렵다.
아랑각은 왠지 모르게 쓸쓸하다
무봉사에서 강쪽으로 내려가면 대숲 사이로 전설적인 인물 아랑(阿娘)의 영정을 모셔놓은 사당이 나온다. 이곳이 바로 아랑사이다. 아랑은 명종(재위: 1545-1567)때 밀양부사(密陽府使)의 딸로 성은 윤(尹)씨이며 이름은 정옥(貞玉) 혹은 동옥(東玉)이다. 나이는 열여섯으로 재기(才氣)넘치고 자색(姿色)이 뛰어난 규수(閨秀)감이었다고 한다. 태어난 지 겨우 수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유모의 품에서 자라났으며 외동딸로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느 날 저녁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갔다가 통인(通人) 주기(朱旗)가 겁탈하려 하자 죽음으로써 정절(貞節)을 지켰다고 한다. 이후 신임 수령이 부임할 때마다 잇따라 의문의 죽음을 당하니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이상사(李上舍)가 신임 부사(府使)로 부임하게 되었고, 아랑의 원혼을 만나 기막힌 사연을 듣게 되었다. 이에 부사는 유모와 통인을 처형하고 아랑의 원한을 풀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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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정절을 기리기 위해 영남루 아래 아랑의 시신이 떨어졌던 대밭에다 열녀사(烈女祠)라는 사당을 짓고 매년 4월 16일에 제사를 지내 왔다. 이 사당이 1930년에 아랑각이 되었고, 1965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되면서 이름이 아랑사(阿娘祠)로 바뀌었다. 현재 아랑사 안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영정과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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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잘 아는 밀양아리랑의 또 다른 버전을 보면 영남루와 남천강 그리고 아랑각이 사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노래에 보면 영남루와 아랑각을 굽이도는 응천강 위로 달빛이 교교하게 비친다. 밤이나 되어야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나는 강 쪽으로 내려가 녹음에 둘러싸인 영남루를 올려다보면서 밀양 아리랑을 흥얼거린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후 4시16분이다. 아쉽지만 이제 밀양과 작별할 시간이다.
영남루 비친 달빛 교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 가네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로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아리 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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