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한국경제.. 제2 이헌재가 없다
2004년 3월 12일 오전 11시55분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같은 시각 이헌재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경기도 과천정부청사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이후 그는 고건 총리를 만나 의견을 교환한 뒤 곧바로 대국민 성명을 발표했다. 이 부총리는 “경제 문제만큼은 내가 책임지겠다. 경제주체들은 믿고 따라 달라”고 촉구했다.
이 부총리는 오후에는 금융기관장 및 경제5단체장을 만났고, 별도로 국제 신용평가사와 해외 기관투자가 1000여명에게 자신 명의의 이메일을 보내 “한국의 신용등급 강등은 없을 것”이라는 답변을 받아냈다. 이날 하루 이 부총리는 한강 다리를 여섯 번 건넜다. 다음날에도 이 부총리는 경제장관회의를 공개로 열어 경제가 불안하지 않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한국노총 위원장을 만나 노동계의 협조를 구했고, 저녁에는 재래시장에 들러 서민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요일인 14일에는 예정에도 없는 기자간담회를 자처해 현안과 향후 경제정책 방향을 소상히 설명했다.
이 부총리의 ‘세련된 관치(官治)’에 탄핵 가결 직후 잠시 출렁였던 시장은 급속히 안정을 찾았다. 이후 탄핵 기간 동안 오히려 경제가 나아지면서 ‘이헌재 효과’라는 말도 생겨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문 발표가 있은 지 27일로 사흘째다. 탄핵과 직접 비교할 수 없지만 국정 혼란에 따른 경제위기론은 커지고 있다. 경제 분야 위기관리 시스템을 작동할 컨트롤타워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기존에 예정된 일정을 소화할 뿐 불안한 경제주체와 시장을 안심시키는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정부 내에서조차 “리더십 부족이 아니라 리더십 부재”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노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었던 경제부처 관계자는 “국정혼란 시기에 경제 쪽에서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부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오히려 사령탑 내에서 정책 혼선만 빚어지고 있다”고 꼬집었다.
산적한 경제 문제에 정치적 혼란이 겹친 위기 상황인데도 유 부총리의 지난 3일간 동선에선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유 부총리는 박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발표 당일에는 예정된 한·아프리카 경제협력회의(KOAFEC·코아펙) 환영 청와대 만찬에 참석했다. 전날에는 하루 종일 국회 일정을 소화했다. 기재부 간부회의조차 한 번 열지 않았다. 27일 급하게 주요 부처 장관들이 참석하는 경제현안점검회의를 주재했지만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방안과 부동산 시장 대책을 다음주에 발표하겠다는 것 외에는 시장 불안을 잠재울 시그널을 보내지 못했다. 정덕구 니어재단 이사장은 “국회 일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경제 수장이라면 큰 그림을 그리고, 매듭을 빨리 푸는 게 중요한데 현 경제팀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종=이성규 백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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