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위대한 개츠비’는 미국에 없다
2025년 4월10일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출간 100주년 기념일이었습니다. 이에 맞춰 20세기 미국 문학의 최고봉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작품의 위대함, 불멸성 그리고 현재적 함의까지 다양하게 조망하는 글이 영미권 언론에 쏟아졌습니다.
풍요로웠지만 불평등했던 1920년대
소설의 배경은 흔히 ‘재즈 시대’나 ‘광란의 시대’라고 불리는 1920년대 뉴욕입니다. 1인칭 화자 닉 캐러웨이가 아버지의 충고를 회상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합니다.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을 때는 이 점을 기억해두는 게 좋을 거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너처럼 유리한 입장에 서 있지는 않다는 것을.” 닉은 중서부의 ‘삼대에 걸쳐 꽤 알려진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월스트리트 채권 딜러로 자리잡은 스물아홉 청년입니다. 이 충고의 뜻은 ‘다른 청년들이 너보다 형편이 어려운 것이 꼭 재능 탓이 아닐 수 있다’고 환기하는 것입니다.
뉴욕시 인근의 큰 섬인 롱아일랜드 북쪽 해안에 작은 만을 사이에 두고 웨스트에그와 이스트에그라 불리는 지역이 마주 보고 있습니다. 둘 다 달걀처럼 튀어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웨스트에그에 집을 구한 닉은 이스트에그에 사는 뷰캐넌 부부의 집을 방문합니다. 남편 톰은 닉의 예일대학 동창 친구로 학창 시절 미식축구 스타였습니다. 닉의 먼 친척인 데이지와 결혼한 뒤 석유 재벌의 집을 사서 뉴욕에 진출했습니다. 톰은 닉보다도 훨씬 더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 자신감이 넘치며 고집스럽고 건방진 청년입니다.
닉의 옆집에 사는 개츠비는 신비로운 인물입니다. 대리석 수영장과 잔디밭만 30에이커에 달하는 큰 저택에 홀로 살고 있습니다. 덕수궁 면적의 1.5배에 달하는 크기입니다. 보트와 수상비행기도 소유한 개츠비는 매일 밤 화려한 파티를 여는데, 유명인사들과 괴짜들이 여기에 몰려듭니다. 하지만 그의 과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스스로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집안 출신이고 옥스퍼드에서 공부했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반신반의합니다. 사실 그는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금주법 시대에 밀주 유통과 불법 도박 등으로 큰돈을 벌었습니다.
데이지와 개츠비가 과거 연인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각각 올드머니와 뉴머니를 상징하는 톰과 개츠비 사이에 긴장이 격화됩니다. 이 모습을 피츠제럴드는 빛나는 문장과 몽환적인 분위기로 재현합니다.
아메리칸드림의 상징, 개츠비
아메리칸드림은 ‘모든 미국인은 자유와 성공의 기회를 갖고 있고, 노력을 통해 이를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비록 결과로서 소득과 자산의 격차가 크더라도 미국은 기회가 균등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920년대 이래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표현은 미국의 특성을 상징하는 개념으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부잣집 출신의 톰보다 더 큰 부를 일군 가난한 집 출신의 개츠비는 아메리칸드림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입니다.
2013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연설에서 ‘미국에서는 가난한 집안 출신이 부유한 집안 출신을 따라잡을 가능성이 다른 선진국에 비해 현격히 낮다’고 주장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촉구했습니다. 대통령 경제자문위원장 앨런 크루거 교수는 이를 ‘위대한 개츠비 곡선’이라는 이름으로 정식화했습니다.(그림1 참조) 주요 선진국의 현재 불평등도와 세대 간 이동 가능성을 같이 살펴보면, 불평등이 심각한 나라일수록 세대 간 이동 가능성이 작다는 것을 보인 것입니다. 많은 미국 언론은 이 곡선을 인용하며 ‘아메리칸드림은 아메리카가 아니라 덴마크에서 달성된다’고 탄식을 쏟아냈습니다.
1920년대는 지금과 달랐을까요? 토마 피케티가 운영하는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미국의 불평등은 19세기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상승해 1920~1930년대에 정점에 이르렀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극심한 현재와 비슷한 수준입니다.(그림2 참조) 소설에 묘사된 톰과 데이지, 그리고 개츠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사치스러운 삶은 불평등의 단면을 잘 보여줍니다. 문제는 아메리칸드림 부분입니다. 많은 사람이 1920년대에 기회의 평등이 펼쳐졌다고 생각하고, 개츠비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지만, 실제 1920년대는 미국사에서 가장 세대 간 이동 가능성이 작았던 시기입니다.(그림3 참조)
흔히 평등한 소득보다 공정하고 균등한 기회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이것 자체는 수긍할 만한 내용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소득이 불평등한 곳에서 기회도 불평등한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현상은 21세기뿐만 아니라 1920년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돈 때문에 차인 적 있는 피츠제럴드
이 소설은 여러 지점에서 작가의 경험을 반영합니다. 대학 시절 피츠제럴드는 시카고 출신의 지네브라 킹과 열렬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부유한 지네브라의 아버지는 ‘가난한 청년은 부잣집 딸과 결혼해서는 안 돼’라며 노골적으로 반대했고, 지네브라는 부유한 사업가와 결혼했습니다. 이 상처 때문에 자포자기하는 마음으로 군에 입대한 피츠제럴드는 다시 한 번 사교계의 인기 있는 여성인 젤다 세이어와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젤다 역시 부유한 상원의원의 손녀로 신분 차이가 컸습니다. 가난한 남성에게 지친 젤다가 파경을 선언한 직후 피츠제럴드의 데뷔 소설이 성공하고 스타덤에 오릅니다. 그리고 젤다는 마음을 바꿔 피츠제럴드와 결혼합니다. 비평가들은 데이지에게서 지네브라를 발견하고 개츠비는 작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1920년대 불평등과 신분이 미치는 강력한 영향을 소설뿐 아니라 작가의 삶에서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신현호 이코노미스트·‘나는 감이 아니라 데이터로 말한다’ 저자
*소설로 읽는 경제학 : 일반인은 경제현상에 쉽게 다가가고 경제와 금융 종사자는 소설에 매력을 느끼도록 소설 속에서 경제를 발견하는 글입니다. 4주마다 연재.
F. 스콧 피츠제럴드는?
F. 스콧 피츠제럴드는 1896년 미네소타주 세인트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일랜드계 이민자의 후손이었고 중산층 가톨릭교도였습니다. 1920년 소설 데뷔작 ‘낙원의 이편’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1922년 ‘아름답고 저주받은 사람들’도 잇달아 성공하면서 그는 당대 최고의 작가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피츠제럴드는 세 번째 소설인 ‘위대한 개츠비’를 최고의 작품이라고 생각했지만, 평단의 평가는 호평과 악평으로 엇갈렸고 판매는 전작들에 훨씬 미치지 못했습니다. 1940년 작가가 사망한 이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군인들에게 보낸 진중문고에서 큰 인기를 끈 ‘위대한 개츠비’는 훗날 작가들과 비평가들의 노력으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70년대 이후로는 가장 위대한 20세기 미국 문학작품으로 굳건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연극, 영화, 뮤지컬로 여러 차례 제작됐는데, 로버트 레드퍼드와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개츠비 역으로 출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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