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매력에 청년 모이는 그곳... 예천 '생텀마을'
5년 전 정착한 서울 청년이 기획
행안부 지원받아 청년마을 조성
경치 감상하며 종일 명상·수련
숲속 거닐고 주민들 일상 관찰
특별한 일정 없어도 매회 인기
소멸 위기 예천에 새로운 활력
편집자주
지역 소멸위기 극복 장면, '지역 소극장.' 기발한 아이디어와 정책으로 소멸 위기를 넘고 있는 우리 지역 이야기를 4주에 한 번씩 상영합니다.
경북 예천군은 '단물이 솟는 샘'이란 뜻의 지명처럼 물 맑고 산세가 높은 독특한 지형을 지녔다. 그래서인지 예부터 이름난 정자가 많다.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왔던 예천 권씨의 초간 종택 별당 '초간정',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꾼 뒤 건물을 짓고 퇴계 이황이 현판 글씨를 썼다는 '선몽대', 절벽 위에 지어 마치 성처럼 보이는 '병암정' 등이 대표적이다.
유명한 정자가 많은 만큼 경치 좋은 곳도 많다. 낙동강 지류 내성천이 산과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는 회룡포, 학이 소백산을 타고 노는 듯한 학가산, 물에 떠 있는 연꽃을 닮았다는 금당실마을 등 셀 수 없을 정도다.
몇 해 전 예천의 절경을 감상하며 즐길 수 있는 정자 같은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소백산 아래 울창한 숲속 마을 예천군 효자면에 자리한 청년마을 '생텀마을'이다. 공교롭게도 효자면은 예천에서도 인구 수가 가장 적은 곳이다. 그런 동네가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들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프로그램으로 소멸 위기 지역인 예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도시 생활에 지친 청년 안식처 '생텀'
생텀마을은 서울에 살던 김민성(42)씨가 5년 전 예천으로 이주해 지역살이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한 청년마을이다. 아프가니스탄 등 여러 나라에서 개발협력사업을 수행했던 그는 귀국해 지인을 만나러 예천에 들렀다가 그림 같은 풍광과 깨끗한 자연에 반해 정착했다.
아프가니스탄 생활을 마치고 전쟁터에서 겪은 육체적·정신적 고통에 시달린 김씨는 국내에도 치열한 경쟁 속에 몸과 마음이 지친 청년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국무조정실이 만 19~34세 청년 가구원이 있는 전국 17개 시도의 1만5,098가구를 분석해 지난달 11일 발표한 '2024년 기준 청년의 삶 실태조사'에서도 우울증을 겪었다고 답한 청년은 8.8%로 2년 전(6.1%)보다 늘었다. 자살 생각을 한 적 있는 청년 역시 2022년 2.4%에서 지난해 2.9%로 증가했다.
예천에 머물며 친환경 농산물을 먹고 명상과 수련으로 건강을 회복한 김씨는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을 접하고 청년들이 편히 쉴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기로 결심했다. 1년간 준비 끝에 2021년 말 행안부 심사를 통과했고, 이듬해 4월부터 본격 운영을 시작했다.
마을 이름은 고대 로마제국 언어인 라틴어로 성스러운 장소를 뜻하는 생텀(Sanctum)으로 지었다. 생텀은 전 세계에서 흥행한 할리우드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주인공이 수행하고 거주하는 공간으로 등장하기도 해 예천에서 많은 청년이 심신을 치유하기 바라는 그의 바람과 맞아떨어졌다.
생텀마을은 예천군 전역에 고루 조성돼 있다. 주요 일정은 소백산 끝자락 마을인 효자면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에서 이뤄진다. 건축물인 동시에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기획 단계부터 높은 산 위에 강당 형태로 설계됐다. 산 아래 경치를 감상하며 휴식을 취하고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여기에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호두농장과 해발 700m 높이에 자리 잡은 목재문화체험장 등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청년들이 묵는 숙소는 예천읍의 한 건물을 임대해 게스트하우스처럼 꾸민 곳이다.
조재익 예천군 인구청년정책팀장은 "생텀마을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들판과 과수원, 산과 계곡 등 청년들이 누비는 예천의 모든 곳"이라며 "예천의 자원을 활용해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원활하게 운영되도록 행정적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마을
생텀마을은 매년 4월에서 11월까지 운영된다. 예천군이 조례를 통해 청년으로 지정한 만 19세에서 49세까지 참가할 수 있다. 일정은 짧게는 2일에서 길게는 1주일. 이 기간 동안 예천에서 지내며 다양한 프로그램을 체험하도록 짜여 있다. 체류 기간은 달라도 전체적인 일정은 비슷하다. 온갖 걱정과 근심을 제쳐 두고 푹 쉬는 것이다.
참가자들은 복합문화공간에서 눕거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팍팍한 도시의 일상을 뒤로하고 휴식을 취한다. 요가와 천연염색에 참여하거나 농약과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키운 친환경 호두와 사과 등 특산물을 맛본다. 순대와 막걸리 같은 예천의 대표 음식을 즐기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한다.
예천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볼 때도 서두르지 않는다. 바위나 의자에 앉아 잠시 명상을 하거나 새소리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풀 내음을 맡으며 마치 동네를 산책하듯 한가로이 걷는다.
생텀마을에서 특별한 프로그램이 있다면 예천의 일상을 관찰하고 사진으로 촬영한 뒤 주민들을 초대해 전시회를 여는 '아름다운 밭 사진전'이다. 또 호두나무 숲을 체험하고 각자 숨겨진 요리 재능을 끄집어내 창의적인 음식을 만들어 보는 시간이다. 해가 저물고 캄캄한 예천의 밤하늘 아래 도시에서는 불빛에 가려져 볼 수 없었던 무수한 별들을 감상하는 '별빛 명상'도 생텀마을에서만 누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생텀마을은 모든 일정이 휴식과 치유에 집중돼 있다. 다른 청년마을과 비교하면 다소 무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요소이지만 마을을 스쳐간 청년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입소문을 타며 지난 3년간 228명이 예천에서 먹고 자며 치유하는 지역살이 체험에 참여했고, 그중 10명은 아직 예천을 떠나지 않았다. 이들은 카페와 스튜디오 창업, 요가 강사로 일하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생텀마을을 거쳐 예천에 정착한 서태준(40)씨는 "호주에서 밤낮없이 쉬지 않고 일하며 열심히 살았지만 건강이 악화돼 수술을 받고 회복이 시급한 상태에서 생텀마을을 접했다"며 "명상과 수련으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면서 예천의 청정 자연과 따뜻한 지역사회 분위기에 매료돼 아예 눌러 앉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역에서 생산된 호두를 활용해 건강한 먹거리를 판매하는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며 "생텀마을에서 경험하고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청년마을에서도 성장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사례를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소멸 위기 예천에 희망을 쏘다
생텀마을은 소멸 위기에 놓인 예천군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한때 16만5,200여 명이었던 예천 인구는 청년이 떠나고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2000년대 초 4만4,000명대까지 줄었다. 군이 국제결혼을 주선하고 1인당 600만 원의 비용을 지원하는 '농촌 노총각 가정 이루기 사업'을 전국 최초로 추진했을 정도로 인구 확대는 절실했다. 출산장려금 확대와 영유아돌봄센터 운영 등 갖가지 정책에도 좀처럼 소멸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16년 예천군 호명읍 일대에 경북도청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인구가 5만5,000명대까지 깜짝 반등했으나 공공기관 이전으로 인한 일시적 인구 증가 효과도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예천군은 생텀마을이 들어서고 프로그램이 진행될 때마다 수십 명의 청년이 거리 곳곳을 누비고 일부가 눌러앉자 고무돼 인구 늘리기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청년들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해 매달 20만 원씩 24개월간 총 480만 원의 월세를 지원하고, 자주 가는 카페에서 자유롭게 취업과 창업 정보를 제공받도록 '꿈이음 청춘카페'도 운영 중이다.
정주 인구뿐만 아니라 지역에 장시간 체류하는 생활인구 확장에도 나섰다. 생활인구는 월 1회, 하루 3시간 이상 체류하며 지역에 활력을 높이는 사람을 뜻하는 새로운 인구 개념으로, 지방 소멸 위기를 극복하는 이정표로 부상했다. 군은 생텀마을을 통해 3만5,516명이 예천과 직간접적 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고, 2030년까지 생활인구 1,000만 명을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학동 예천군수는 "생텀마을은 지역살이 프로그램과 호두, 사과 등 농특산물을 활용한 제품 개발로 지역 경제에도 적잖은 도움이 되고 있다"며 "많은 도시 청년이 예천에 머무르고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예천= 김정혜 기자 kj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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