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으로 낼 ‘삼성 합병’ 손배액 887억…“박근혜·이재용에 구상권 청구하라”
한국 정부가 미국 사모펀드 메이슨에 3200만달러(약 438억원)를 배상하라는 국제투자분쟁 결정에 항소하지 않기로 하면서, 지연이자를 포함해 정부가 지급해야 하는 약 887억원에 대한 구상권 청구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옛 삼성물산 주주인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나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상권은 다른 사람을 대신해 어떤 손해나 비용을 부담한 사람이 진짜 책임있는 사람에게 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권리이다.
법무부는 18일 메이슨 국제투자분쟁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1심) 판결에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메이슨은 2015년 삼성 합병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에 부당한 압력을 가해 합병에 찬성하도록 함으로써 자신이 손해를 봤다며 2018년 9월13일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싱가포르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메이슨 쪽의 주장을 일부 받아들여 우리 정부에 손해배상액 3200만달러와 지연이자(2015년 7월17월부터 연 5% 복리)를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정부가 이날 항소를 포기하면서 887억원에 이르는 배상액이 그대로 확정됐다.
이 때문에 정부는 해당 비용을 메이슨에 지급한 뒤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누구를 상대로 어떻게 청구할지 관계 부처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유력하게 검토되는 구상권 청구 대상은 이 회장과 박 전 대통령이다. 박 전 대통령은 삼성 합병 과정에서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의 승계를 위한 ‘묵시적 청탁’을 받고, 합병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로 2019년 8월 유죄가 확정됐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은 삼성 합병에 찬성하도록 공단에 압력을 행사한 혐의로, 이 회장은 이 과정에서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각각 대법원에서 유죄를 확정받았다.
국제통상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는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행위를 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김종보 참여연대 변호사도 “삼성 합병의 이익이 이 회장에게 모두 귀결됐으니 이익을 본 사람이 손해배상을 하는 게 형평에 맞다”고 주장했다. 참여연대는 이날 입장문을 내어 “왜 국민 세금으로 메이슨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하나. 정부는 박근혜 전 대통령, 이재용 회장 등 형사 유죄가 확정된 이들을 상대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 단계에서 구상권 인정이 쉽지 않은 만큼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어떤 정책 결정을 놓고 중과실이라고 선뜻 결론 내기는 쉽지 않다”며 “구상권 청구는 가능하지만 (공무원의) 중과실 여부에 다툼의 여지가 있고, 원인 제공자(이 회장) 입증도 쉽지 않아 보인다”고 지적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회가 지난해 펴낸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인 투자 보장 및 투자자 보호를 우선으로 하는 국제투자분쟁(ISDS) 제도에 국민 재산권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국가배상법을 곧바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노주희 변호사(민변 통상위원장 대행)는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 중재판정에 의한 국가배상이 눈앞에 다가왔고 책임있는 자들에게 구상을 해야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데는 여러 복잡한 법률적 장애가 있다”며 “ISDS와 관련한 특별법을 제정해 중재 절차와 소송, 배상금 지급, 정부의 구상 의무 등에 대한 법률적 근거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법무부가 실익이 없음에도 항소격인 판정 취소 신청을 함으로써 추가적인 지연이자와 법률자문비용을 물게 된 데 대한 우려를 나타내기도 한다. 법무부는 ‘메이슨 항소 포기’와 반대로 2023년 7월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에 1300억여원을 지급하라는 국제투자분쟁 판정에 불복해 항소한 바 있다. 엘리엇 또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했지만, 국민연금이 의결권 자문회사의 권고를 무시하고 합병안을 지지하면서 손해를 봤다며 국제중재를 제기했다. 엘리엇은 “취소 소송으로 이자 비용만 늘어나고, 국민의 혈세만 낭비할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했지만,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은 브리핑에서 “이번 판정은 자본주의 기본 원칙에 반하기에 충분히 승소 가능성이 있다”며 “국민의 혈세를 최대한 절약하며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엘리엇이 제기한 사건은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배지현 기자 beep@hani.co.kr 정혜민 기자 jh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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