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선 31조원 선물에… 트럼프 “위대한 회사, 관세 낼 필요 없다”
24일(현지 시각) 오후 2시 15분 미국 워싱턴 DC 백악관 루스벨트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문을 향해 돌아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선 회장을 시작으로 장재훈 부회장, 성 김 사장(전 주한 미국 대사), 서강현 현대제철 대표 등 현대차 측 인사들과 차례로 눈을 맞추며 악수한 뒤 “아름다운 발표를 할 것이다” “매우 흥분된다”는 말과 함께 연설을 시작했다. 정 회장을 비롯해 현대차 측 인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땐 “매우 고맙다” “큰 영광이다”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소개를 받고 연단에 선 정 회장은 4분여간 준비된 원고를 읽으며 대규모 투자 계획을 공개했다. 지난 1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우리 정부나 정치권 인사는 물론, 기업인 중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는 정 회장이 처음이다. 국내 기업인이 백악관에서 미 대통령과 한자리에서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번이 첫 사례다. 트럼프 1기 당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지만, 투자 발표는 아닌 면담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도 조 바이든 대통령 때 백악관을 찾아 220억달러 규모 투자 계획을 밝혔지만, 코로나 탓에 화상 면담으로 그쳤다.
정 회장은 “앞으로 4년간 210억달러의 신규 투자를 추가로 발표하게 돼 기쁘다”라면서 2028년까지 미국 현지 제철소 건설과 자동차 공장 증설 등에 투자한다고 밝혔다. 210억달러는 현대차그룹이 2005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가동을 시작으로 지난 20년 동안 미국에 투자한 205억달러를 웃도는 규모로, 미국에 진출한 이래 가장 큰 액수다. 현대차그룹이 해외에서 발표한 투자 계획으로도 메타플랜트와 배터리 합작사에 대한 126억달러 투자를 넘어서는 가장 큰 규모다.
현대차그룹의 이 같은 선물 보따리에 트럼프 대통령은 “위대한 회사”라며 “현대는 미국에서 철강과 자동차를 생산하기 때문에 관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답했다. 다만 평소 투자를 결정한 기업에 대해 내놓는 트럼프의 ‘사업가식 발언’을 감안하면 큰 의미는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월 웨이저자 대만 TSMC 회장이 미국에 1000억달러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하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재앙적 사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이 1000억달러 투자 계획을 내놓은 뒤엔 손 회장을 “이 시대 최고의 사업가”라고 칭찬했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미국 시장에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현지 투자가 불가피하다”며 “세금 혜택 등 다른 요소까지 고려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전했다.
선물 보따리에는 루이지애나에 건설하는 270만t 규모 전기로 제철소, 26일 준공식을 갖는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HMGMA)의 20만대 추가 증설 등이 담겼다. 메타플랜트가 연산 50만대 규모로 확대되며 현대차·기아의 미국 내 생산능력은 기존 현대차 앨라배마, 기아 조지아 공장을 합쳐 120만대에 이르게 된다.
정 회장은 전기로 제철소와 관련해 “이 시설에 대해 매우 기대하고 있다”며 “이 이정표를 기념하기 위해 (루이지애나가 지역구인) 랜드리 주지사, 존슨 의장, 스컬리스 원내대표와 함께 트럼프 대통령을 방문하게 돼 영광”이라고 말했다.
이날 투자 발표는 행사가 임박해서야 확정됐다. 정의선 회장 등 그룹 수뇌부는 지난 23일 출국에 앞서 210억달러 규모 투자 계획을 확정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지만, 발표 장소와 방식, 트럼프 대통령의 참석 여부 등에 대한 백악관의 답변을 통보받은 건 행사 시작 불과 4시간을 앞둔 이날 오전 10시쯤으로 알려졌다.
이른 아침부터 ‘한국 현대차그룹이 200억달러를 미국에 투자한다. 이 중 50억달러는 루이지애나 제철소 건설에 투입될 것’이라는 소식이 X(옛 트위터)에 올라오며 현대차 측에서는 ‘만남이 이뤄질 수 있겠다’는 기대가 커졌지만, 답이 계속 늦어지면서 발표 자체가 연기될 수 있다는 기류도 흘러나왔다. 26일로 예정된 조지아 메타플랜트 준공식 일정상 백악관에서 발표할 수 있는 날은 24일 하루뿐이었다. 백악관으로부터 ‘오후 2시’라는 확답을 받자 정 회장 등 경영진은 묵고 있던 호텔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뒤 백악관으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날 정의선 회장은 석유·가스 생산과 수출 확대를 추진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기조에 맞춰 “미국 에너지 산업을 지원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해 30억달러 상당의 미국산 LNG(액화천연가스)를 구매하겠다”고도 밝혔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미국산 LNG 수입액(31억달러)과 비슷한 규모다.
트럼프 대통령의 친(親)화석연료 기조는 물론, 미국에서 셋째로 천연가스 생산이 많은 주(州)인 루이지애나의 지역 정서와 원료 수급의 용이성 등을 고려한 발언으로 풀이된다. 루이지애나에 대규모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선 각종 인허가가 필요한 현실에서 거꾸로 현대차그룹이 당근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루이지애나는 곳곳에 LNG 저장 시설과 파이프가 있는 곳”이라며 “제철소에서 필요한 LNG를 싼값에 안정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고 전했다. 철광석에서 산소를 제거해 직접환원철(DRI)로 만드는 공정에 LNG가 사용된다.
충남 당진에서 추진하는 자가 LNG 발전소 연료로 쓰일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현대제철 당진제철소는 탄소 배출이 많은 고로를 줄이는 과정에서 전기 수요가 급격히 늘고, 전기 요금 부담이 커지자 2028년 완공을 목표로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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