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 교수의 기독교 문화비평] ⑬ 의대 편중 현상 비판 재고(再考), 지탄보다는 수용
지난 2월 셋째 주를 기하여 2025년도 대입 정시 합격자 발표가 마무리되었다. 이에 갖가지 사연을 가진 합격자들이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합격 후기를 올리고 있다. 합격수기를 소개한 사연자들의 면면을 보면 상당히 굴곡진 수험생활을 보낸 이들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더 좋은 대학과 학과(특히 의예과)를 목표로 삼고 재수, 삼수, 심지어는 4수 이상을 하는 도전자의 사연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또 많은 이들이 이미 대학에 합격했지만 자퇴하고 입시에 다시 도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학령인구 급감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쉬워졌지만 그만큼 대학의 효용 역시 크게 떨어졌다. 그러므로 수험생과 그 가족으로서는 상위권 대학과 학과에 들어가지 못하면 특히 의대나 치대에 진학하지 못하면 일단 향후 진로와 취업에 불안감부터 드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교육계 인사들이 의대공화국이 되어버린 교육현실에 개탄을 금하지 못하고 있지만 자기 인생을 걸고 대입에 도전하는 당사자로서는 시험성적이 허락하는 한 의치대야말로 가장 현명한 선택지가 아닐 수 없는 상황이다. 애초 공교육 체계의 목적 자체가 사회가 요구하는 기술과 근로 능력을 갖춘 시민을 양성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의대공화국 현상을 비판적으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의대 편중 현상을 비판하는 교육계 및 재계 오피니언 리더들의 핵심 논거는 미래 산업계에 필요한 이공계 인재 양성이 가로막힌다는 것이다. 이들은 정보통신 및 인공지능 기술 선도국 미국의 상황을 자주 거론한다. 미국은 STE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nd Mathematics) 분야 학과, 다시 말해 기초과학과 수학, 엔지니어링, 공학 분야 학과에 뛰어난 학생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내의 여러 교육 평론가가 이런 관찰에 기대어 의대 편중 현상을 우리 한국 사회 특유의 고질적 병폐로 지목한다. 직업과 관련된 사회적, 윤리적 책임보다 경제적 안정에 최고 가치를 두는 보신주의가 의대 편중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기적인 동기만으로 진로를 선택한 의료인들은 그들이 담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과 직업윤리보다 경제적 이익을 우선 추구하는 방향으로 직무를 수행할 소지가 다분하다는 것이 의대 편중 현상을 비판하는 이들의 핵심 논지다. 그런데 이들은 다음 두 가지 측면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첫째, 미국에서도 의학 분야 학과는 한국 못지않게 상위권 대학진학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의대 편중 현상은 우리 사회에서만 목격되는 유별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고등학교 및 대학교 학업 상위권 학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학과는 금융 및 경영 분야 학과다. 이는 금융패권국이자 금융공학 선도국인 미국의 경제적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의학 관련 학과는 금융 및 경영 분야 바로 다음 순위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정보통신 및 인공지능 분야 기술 선도국인 미국에서조차 의학 관련 학과들은 이공계 학과들보다 선호도가 높다. 그만큼 미국의 학업우수 학생들 사이에서 금융, 경영이나 의학 분야로 진로를 선택하는 것이 경제적 성공이나 안정 추구에 가장 적합한 길로 인식되고 있다.
둘째, 의대 편중 현상이 의료인의 직업윤리 준수 저해 요인이라는 비판은 수험생들이 처한 현실은 무시한 채 그들의 진로 선택 동기를 사회적 혹은 도덕적 당위성만 가지고 평가하는 공허한 도덕주의(moralism)의 발로일 뿐이다. 도덕철학 연구자 알프레드 아처(Alfred Archer)는 도덕주의의 문제점으로 “과도하게 비판적이고 독선적이며 용서가 없는” 태도를 지적하는데 현재 의대 편중 현상을 사회적 병폐로 지적하는 여러 오피니언 리더들의 태도가 이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이들의 견해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리 사회 경제적 효용의 총량 증가를 위한 효율성 제고를 당위적 근거로 삼고 있다. 즉 의대 편중 현상의 전반적인 비판 논거 역시 정언적 당위성보다는 이익과 효용의 향유를 근본동기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혹자는 “망국의 의대 편중”이라고까지 말하며 작금의 청소년 교육현실을 질타하는데 이는 결국 교육체계와 수험생 진로 선택의 효율성에 대한 문제제기일 뿐 도덕성 혹은 당위성과 직결된 사안은 아니다. 의대 편중 현상 자체도 그렇고 이를 다루는 언론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의 태도 역시 기본적으로는 경제적 효용을 지고선으로 삼는 자본주의적 가치평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지난 수십년 동안 우리 사회가 대기업 중심의 ‘자본주의 공간’(capitalist space)으로 개조되어 온 사실을 입증한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는 현대사회가 비인간성과 물신숭배에 짓눌린 자본주의 공간의 생산에만 몰두하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본의 힘에서 벗어나 타자와의 관계성을 존중하는 개별화의 공간, 차이 공간(differential space) 조성을 위한 사고 전환을 촉구했다. 의대 편중 현상이 개인의 경제적 효용과 안정에 모든 것을 내거는 자본주의 공간의 대표적 현상 가운데 하나라면, 이것이 출중한 이공계 인력 양성을 가로막기 때문에 사회적 악(惡)이라고 단정하는 이들의 판단 역시 자본주의 공간의 또 다른 양상일 것이다. 의대 편중 현상이 학업우수 수험생들 개개인의 경제적 입장을 대변한다면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 대부분은 우리 사회 자본의 힘을 틀어쥐고 있는 대기업들의 인력 활용에 대한 요구사항을 대변할 뿐이다. 양쪽 모두 개개인과 우리 사회가 추종하는 삶의 가치에 대한 실존적, 윤리적 고민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기독교적 관점으로 본다면 의대 편중 현상이 순전히 부정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의료행위와 관련된 기독교 윤리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간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요 10:10) 그리스도의 소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명을 얻게 하는 소명 가운데는 분명 질병의 치유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의료행위는 모든 직무 가운데 인간의 생명을 가장 직접 다루기 때문에 생명의 존엄성과 무게를 일깨우는 계기들로 충만하다. 혹 순전히 경제적 안정을 위해 의학 분야로 진로를 선택한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의료인의 길을 걷는 한 언젠가는 타인의 생명이 지닌 무게감 때문에 고민하는 순간이 온다. 그래서 의료인들 가운데는 직무 연차가 쌓이면서 새로 신앙을 갖게 되는 이들이 간간이 목격된다. 이는 실제 통계로도 확인되고 있다. 행동과학자 조슈아 콘래드 잭슨(Joshua Conrad Jackson)이 밝힌 바에 따르면 뉴질랜드에서 15년 이상 특정 직업군에 종사한 이들의 종교에 대한 인식 변화를 조사한 결과 의료행위를 담당하는 의사, 간호사의 경우 15년 새 신앙인 비율이 2% 증가한 것으로 밝혀졌다. 반면 컴퓨터공학, 로봇공학, AI개발 분야에 장기간 종사한 이들은 신앙인 비율이 현저하게 떨어진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인간의 생명과 죽음을 직접 대면하는 의료인들이 그렇지 않은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보다 초월성 혹은 신성을 감지하거나 사유할 기회를 더 많이 얻게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의대 편중 현상을 두고 우리가 고민해야 할 사안은 수험생들의 진로선택 동기 그 자체보다는 과도한 의대 선망을 조장하는 비틀린 사교육 시장과 산업구조, 실효성 있는 의료윤리 교육체계 미비, 그리고 의대생 및 의사들의 비대한 자의식과 특권의식일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의대 진학을 마치 인생 성공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추켜세우는 수험생 학부모와 일부 소셜 미디어 콘텐츠 크리에이터의 행태 또한 반성과 비판 대상으로 지목할 수 있다.
의사는 하나의 직업이다. 다만 다른 직업보다 평균적으로 훨씬 더 높은 전문성, 책임, 그리고 윤리의식이 요구되는 직업이라는 데서 상대적인 특수성을 갖는다. 부여된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의사들에 대한 높은 수준의 사회적, 경제적 보상은 타인의 생명과 건강을 보존하는 어려운 임무를 맡은 이들이 당연하게 받아야 할 대가다. 이 당연한 대가를 바라고 힘써 학업을 연마하는 행위를 잘못된 것이라 비판할 당위성은 적어도 현재 우리 사회의 교육 및 산업 구조 안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게다가 우리 사회는 계속해서 더 심각해질 것이 분명한 초고령화 문제를 맞이해서 다가오는 세대에 지금보다 많은 수의 의료인들을 양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의사의 절대적 수도 부족할 뿐 아니라(OECD 주요국 중 가운데 최저치, 인구 1,000명당 2.5명 수준, 평균은 3.6명) 특정 전문분야 편중 문제도 있다. 따라서 의대 편중 현상은 지탄하고 거부할 일이 아니라 수용하고 조정해야 할 사안이다. 의대 편중 현상과 관련해서 수험생 개개인과 가족들의 선택에 대한 무의미한 도덕주의적 비판 이전에 교육 및 산업 구조와 관련된 사회 전반의 책임과 과제를 살피고 치밀한 대응책을 모색해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지난(至難)한 반면 그 책임을 개인 편으로 돌려 개인의 선택을 지탄하고 가로막는 것이 훨씬 쉽다. 그래서 다수의 교육계 인사들과 전문가들이 이 쉬운 길을 택하고 있다. 하지만 쉬운 길은 대부분 오답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이 오답을 피하려면 의대 편중 현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더 현실적이고 포용적인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박욱주 교수는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했고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좁은문은혜교회 목사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와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리=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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