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도 외국인, 종업원도 외국인100년시장 부활 원동력 '다문화'
주변 산단에 외국인 대거 유입
'다문화 프렌들리' 상권 형성
시장 곳곳에 외국인 북적북적
점포엔 베트남·중국어 가격표
"송편 주세요" 외국인 단골 눈길
적극적인 다문화 정책으로
인구소멸 지자체 위기 넘어야
◆ 다문화 ◆
"이거 3000원에 가져가도 되죠? 500원만 좀 싸게 해주세요!"
경기도 화성시 발안만세시장에 있는 한 채소가게. 전통시장 내 상인과 손님 간 벌어지는 흔한 흥정 대화 풍경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손님이 한국인이 아닌 동남아시아인 4명이다. 능숙한 한국어로 가격을 깎아달라고 조르는 외국인 손님들과 이를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가게 사장님의 모습은 이곳 시장에서 이미 일상이 됐다.
시장 중심에 위치한 '제로마트' 앞 역시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트 앞에서부터 다양한 국적을 지닌 외국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국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트 안으로 들어가자 마트 직원부터 손님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외국인이었다. 인도네시아어, 베트남어, 중국어 등이 뒤섞여 들려왔다. 가격표 등에도 한국어보다 베트남어, 중국어가 더 눈에 띌 정도로 크게 붙어 있었다.
공용어인 한국어가 사용되는 공간은 바로 계산대였다. 세계 각국의 직원들과 손님들이 계산대에서만큼은 약속이나 한듯 유창한 한국어를 사용하며 쇼핑을 마쳤다. 이곳에서 '드문' 한국인 손님 A씨는 "여기는 다른 시장과 다르게 외국인과 한국인이 정을 나누는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21세기 벽란도'를 연상시키는 발안만세시장은 한국 사회가 이미 다문화사회의 문턱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 중 하나다. 1929년 문을 연 발안만세시장은 5만4264㎡ 용지에 214곳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종사자 709명 가운데 외국인이 절반 이상이다.
인근에는 발안일반산업단지, 향남제약산업단지 등 공단이 다수 위치해 있다. 공단에 외국인 근로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이들의 거주지가 곳곳에 생겨났다. 이후 자연스럽게 다문화 가정도 늘어나면서 '다문화 프렌들리(Friendly)' 상권이 형성됐다고 시장 상인회 관계자가 설명했다.
이곳에서 20년 넘게 떡집을 운영해온 박 모씨(58)는 "10년 전까지만 해도 외국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근데 지금은 반대로 외국인 손님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가 떡을 진열하는 사이, 한 외국인 단골손님이 매장을 찾았다. 베트남에서 온 30대 여성 손님은 "사장님, 송편 있어요?"라며 능숙한 한국어로 송편을 찾았다. 그는 "처음엔 신기해서 먹어봤는데, 이제는 한국 떡이 너무 좋아서 친구들도 자주 데려온다"고 말했다.
박씨는 "외국인 손님들이 전통 떡을 먹어보고 친구들을 한두 명씩 데려오다 보니, 이제는 매주 한 번씩 꼭 찾아오는 고객이 됐다"며 "한국 문화를 배워가는 모습이 기특하기도 하고, 나도 그들의 문화에 대해 배우는 기회가 된다"고 미소 지었다.
100년 전통을 자랑하지만 지역민들에게 점차 외면받으며 어려움을 겪었던 발안만세시장이 다른 전통시장과 달리 빠르게 활기를 되찾은 핵심 키워드는 바로 '다문화'인 셈이다.
발안만세시장처럼 외국인을 활용해 지역 활력을 되찾은 사례가 전국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2019년부터 지속적인 인구 감소를 겪었던 전남 신안군은 다문화가정 지원 정책 덕분에 인구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신안군에 따르면 작년 말 기준 인구는 3만8173명으로, 2년 전인 2022년 대비 315명이 증가했다. 이는 전남에서 유일한 인구 증가 사례다. 신안군 관계자는 "적극적인 다문화 포용정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어에 능통한 결혼이민자를 통번역사로 양성하는 사업이 외국인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유도하며 인구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게 신안군 측의 설명이다. 신안군은 결혼이민자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하고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1000만여 원을 들여 지난해부터 한국어 능력이 뛰어난 결혼이민자를 선발해 통번역사로 양성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필리핀 출신 약 배라덴시 씨(한국명 장혜지)는 "신안군 도움으로 통번역사로 일하면서 한국에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며 "외국인에 대한 경찰서 조사, 현장 근로자 교육 등에 외국인 통번역사가 필요하면 우리가 가서 도와주는 일도 많다. 공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보람과 자긍심을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미얀마에서 온 마코틴 씨도 "통역일 덕분에 지역민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지역사회에서도 외국인이라고 배척하지 않는다"며 "한국에 오래 있으면서 이 일을 꾸준히 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강원도 정선군은 바리스타, 전래놀이지도사, 네일아티스트 등 다문화가족 구성원들의 한국 정착을 돕기 위한 일자리 지원사업을 2022년부터 추진하고 있다. 정선군에 따르면 현재 정선군에 사는 결혼이민자는 251명이고, 이들의 자녀까지 더하면 다문화가족 구성원은 400명에 육박한다. 정선군은 올해 자격증 분야를 넓히고 필라테스 같은 스포츠 종목 수업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김현철 연세대 교수는 "모든 외국인 이주나 이민은 노동력 확보로 시작해서, 이들이 결국 이웃으로 자리매김한다"며 "대한민국 사회에 잘 적응하는 노동자들은 그들의 2세까지 한국에서 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밝혔다.
[화성 이대현 기자 / 신안 송민섭 기자 / 서울 안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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